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검사들 - 수사도 구속도 기소도 제멋대로인 검찰의 실체를 추적하다
최정규 지음 / 블랙피쉬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검찰 개혁의 주체>

우리의 미래는 우리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얼굴이 없다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살피려 얼굴을 본다. 눈, 코, 입, 기타 얼굴은 상대의 감정과 생각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또 얼굴은 개성을 나타낸다. 얼굴은 가치관이 그대로 녹아든다. 그렇기에 책 ‘얼굴 없는 검사들’은 얼굴이라는, 개성과 다양성과 그리고 가치관을 버리고 ‘조직’의 부속품이 된 검사의 모습을 적확하게 표현한다. 검사는 스스로 ‘검사동일체’라는 표현으로 결속력을 공공연히 자랑한다. 그러나 국민은 정의는 눈곱만큼도 없고, 권력만 탐하는 이들을 보며 조롱의 의미로 ‘검사동일체’라 말한다. 사람들은 모든 검사들에게 이런 비슷한 인상을 받는다.

 한편 얼굴의 다른 기능은 바로 부끄러움의 표현이다. 종종 ‘낯짝도 두껍다.’, ‘철면피’의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다. 제목 ‘얼굴 없는 검사들’은 이 부끄러움을 느낄 기관을 상실한 검사에 대한 일침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는 얼굴 없는 자와 같다. 저자 ‘최정규’는 국민의 봉사자라는 검사가 실수는 인정 않고 국민에게 종종 고통을 안기는 모습에서, 개성, 인격 그리고 부끄러움이 사라진 ‘검사’를 보았다.

국민은 이제 검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를 터뜨리고, 식구 감싸기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따라서 설령 검찰이 반성과 사과를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이들이 그저 거짓말로 잠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것은 아닌지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었다. 실제로 그런 경우가 많기도 했고. 검찰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하던 대로 구 시대의 유지하고, 국민의 봉사자라는 자리를 망각한다. 이들은 과연 정상으로 바뀔 수 있을까?

국가의 주인은 누구?

검사는 봉사자이다. 이들은 공정한 재판을 통해 무고한 시민이 죄를 뒤집어쓰지 않았으면 하는 목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건 그저 학술적인 의미일 뿐. 실제로 검사는 부자에게 친절하고 빈자에게 냉혹하며 제 잇속에 부드럽고 또 권력에 쉽게 무릎을 꿇는다. 이런 모습, 그렇게 낯설지 않다.

가령 검찰수사심의위원회가 있다. 기소 여부를 검사 혼자 결정하지 말고, 국민 등 위원의 생각을 듣고 기소를 결정하는 제도다. 제도의 취지 자체는 정말 좋다. 검사의 자의적인 기소권 행사를 제한하는 것이니까. 다만 쓰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부자, 권력자, 기타 힘이 있는 이들이 제도를 이용하는 걸 보면, 제도가 잘 쓰이는구나 싶다. 하지만 정작 이 제도가 필요한 힘없는 사람은 수혜자가 되기 어렵다. ‘사회적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 아니다’는 이유로 이들은 무시된다. 심지어 검찰은 이들 빈곤층, 서민들이 요청한 경우에는 ‘부의 심의위원회(검찰수사심의위원회를 열지 말지 결정하는 위원회)’도 열지 않는다. 

애초에 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또 국민에 대한 대접은 권력, 부의 정도에 따라 차별하면 안 된다. 하지만 검찰은 공공연히 국민을 차별한다. 권력자의 사건은 며칠 만에 심의위원회가 열리고(그렇다! 열겠다는 결정도 아니고 그냥 며칠 만에 열린다.) 결론이 난다. 하지만 서민들은 수개월 동안 기다리고 기다려도 제대로 대답하지 않고, 사회적 이목이 끌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려된다. 

이는 시민 사회가 검찰 개혁을 바라는 이유를 방증한다. 검사가 보는 국민은 상하 우열이 확실하다. 보다 우등한 국민은 검사가 잘 받는다. 반면 열등한 국민은 박한 대접을 받는다. 같은 국민임에도 검찰 앞에서 우리는 다른 인간이 된다. 

부패가 흐르는 곳

검찰 개혁의 동력이 국민에 대한 차별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다. 개혁의 원인 중 하나는 검사가 저지르는 부정 부패, 범죄, 기타 양심에 어긋나는 행위이다. 성범죄, 비리, 비행, 부패, 횡령, 음주 운전 등등, 검사가 저지른 범죄 행위는 정말 많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컨대 검찰 내부에 있었던 성범죄 사건 봐주기 사례가 있다.(https://youtu.be/lDKOkaijyEY) 검찰은 조직 내부의 성범죄를 그저 뭉개버리고 없던 일로 하려고 했다. 몇 해 전 검사 임은정 씨가 이를 사회에 폭로하지 않았더라면 검사들의 성범죄는 그냥 묻혔을 것이다.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접대 행위도 문제다. 예를 들어 ‘불기소 세트는 96만 원, 무죄 세트는 94만 원’이라는 제목으로 약 2년 전 모 방송국에서 검사의 접대 문제를 꼬집었다.(https://youtu.be/cAGNAUwemxU) 하지만 몇 년 뒤, 이들의 처벌은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이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검사는 사실상 없었다. (https://youtu.be/5bNbvhCKgNw) (이후 소송에서 무죄 선고가 나왔다. 책임 진 사람은 없다.)

