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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슬픔
박종언 지음 / 파이돈 / 2024년 6월
평점 :
당신 덕분에 강이 빛나는 모습을 보았어요. 저의 발이 닿을 듯한 거리에 깊고 푸른 강물은 흘러가고 있더군요. 그처럼 가까이 흐를 수 있는 몸을 가졌다는 환한 시야와 강물의 말없는 침묵이 설핏 어지럽기도 했던가요. 때로 물은 사람을 집어삼키기도 한다는, 그 뼈아픈 슬픔이 다시 되새겨졌습니다. 사람의 슬픔에 동요하지 않는 자연의 깊은 침묵. 그 모두가 저 반짝임 속에 있었어요. 살아가면서 슬픈 것은 그렇게 눈을 시리게도 한다는 금언만이 조용한 강물 위로 흩어졌습니다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이르게 꽃잎을 틔운 풀더미를 보았어요. 분홍빚의 꽃잎. 마치 지금까지의 시간동안 받았던 사랑을 증거하듯 낮은 곳에서 가장 이른 꽃이 피었습니다. 자연도 사랑을 힘을 빌어 성장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분홍빛. 그 연분홍의 여린 꽃잎에 눈을 맞추고만 싶었지요. 낮은 시야에서 발원하는 높이로,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서요. 꽃의 웃음을 보아주지 못한 오랜 회한을 담아서 말이에요
부모님 댁에 가는 길에 좋아하는 빵집에 들렀어요. 분홍빛 꽃들이 참 소담하게 피어서 보내 드려요. 고소한 빵 부푸는 냄새와 알 듯 모를 듯 피어서 주변으로 꽃등을 켠 분홍빛이 잘 어울려서요. 우리 어울려 만나는 시간에도 서로가 빵집이, 빵을 굽는 사람이, 꽃을 심는 사람이, 그 꽃 틔웠을 때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 모두 포근하게 어울려 있었으면 좋겠어요. 편안한 여백과 함께요
아침 햇빛이 호수처럼 아늑하게 고인 모습이 좋아 사진에 담았습니다. 환하게 스민 빛의 호수. 당신 마음 속에도 꼭 그런 것만 같은 곳 있으실 것 같습니다. 가만히 몸을 담그고 머리를 뉘이면 조용하게 평화로운 그런 장소가요. 모든 소음과 먼지 사이에 기적처럼 남아 있는, 어머니 같은, 눈물 나는 고향. 과거는 빨리 지나가 버리는데 여름 햇빛이 뜨겁지도 않은지 풀들은 아직 연한 연둣빛입니다. 뜨거워진 이마에 땀 닦으며 오래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걸었을 것만 같은 어리고 귀한 침묵. 아침은 새소리로 고요하고 연둣빛으로 불어넣고 있습니다. 후아, 후아, 삶을 되살리는 깊은 평화를, 당신의 마음 속에 강물처럼 적시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밤새 비 내리고 조용해진 공원에 꽃들이 피어 있었어요. 그렇게 조용히 지나가는 아픔이 있었어요. 한 시절 꽃으로 피는,
공원에 새로 심긴 노란 꽃. 아침 햇빛과 함께 먼저 달려와 있는 작지만 뜨거운 빛처럼 세상을 꿰뚫는 정다운 꽃. 꽃으로 인해 저 역시 노랗게 물들어 길 하나를 낼 듯합니다. 허공 중으로만 채워지는 침묵의 깊은 무게가 이처럼 가볍게 피어 있네요. 열오른 이마로 뱉는 섬어처럼, 아프게 뼈아프게
당신, 아침 풍경이에요. 이제 막 시작되려는 하루에 깊은 명상의 빛. 이처럼 빛나는 시작을 본 적 없는 것 같아요. 아침볕은 가장 볼품 없는 존재조차 환하게 아름답게 해서요. 가까이 보면 상한 꽃잎들을 찍었어요. 보세요. 꽃잎들이 피어나는 모습을요. 당신에게 이 하루가, 모든 하루의 시작이 이 환한 백지 속에 그려지는 생의 박동이길 기도해요
공원을 산책할 때마다 마음을 담아 보게 되는 꽃이에요. 같은 보랏빛 꽃을 매달고도 위치에 따라 꽃의 모습은 얼마나 다른지. 그 미묘하게 변하는 모습을 알아보는 것이 우리가 아름다움을 대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사람이 누구나 아름다운 존재라면 그 미약한 기척을 알아보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일 거라 생각도 했어요. 사랑하고 기록할 것. 당신, 아직도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람이 많은 것 같아요. 당신 마음에 새겨지고 있는 흔들리는 꽃의 문양도 그럴 거에요. 언젠가 그 마음으로 세상의 꽃들을 볼 거에요
풀빛이 참 고와서요. 그게 촛불처럼 밝힌 보랏빛 꽃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저 연한 빛처럼 빛깔을 간직할 것이라는 믿음. 당신 곁으로 번진 풀빛도 참 고와요. 당신이 바라고 꿈꿨던 날이 이렇듯 곱게 물드는 6월의 새벽. 곁에서 저도 오래 들여다 보았어요. 몸 속으로 보랏빛 등을 켜는 법을 알게 되었어요. 가만히 밝혀지는 나의 빛깔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