검사는 범죄를 저지르거나 비양심적으로 행동하며 국민에 대한 봉사자라는 자격을 망각했다. 심지어 검사들은 조직 내부의 범죄 사실이 있으면 반성과 사죄는커녕 감추기에 급급했다. 앞서 말했듯, 90만 원 대 접대를 받은 검사들은 아무런 책임 없이 검사 생활을 지속했다. ‘검사동일체’가 바로 이런 거구나 싶다. 뻔뻔하고 오만한 자들. 그래서 인간적인 얼굴은 사라진, 부끄러움을 잊어버린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현재 검사는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 비양심적 행위를 아무 책임 없이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는 검사. 자신뿐 아니라 제 식구의 범죄까지 감싸는 검사. 기타 제 이득에 눈멀어 검사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검사. 이렇게 많은 수준 미달 검사들이 많다. 이 상황에서 검찰의 자정작용이 가능은 할까? 검찰은 때때로 필요에 의해 스스로 개혁하겠다고 약속하고 다짐하지만 사실 그걸 믿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어차피 흐지부지 끝날게 뻔하기에. 결국 검찰, 그리고 이들과 관계된 사람들은 개혁의 주체가 되면 안 된다. 그렇다면 개혁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할까? 바로 국민이다.

국민 없는 사투, 검찰 개혁 실패의 원인

검찰 개혁은 국민의 꿈이다. 검사의 비위 문제를 접할 때마다, 그럼에도 책임을 지지 않는 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개혁을 원한다. 이는 검찰의 부정부패가 그저 소수 인원의 일탈로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검찰이 부도덕한 짓을 저지르면 국민도 같이 영향을 받는다. 대개는 썩 좋지 못한 결말로 이어지는 영향이다.

하지만 검찰 개혁에 국민은 없다. 예컨대 지난 정부의 검찰 개혁을 들 수 있겠다. 이들은 검찰의 힘을 약화시키고 새로운 견제장치를 마련했다. 예를 들어 고위공직자수사처 등 소위 말하는 ‘검수완박’을 위한 일련의 조치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지난 여당(현 야당)이 패배했다. 당시 여당은 대통령이 바뀌어 정권이 변하면 검찰 개혁이 중단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개혁의 시계가 갑자기 빨라졌다. 급했다. 시간이 모자랐다. 충분한 숙의는 없었다. 급한 마음에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과정도 생략됐다.

국민은 뒷전이었다. 검찰과 정권의 힘겨루기, 여야 정치인의 힘겨루기 등으로 검찰 개혁은 국민이 실제로 체감하는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거악 척결이라는, 크고 중요하다 생각되는 문제만 의제에 올랐다. 국민이 느끼는 문제는 의제로 오르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민원 사무의 불친절 따위의 것들. 검수완박을 이룬 후(부실하지만 정권 변경 직전에 검수완박을 위한 최소한의 법 개정을 완료했다.) 국민이 실상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없었다. 검찰의 민원인에 대한 태도는 똑같았다.

한편 현재의 검찰 개혁이 검찰의 수사권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기소권이라는 중요한 문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권력자(특히 부자)들에 대한 기소는 그들이 유리한 쪽으로 집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반면 서민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로 기소권을 사용했다. 이것은 전 정권이 했다는 검찰 개혁 이전이나 이후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국민이 원한 개혁은 이런 게 아니었다. 정작 우리가 원한 검찰 개혁은 국민 한 명 한 명에게 몸을 낮추고, 필요할 때마다 즉각 반응하고 성실히 문제를 해결하는, 그런 선한 검찰이 되는 것이었다.

선한 검찰이 되는 건 도저히 무리인 걸까. 서민 일은 신경도 안 쓰고, 언론에 나오니까 마지못해 현장에 나온 검사가 있었다. 그녀가 맡은 건 산사태 사건이었는데, 인재라고 주장하는 마을 주민들의 신고를 2년이나 방치했다. 언론사의 취재 이후 절차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 절차가 관련 부서에 이관하는 것이었으니 분만 삭힐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 검사는 사고 현장에서 기자를 만났다. 그녀는 부리나케 도망갔다. 2년간 꿋꿋하게 게으름을 피운 주제에, 도대체 어디에 그런 날쌘 모습을 숨겨뒀었는지 참.(https://youtu.be/HCykCxmxEI4? t=72)

국민이 원하는 건 이런 검사를 징계하고 국민의 사소한 문제도 성심성의껏 챙기는 검찰이다. 그게 진정한 검찰 개혁이다. 거악 척결 등 검찰 개혁에 큰일이 많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들, 가령 서민의 민원 문제 따위가 무시당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결국 검찰 개혁의 완성은 서민들 한 명 한 명이 검찰이 이제야 바뀌었다고 체감하는 때일 테니 말이다.

지하실에 나서야 할 자는 국민인 우리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민원실은 지하에 있다. 항상 울분에 찬 사람들로 북적대는 이곳은 억울한 서민들이 가득하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온다. 지방에서는 민원을 제대로 받아 주지 않거나 해결해 주지 않으니 서울로 몰린다. 그러면 검찰은 적어도 민원 접수는 해 준다. 실제로 이걸 신경 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편 13층. 이 층은 검찰청장을 포함해 검찰의 중추들이 모여있는 층이다. 크고 쾌적하고 밝다. 민원인이 있는 지하의 그곳과 같은 건물인 게 믿어지지 않는다.

지하와 13층. 서민과 권력자. 민과 관의 관계. 건물의 층수와 쾌적함은 역학관계를 의미한다. 검찰 개혁에서 국민이 원한 건 이런 차별을 없애고 국민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검찰로의 변화였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국민이 볼 때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정치인이 주도한 검찰 개혁은 실패했다.

정치인이 실패했으니 검찰 개혁은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다. 이제 국민인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한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 과거에 읽은 책 ‘엘리트 세습([소개] 엘리트 세습 - 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 (대니얼 마코비츠, 세종서적) (tistory.com))’이 떠오른다. 검사들은 엘리트이다. 그리고 검사들은 이제 서민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둘은 유리되어 있다. 전혀 다른 세상을 산다. 그래서 서민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고, 경험도 공유하지 않는다. 그 결과 국민이 뭘 원하고 뭘 원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검사가 생각할 때 서민들의 요구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다. 결국 국민의 요구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는 어리광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검찰 개혁은 국민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서민은 이미 오랫동안 고통받았다. 우리가 원하는 건 국민의 봉사자로서 일하는 검사와 검찰이다. 직접적인 접점에서 친절하게 국민의 불편을 해소해 주는 검찰. 이 상상은 일반 국민만이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일반 국민이 개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쓴 서평으로 개인적인 주관적 견해가 들어갔음을 알려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 ‘외곽주의자’ 검사가 바라본 진실 너머의 풍경들
정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정규 저 ‘얼굴 없는 검사들‘을 보고 난 뒤 이 책을 보면 대한민국이 마치 두 세상인 것 같다. 이 이야기가 거짓은 아니지만, 검찰이 욕먹는 이 시점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위선인 듯 느껴진다. 자기만 양심있으면 뭐하나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이다.˝ 검찰 내부는 썩었는데 혼자 깨끗하면 뭐하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로나가 아이들에게 남긴 상처들
김현수 지음 / 해냄 / 202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코로나19, 아이들이 위험하다>

어른들 문제에 가려진 아이들의 위기 상황



코로나19와 아이들

코로나19가 세상을 덮친지도 몇 년, 이제 우리는 이 병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팬데믹 초창기의 혼란함은 가라앉았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19 이전의 상황은 아니어도 초기의 제재 조치를 맞닥뜨리던 상황과 비교하면 천국과 같다. 지역 곳곳에서 축제가 열리고, 사람들의 오프라인 모임이 활성화되고 있으며, 식당은 코로나19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가득하다. 이를 보면 적어도 외형상 코로나19 사태는 진정 국면에 돌입한 듯 보인다. 설령 그것이 냉정히 말해 코로나19를 마주하는 사람들이 코로나19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고, 그래서 엔대믹 상황으로 치달아서 코로나19를 퇴치하는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지만.

 

하지만 안정된 상황은 겉모습일 뿐, 더 이상 사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멀리 보면 서서히 복구되는 듯 보이는 사회도, 가까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이번 서평 대상의 책 '코로나가 아이들에게 남긴 상처들'에서 볼 수 있는 아이들의 상처가 그렇다.

 

산적한 문제가 쌓여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문제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특히 경제는 연일 신문지상에, 뉴스에, 그리고 유튜브에 화제가 되고 있어서 모를 수 없다. 식량 위기, 이로 인한 인플레이션, 국제정세의 악화(특히 미중 갈등,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로 인한 경제 위기는 우리에게 현실적인 공포로 다가온다. 그런데 사회 문제, 그것도 아이들 이야기는 매스컴의 주목을 유독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코로나19 상황에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어디 있겠냐마는, 아이들의 문제도 중요하다는 걸 어른들은 잘 잊어버리는 것 같다. 그래서 책 '코로나가 아이들에게 남긴 상처들'은 현시점에서 꼭 회자되어야 할 책이다.

 

아이들도 아프다

"... 그런데 이 코로나 대감염 속에서도 어른들은 온통 부동산, 코인, 주식 등 눈앞의 돈, 죽기 전에 다 쓰지 못할 돈 이야기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승전 공부로 끝나는 꼰대 세대인 부모와의 대화는 답답하기 그지없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앞날에 대해 근거를 가지고 밝게 이야기해 주는 어른을 만난 적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제1장. 코로나 상처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37p

 

책 '코로나가 아이들에게 남긴 상처들'은 저자 '김현수'의 작품이다. 저자는 이미 책 '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은 것들'을 쓴 경력이 있다. 그만큼 코로나19 사태에 아이들의 문제를 신경 쓴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통상적으로 아이의 중요성은 다른 가치에 밀리는 법이니까. 경제나 사회나 정치나, 기타 어른들의 사정 따위로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아이들이 팬데믹 상황에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 진단했다.

 

반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 초기의 그 아수라장인 상태에서 아이들을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정치권은 연일 정부의 방역에 대한 잘잘못 공방으로 추태를 보였다. 경제는 특히 식당 등 외식업계의 곡소리로 가득 찼다. 다른 일자리도 곡소리 한 번 나지 않은 곳이 없었겠지만 외식업계의 타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식당 주인들은 앞다투어 큰 소리를 냈다. 곡소리만큼이나 큰 소리로 언론, 정치권, 심지어 일반 대중들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였다. 더불어 일반 대중들은 티브이만 틀면 나오는 사망자 몇 명, 확진자 몇 명이라는 숫자를 들으며 마음을 졸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언론에서 짤막하게 다루는 내용으로는 어린이의 상처를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못 들었다고 지른 비명 소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몰랐다고 해서 상처 난 아이들의 마음이 멀쩡해지는 것은 아니다. 대강 문제를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공동체 파괴, 교육 격차,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 중독, 외로움, 고독, 부모와의 갈등, 교육 외 사회생활 교육 미흡, 기타 등등. 수도 없이 많은 문제들을 아이들은 혼자서 견디고 있다. 

 

문제는 아이들의 상처는 어른들이 쉽게 무시한다는 데 있다. 어른들은, 특히 부모는 아이들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떠올리지 않는 듯하다. 그저 생각하는 거라고는 애들 성적, 학습, 스마트폰 좀 그만 봐, 커서 뭐가 될래 등이다. 이는 부모가 코로나19 이전, 아이들을 대하고 시키던 루틴을 고수할 생각밖에 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우리 다 알지 않는가. 코로나19는 과거와 미래를 단절시켰다. 과거를 돌리려고 무진 애를 쓰는 건 무의미하다. 이제 우리 아이들의 말과 행동, 상처에 눈과 귀를 집중시킬 때가 되었다.

 

어른들은 모른다

"교사의 교육, 부모의 인생 조언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아이들이 말합니다. 지금의 현실이 올바르지 않지만 적응하고 살기 위해서 만들어낸 편법들을 감수해야 한다는 현실 논리, 적응 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산을 넘어 역사의 현장에 다다랐지만,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에필로그, 279p

 

아이에 대한 어른들의 관심사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바로 성적이다. 코로나19 사태라는, 전대미문의 대사건 속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러나 아이와 어른의 관계는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성적, 책, 공부. 이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가 모를까. 다만 아이에게 '이것만' 말한다는 게 문제다. 심지어 어른들은 팬데믹 상황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었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변화하지도 않았고 그저 악화되기만 했다. 아니면 악화가 아니라 그냥 민낯이 드러난 것뿐이거나. 이제 부모와 아이의 소통은 성적, 공부, 책 말고는 없다. 부정하거나 체념하는 부모들이 있을 것 같은데 사실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 외에 어른들은 말을 잘하지 않는다. 소통 능력이 빵점이다.

 

어른들이 변화된 현실을 부정하고 적응하기 어려워할 무렵, 아이들은 바뀌었다. 자기 인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순간에 오롯이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공부가 아니라 다른 진로, 다른 중요한 가치관이 있음을 깨달았다. 변하지 못한 건 아이를 예전처럼 대하는 어른이다.

 

어른은 나름대로 고충이 있다고 항변한다. 아이들의 스마트폰 사용시간은 이미 중독 수준으로 말을 해도 들어먹지를 않는다. 학교 등교를 위해 일찍 일어나던 아이들이 코로나19로 등교를 못 하게 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일어나는 시간은 제멋대로에, 일어나도 게으르게 행동한다. 원격 수업은 그저 틀어 놓기만 하고 듣지 않는다. 아예 모니터를 꺼버리고 다른 일을 하는 아이도 있다. 

 

"도대체 뭐가 되려고 그러니?" 이 말 한마디 안 한 어른은 없고, 이 말 들어보지 못한 아이도 없다. 이 문장은 대단히 함축적인 의미를 지닌다. 바로 둘 세대 간의 몰이해, 불통이다. 간극을 좁힐 수가 없다. 그 결과 어른들은 코로나19로 인한 아이들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형식적인 위로나 해 주면 다행이다. 대뜸 의지가 부족하다느니 게을러 빠졌다느니 하면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게 부지기수다. 여기에는 아이가 뭐가 힘이 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어른의 고약한 편견이 자리한다.

 

물론 어른들도 힘들다. 꼬박꼬박 일하고 월급 받고 애들 가르치고 하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그렇지만 아이들도 아프다. 그것도 아주 많이 아프다. 그걸 이해해야 진정한 부모가 된다.

 

"보살핌과 이해, 격려가 이 시대의 어린이, 청소년에게 필요합니다. 물론 이 과정을 잘 견디고 함께해주는 부모님들도 격려와 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 격려하고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잘 크고 있다는 느낌, 어려운 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성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마음 한가운데 안정적으로 뿌리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기대합니다."

제4장. 코로나 상처 치유를 위해 교사, 부모가 실천해야 할 열 가지, 166p

 

단절된 아이들, 고립되다

"아이들의 걱정은 친구 관계, 그리고 자신의 존재감이었습니다. 청소년 기관에서 조사한 결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이들의 진짜 격정은 관계의 결핍,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4장. 코로나 상처 치유를 위해 교사, 부모가 실천해야 할 열 가지, 143p

 

아이들에게 있어 학교 생활은 학습을 위한 공간 이상이다. 온갖 공동체 활동을 진행하는 삶의 체험의 장이다. 코로나19 상황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2년 정도가 지난 지금, 학교는 일견 보기에 정상화되어가는 듯하다. 코로나19 시대의 단축수업은 이제 끝났다. 이제 예전처럼 학교 다니고 공부하면 된다. 이제 해결. 끝.

 

끝은 무슨. 부모는 현재의 학교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학교는 이제 예전 그 학교가 아니다. 장소 문제가 아니다. 문화의 문제다. 2년의 시간은 아이들의 또래 문화를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학생회는 물론이거니와 여러 동아리 활동, 수학여행, 기타 집단 활동의 문화가 사라진 공간, 학교는 여느 독서실과 다를 바 없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다른 건 선생님이 있다는 것?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쓰지 못하는 것?

 

이제 아이들은 학교 생활의 근본적인 의미를 고민하고 있다. 사실 대한민국 교육이 주입식 교육과 대학 입시를 위한 교육장으로 변질된 지는 한참 되었다. 비단 코로나19가 퍼졌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간신히 학교가 유지된 건 사회생활을 배울 거의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서로 자신만의 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화합하는 공간. 마음껏 행동하는 것을 막는 규칙, 규율 따위를 지키면서 자연히 배우는 준법정신 함양의 장. 적어도 일개 개인이 할 수 없는 일을 한다는 데 학교는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제 아이들이 경험할 수 있는 협동 활동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 코로나19 때문에 집단 활동이 일정 부분 제한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걸 빼면 사실 학교의 존재 의미는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묻습니다. 친구가 그렇게 중요하고, 친구들 사이의 존재감이 그렇게 의미가 큰가 하고요. 친구를 왜 꼭 만나야 하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의 걱정에 공감하기 힘들고 더 많이 다투기 시작했던 것이죠."

제4장. 코로나 상처 치유를 위해 교사, 부모가 해야 할 열 가지, 143p

"이 외로움이 코로나 시기에 더욱 깊어져서 많은 아동, 청소년들은 이를 이해받고, 치유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부모 세대들에게는 외로움이 중요한 감정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시간이 모자라고, 해야 할 일은 많고, 함께할 형제가 있었던 부모 세대는 외로움에 대해 이해가 부족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5장. 아동 청소년을 위한 건강한 회복을 위한 제언, 224p

 

어른들은 아이들의 외로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그 나이대에 맞게 또래 집단을 형성하고, 그곳에서 서로 존중하며 자신감을 쌓아나간다. 외로움을 덜어주는 기능도 중요하다. 앞서 말했듯 아이에 대한 부모의 이해 수준은 상당히 낮다. 반면 또래 집단에 소속되어 있으면 일단 비슷한 문제의식, 감정, 상황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외로움 해결책으로 부모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겠다.(물론 개중에 부모와 있을 때 안정적이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어쨌든 코로나19가 아이들이 간신히 조절하고 있던 외로움을 폭발시켰다. 이제 아이들에게 외로움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오래된 문제, 해결의 시작은 이해

코로나19 시대, 아이들의 상처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방법은 명확하다. 이 책 '코로나가 아이들에게 남긴 상처들'은 바로 이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여러 방법들이 있지만 이 서평에서 굳이 지면을 할애하여 방법을 나열하지는 않겠다.(궁금하다면 직접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다만 여기서는 이해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지금 한 가지 질문을 해보겠다. 필자가 지금까지 이 서평에서 말한 '문제'라는 것은 과연 누구의 기준일까? 우리가 말하는 문제의 기준, 혹은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어른들이다. 가령 스마트폰 중독 문제가 있다. 요즘 부모들은 스마트기기(예컨대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의 중독 문제를 크게 우려한다. 그렇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스마트폰을 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 있다. 현재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발전하는 데 있어 중요 수단이 되는 건 스마트폰이다. 특히 SNS가 그 역할을 한다. 부모 세대는 머리로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거부감이 들 행위가, 사실은 아이들에게 있어서 또래 집단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행위였을 수도 있다. 다만 이해하지 못했기에, 혹은 안 했기에 알 수 없었을 뿐이다.

 

필자가 이해의 문제를 말하는 건 이것 때문이다. 어른이 생각하는 문제는 사실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괜히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스마트폰을 없애버리면 어떻게 될까? 아이들은 또래 집단에 튕겨나갈 것이다. 외로움은 늘어날 것이고.. 가정은 불화로 제 기능을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해 어른의 잣대로 문제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말자. 아이를 이해하고 그들 나름대로 고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설령 그게 매일 정 붙이며 사는 가족이라도 말이다. 그리고 대화는 공부하라는 소리밖에 해 본 적 없는 부모라면 사실 타인을 이해하는 것과 제 아이를 이해하는 것의 차이는 없다. 하지만 아이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력자인 어른이 부모가 꼭 필요하다. 희망을 갖자. 뭐, 외계인과 통신하는 것처럼 허무맹랑한 일은 아니니까.

 

추천 독자

이 책은 코로나로 인한 아동의 피해를 고찰하고 원인 및 해결방안에 대하여 썼다. 따라서 1차적인 예상 독자는 아이들과 특히 같이 살고 있는 부모들이다. 덧붙여 부모는 아닐지라도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교사 등의 사람들도 꼭 읽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아이들과 오랜 시간을 같이 있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과외 교사, 학원 관계자들에게 추천한다.

 

코로나19는 어른들에게도 버티기 힘든 재난이었다. 아이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어른의 입장에서 어른들의 피해만을 생각할 때, 아이들은 홀로 묵묵히 견디고 있다.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에 필자가 원하는 건 어른들 전부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것이다. 아이들도 아프다. 잊지 말자. 아이들도 아프다.


이 책은 출판사 '해냄'으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쓴 서평입니다. 개인의 주관을 견지하여 작성했음을 밝힙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다수결은 위험하다 - 다수결이 세상을 망친다
이케다 기요히코 지음, 이정은 옮김 / 홍익출판미디어그룹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일본 폴리페서의 에세이>


 서론. 주의!

저자 ‘이케다 기요히코’의 이 책 ‘다수결은 위험하다’는 사회과학 책으로 분류한다. 그렇지만 필자 생각에 이 책은 에세이다. 그냥 자기 정치적 주장이 들어간 책. 사람들 여론이나 꾀어낼 작정으로 만든 책이다. 

자극적으로 서평을 시작해 독서에 끌어들이려는 것 아닐까 독자들이 생각할 수 있겠다. 물론 독자의 관심은 끌고 싶다. 그런데 이 책에 말고, 이 서평에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책은 읽지 말기를 강력히 권한다. 

어째서 필자는 이 책을 싫어하는가. 언뜻 보면 제목도 다수결, 민주주의 문제를 날카롭게 해석해 놨을 것 같다. 저자도 교수이니 믿을만할지도 모른다. 필자도 그랬다. 책을 여는 순간까지는. 그 뒤 속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모르지 않는가. 설마 이런 품질로 끝까지 가겠어. 그리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읽었다. 난 순진했다. 그냥 책을 읽지 말걸 그랬다. 

그런데 왜 이 책의 서평을 쓰는가? 나 같은 피해자가 생기지 않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이 책은 근거 빈약, 사례 빈약, 논점(물론 저자가 다수결이나 민주주의를 주제로 정했다는 가정 하에) 일탈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본론

1. 제목은 맞지 않고, 내용은 부실하다

책은 제목과 내용이 잘 맞지 않다. 제목과 달리 실제 내용은 동조 압력에 휘둘리는 일본 국민, 아베 신조 전 총리와 휘하 자민당 정권에 대한 비판이다. 저자는 제목대로 민주주의, 다수결에 대한 사회과학 글을 쓸 생각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어쨌든 ‘다수결’에 대한 제목이기에 앞에 관련 내용이 조금 들어가기는 한다. 하지만 뻔한 내용뿐이다. 다수결은 창의적이고 능력 있는 소수를 억압해 사회 발전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다수결과 관련해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뿐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드는 그 주장의 근거들은 괜찮은가. 그렇지 않다. 주장의 근거 또한 질적으로 떨어진다. 수치로 나타나는 근거가 없는 건 대중서니 그렇다고 쳐 주자. 출처도 없이 실제 일어난 사건을 적어 놓는 것도 일단 그렇다고 치고. 그런데 저자 스스로 상상하고 결론을 내버리는 예시들은 그냥 저자의 자기 상상일 뿐이다. 근거도 뭣도 되기 어렵다. 다 읽은 뒤 익숙한 느낌이 든다 싶었는데, 이제 생각해보면 자기계발서와 비슷했다. 출처 없는 사실 나열도, 수치 없는 근거들도, 그리고 저자 자신이 상상한 근거들을 내뱉는 것까지 죄다 말이다. 

정리하자면 저자는 제목과 다른 주장으로 독자를 기망했으며, 그렇게 꺼낸 주장의 근거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딱 잘라 말하면 이 책은 ‘정치 주장 + 자기계발서’라고 할 수 있겠다. 

 2. 어처구니없는 자국 중심의 현실주의, 혹은 집단 이기주의

누군가는 저자가 자유민주당(현 일본 여당)을 비판한다는 것 때문에 그를 호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그다지 공감할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이해득실을 따지는 현실주의자이며 자국 중심적인 집단 이기주의를 갖고 있다. 이는 책을 보면 느낄 수 있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왜 큰 소득이 없는데도 영토 분쟁을 일삼는 것일까? 그냥 가만히 놔둬도 될 일을 일부러 들쑤셔 문제를 만들고 있는 이유가 뭘까?’ - 책 89% 중

 

저자는 일본 정부의 독도 등 영토에 대한 대응을 비판한다. 이것만 보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음 인용문에서 그의 사상이 드러난다.

‘그러나 오늘날 전쟁은 이겨도 저도 득이 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다. 표면적으로 다른 주장을 하더라도 가능하다면 상대국의 국민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면서 유연하게 넘어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웃나라들과 옳고 그름을 가리는 흑백논쟁은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다시 강조하고 싶다.’ - 책 89% 중

 

다시 말하면 이렇다. ‘딱히 이득이 없으니 건들지 말자,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지만 이익을 위해 참자.’ 이는 시시비비를 따지면 독도가 일본 것이 맞는데, 일본의 이익을 위해 한국의 말을 그냥 들어나 주자는 뜻이다. 그렇다면 독도 관련하여 어떤 손익계산을 하고 놔두자고 주장하는 걸까. 다음을 보자.

‘특히 한국은 독도에 초소까지 건설해 매년 막대한 비용을 쏟고 있는데, 독도를 놓고 한바탕 전쟁이라도 치르지 않을 바에야 내버려두는 것이 손해를 보지 않는 선택이다.’ - 책 89% 중

 

저자는 우리나라의 방어 상태를 말하고 독도를 차지하려면 전쟁 외의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전쟁이 일본에 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는 저자의 전쟁에 대한 현실주의를 보여준다. 결국 저자는 현안에 대한 옳고 그름보다는 어떻게 일본에 이득이 될지를 따지고 있을 뿐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독도가 그저 당분간 비용이 크게 들 문제이니 건들지 말자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저자의 일본 중심의 집단 이기주의를 느꼈다. 

한편 센카쿠 열도에 대한 의견도 비슷하다. 저자는 ‘분쟁은 이득이 없다. 문제를 덮어두면 될 것인데 긁어 부스럼을 만드냐’라고 한다. 이는 저자가 일본 정부가 센카쿠 열도를 국유화하고, 중일 갈등이 첨예해졌다는 데 불만인 것이다. 즉 이득이 없으니까 덮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는 궁금해진다. 가령 만약 일본이 독도를 집어삼키는 것이 이해득실을 따질 때 일본에 이득이라면? 그러면 필자는 어떻게 대답할까? 

결국 저자는 철저한 이해득실을 따지는 현실주의와 자국 중심주의, 일본인 중심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3. 도덕은 슬쩍 외면하고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위에서 지적한 자신의 사상을 위해 도덕 잣대를 멋대로 이용하고 있다. 예컨대 ‘만능세포 연구논문 조작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학자 ‘오보카타 하루코’ 연구팀이 약산성 액체에 몇 번 담그는 것으로 세포를 만능 줄기세포로 만들 수 있다는 연구 발표에서 시작된다. 이 방식은 다른 방식과는 다르게 줄기세포 연구의 골칫덩어리였던 암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세계 각국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러나 몇 달 뒤 논문은 사기로 밝혀졌다. 일본 내부는 물론이거니와 세계 여러 나라의 논문 검증팀도 오보카타 하루코의 연구 결과를 재현할 수 없었다. 당연히 연구를 총괄한 오보카타 하루코와 그녀가 소속된 기관, 기관장, 그리고 논문에 자신의 이름을 실은 학자들은 연구 논문을 조작한 죄로 큰 책임을 졌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이런 일에 가담했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끼고 자살하기까지 했다. 자살했다는 그 학자는 일본에서 관련 분야로 촉망받는 학자였다.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어떤 벌을 주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규칙을 어긴 개인이 받아야 할 문제다. 그럼에도 책임을 광범위하게 확대시키면 오히려 책임 소재가 애매해지게 된다. 흔히들 유럽은 개인주의가 만연하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책임의 소재를 개인에게 한정하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즉, 책임질 사람을 분명히 해두는 것이다.’ - 책 53% 중

 

필자는 저자의 이 말만은 동감한다. 합당한 비판과 책임을 요구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당시 일본 사회의 비난은 도를 넘었다. 자살한 학자도 비난을 견디기 어려웠다는 것이 자살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그러나 설령 비난이 과도하다고 하여 동정심을 느낄 사안은 아니다. 논문 조작에 관련한 사람들은 합당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은 필자와 조금 다르다.

‘이들은 하나같이 생명공학 분야의 권위자들로, 가짜 논문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한 통속이라 매도되어 학계에서 퇴출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인재들이다. 물론 속은 사람들에게도 잘못은 있어 책임을 피할 길은 없겠지만 오보카타와 동일 선상에 올려놓고 비난을 퍼붓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 책 52% 중

 

위의 인용문은 다시 말하면 주동자 한 명 책임지게 하고 나머지는 사실상 봐주자는 것이다. 저자는 주동자인 오보카타를 제외한 나머지 학자들을 ‘속은’ 사람으로 표현하며 동정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들이 그냥 속아 넘어간 불쌍한 사람일까. 

이들이 소속된 연구소는 일본을 넘어 세계 굴지의 연구소 중 하나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이 종종 배출된다. 그런 연구소 구성원이 자기 이름을 집어넣는 논문이 조작되었는지 확인하지 않는다? 그걸 믿을 수 있을까? 애초에 이 논문 조작 사건이 몇 달 만에 밝혀진 것은 연구에 석연치 않은 게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약산성 약품에 세포를 몇 번 담그면, 짜잔! 인간 생체 기관 어디든 배양할 수 있는 만능 줄기세포 완성!’이라는 것을 학자들은 도통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사기당하는데 학력이나 능력이 무슨 상관이랴. 그렇지만 속은 학자들도 책임은 있다. 고작 몇 달 만에 들켜버릴 조작 논문을 검증하지 않은 채, 다 된 밥에 숟가락 올리듯 제 이름을 논문에 올려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구 윤리를 가진 학자를 봐주자는 건 문제 발언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리하자면 저자는 극단적인 이익 중심, 현실 중심 사고를 갖고 있으며 그런 이익과 현실의 중심은 국가에 맞춰져 있다. 이러한 윤리적 문제를 저자가 봐주자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4. 저자는 과연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있는가

‘차별을 없애자는 문제를 간단히 생각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심리적인 차별은 해도 좋지만, 되도록 제도적인 차별은 하지 말자고 하면 된다. 단지 그뿐이다. 내가 쓴 차별에 대한 글들은 제도적인 차별이 아니다. 따라서 마음속으로 차별하는 것은 나의 자유인 것이다.’ -책 26% 중

 

저자의 문제는 하나 더 있다. 애초에 민주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위의 인용문은 필자 입장에서는 ‘속으로 차별하고 멸시해도 상관없다, 겉 부분만 좋게 포장하면 된다’는 뜻으로 들린다. 필자는 이 순간 일본 문화 중 하나인 ‘다테마에’ 다. 이는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도록 의례적인 언행을 실천하는 자세다. 당연히 겉과 속은 다르다.

‘다테마에’ 문화를 생각하면 저자의 발언이 이해된다. 결국 저자는 겉모습에 신경을 써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는 것을 문제의 해법이라 여긴다. 이는 자유주의는커녕 민주주의도 아니다.

 결론. 그냥 잡설

지금까지 책 ‘다수결은 위험하다’에 대한 필자의 잡설을 써보았다. 독자 중 정반대의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마지막 잡설을 해보자. 우선 책을 정리하면 이렇다. 책은 ‘다수결은 위험하다’라는 제목이다. 하지만 다수결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지 않는다. 저자 ‘이케다 기요히코’가 글을 쓴 목적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자민당 정권과 그들의 정책에 불만이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도 일본 국민은 움직이지 않는다. 중차대한 문제에 왜 침묵하는지 불만스럽다. 저자는 동조 압력 때문에 국민들이 정부에 순응한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저자가 생각한 것이 ‘다수결은 위험하다.’라는 구호다. 세상은 소수의 현명한 사람에 의해 변한다고 하는 그. 그렇기에 그는 현명한 소수를 다수가 짓밟는 일본 사회에 개탄한다. 그가 내놓은 대안은 자민당이라는 현재의 썩은 보수를 치우고 새로운 보수정당을 세우는 것이다. 

한편 저자는 일본의 온건 우익이다. 이해득실을 따져 정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저자는 자유주의를 옹호한다. 필자가 보기에 그 자유는 현 일본 정부에 순응하는 사람에 대한 분풀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저자의 말처럼 정말 자유가 없어서 정권에 반대하지 않을까? 동조 압력이 너무 세서 어쩔 수 없는가? 필자가 보기에 일본 국민은 자국의 현 정권에 정말로 만족한 것이다. 동조 압력이니 자유 부족이니 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필자가 생각할 때 저자가 생각하는 현명한 소수, 철인(현인) 따위는 없다. 한편 대중이 우매하다는 것도 거짓이다. 대중은 생각 이상으로 똑똑하고 힘이 세다. 저자는 이걸 부정하고 어디에도 없는 현명한 소수를 찾아다니는 모양이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소수가 민주주의를 세운 적은 없었다. 옆 나라 한국을 보고도 모르나.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가? 결국 다수가 함께 연대하는 것이 저자가 원한다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을 저자에게 알려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를 위한 세계관 구축법 : 생성 편 - 마법, 제국, 운명 작가를 위한 세계관 구축법
티머시 힉슨 지음, 정아영 옮김 / 다른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판타지 설정, 이제 어렵지 않아요>

쏟아지는 이야기

한국 장르 문학의 역사에서 지금과 같은 황금기가 있을까. 웹툰, 웹소설의 등장으로 장르 문학의 규모는 날로 커지고 있다. 일례로 웹소설은 일반 도서 시장을 뛰어넘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현대 장르 문학은 과거와 다른 특징이 있다. 공급자의 기하급수적인 증가이다. 과거 장르 문학은 창작자의 진입장벽이 높았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예컨대 웹소설은 진입 장벽이 상당히 낮아졌다.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과 손가락, 그리고 머리만 있다면 누구나 창작하고 인터넷에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밤낮없이 모니터 앞에서 앉아있다. 영감이 떠오르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다 소위 말하는 ‘필’이 딱 오면 물 흐르듯 손이 움직인다. 근데 완성이 된 후 속으로 하는 말. ‘아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했다면 추천한다. 바로 책 ‘작가를 위한 세계관 구축법’이 그것이다. 작가는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신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세계를 베끼는 것은 신으로서 부끄럽지 않은가.

책 소개

책 ‘작가를 위한 세계관 구축법’은 책은 저자 ‘티머시 힉슨’의 유튜브 채널 내용을 정리 보완한 것이다.(링크) 저자는 유튜버로써 글과 관련된 강의를 진행한다. 그중 유명한 콘텐츠가 창조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뻔한 설정 만들기는 그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책을 썼으니, 내용도 다른 평범한 작법서와는 다르다. 처음 두 장은 그래도 일반 작법서의 내용을 따르는 듯하다. 도발적인 도입부라든지, 매력적인 등장인물을 만드는 법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 책의 진가는 그 이후의 내용에 있다.

다음 내용을 나열하면 이렇다. 마법 체계를 만드는 방법, 종교와 문화를 만드는 법, 판타지 세계의 제국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법. 이런 내용들은 여타 작법서에서는 볼 수 없는 참신한 내용이다. 이 책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작가는 이제 맨땅에 헤딩하듯 머리를 쥐어짤 필요가 없다. 이 책을 보고 이해한 작가라면 적어도 클리셰를 많이 쓴다고 독자에게 욕먹을 일은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표절 논란이라는 불미스러운 상황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나만의 설정을 만드는 법을 책을 통해 터득할 테니 말이다.

우려먹기 멈춰!



우려먹는다는 건 원래 뼈를 푹 고아 음식을 만들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우려먹는다는 말은 음식 조리를 넘어서 사용되는 분야가 확장되었다. 콘텐츠도 그중 하나다. 일례로 게임이 있다. 게임의 세계관을 보면 선과 악이라는 양쪽의 싸움, 그로 인해 발생한 문명의 붕괴와 재건, 그리고 게임 시점에서 발생하는 악과 관련된 문제들로 정리할 수 있다. 정말 진부하다. 굵직한 스토리가 대동소이하다. 이런 배경 스토리를 보다 보면 똑같은 작가가 썼나 착각하게 된다.

다른 콘텐츠 장르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웹소설의 경우 하나가 성공하면 우후죽순 비슷비슷한 아류작이 나온다. 웹툰도 같다. 문제는 콘텐츠의 다양성 상실이다. 가장 창의적인 사람이라는 작가들이 공장에서 찍어내듯 작품을 복제하는 행태는 분노를 넘어 허탈함을 느낀다.(틀에 찍어 만드는 붕어빵도 이것보다는 정성이 들어가지 않을까)

잊지 말자. 우려먹는 것도 한두 번이다. 같은 뼈를 계속 우린다고 해서 맛 좋고 건강 좋은 음식이 나올 수는 없다. 언젠가 뼈 속의 것이 몽땅 우려졌을 때, 남는 건 점점 맛이 없어져 거의 맹물 수준인 물밖에 없으리라. 우리 장르 문학계는 현재 우려먹기로 인해 망가지고 있다. 이제 우리도 바뀌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 ‘작가를 위한 세계관 구축법’의 출판을 필자는 환영한다. 작가의 창의성 발휘를 돕는 지침서가 나왔기 때문이다. 작가라면, 특히 장르 문학을 하는(혹은 하고 싶어 하는) 꼭꼭 읽어보자.

마지막으로 이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우려먹기 멈춰!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쓴 서평으로 개인적인 주관적 견해가 들어갔음을 알려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