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여인들 - 實錄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
손경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조선시대 테마사 중 여성 인물 이야기류에 해당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성종 연간(조선전기)의 기록에 등장하는 33명의 하층민 여성들이 연루된 사건과 그들의 삶을 재구성했다. 한 인물에 한 장을 할애해 총 33장으로 이뤄져 있으며 장의 중간 중간 당시의 시대상을 예리하게 짚어내는 <깊이읽기> 8꼭지를 삽입했다. 조선시대 여성사와 관련된 책들은 대개 왕비와 후궁을 다루는 ‘왕실 엿보기’와 일탈적 삶의 표상으로 분류되는 ‘기생 이야기’로 양분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런 두 흐름 뒤에 신사임당이나 허난설헌 같은 현모양처 이야기들이 뒤따른다. 이런 책들의 공통점은 사회의 상층부에 위치한, 관련 기록이 풍부한 여성들을 다뤘다는 점이다.


반면 사회의 밑바닥에서 힘들게 살아간 여성들에 대한 책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계집종, 천첩, 무녀, 비구니 등으로 나뉘는 하층민 여성들의 일반적인 삶의 형태를 우리가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 개개인이 사회와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내밀한 개인사에 대한 지식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즉, 오늘날의 한국인들은 모두 한 번씩 왕의 입장에서, 양반의 입장에서, 그도 아니면 남성의 입장에서 역사를 생각해봤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여성들에게조차 핍박받아야 했던 천한 여성의 자리에서 역사를 생각하고 조선시대를 느껴본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에는 기존 책들에 소개된 인물들도 간혹 있지만(4~5명) 대부분은 이 책을 통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지는 이들(20~21명)이다. 또한 조선시대 생활사나 야사류에서 지나치듯 언급된 여인들(7~8명)이 이 책에서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또한 잘 알려진 어을우동을 다루기보다는 그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동시대 기생 연경비를 다뤘고(9장), 세조 때 양성인간으로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은 사방지 대신 사방지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 여승 중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7장).

하층민 여성들이 실록에 등장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왕과 함께 의논해야 할 심각한 사건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판관 3명에게 동시에 강간당한 무심無心(1장), 백주대낮 칼에 목 찔려 죽은 백이栢伊(2장), 꿈에 남자를 봤다는 이유로 살해당한 고읍지古邑之(3장), 아들에게 간통 현장이 발각된 강덕姜德(24장), 아들에게 청부살인을 시킨 흔비欣非(15장), 배다른 남매를 결혼시키려 한 소근小斤(5장) 등 큼지막한 사건들 속에서 그녀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하지만 실록은 그녀들의 신상 정보에 대해 기본적인 것을 알려줄 뿐 깊이 들어가는 세세한 이야기를 다 들려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하층민 여성들의 역사가 제대로 다뤄지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이러한 점을 감안하여 관련 시대자료를 찾아보고 사건의 전후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하여 하층민 여성들의 삶과 내면세계를 유추하고 복원했다.


조선전기는 고려시대의 유산을 정리하고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세워나가던 시기였다. 고려의 종교인 불교는 유교로 대체되었고, 느슨한 신분관계는 엄격한 상하관계로 다시 조여졌다. 남편이 처가살이하던 관행은 며느리가 시댁살이하는 전통으로 역전되었다. 조선은 고려의 모든 유산에 불량품의 딱지를 붙이며 사회 정화의 기세를 올렸다. 그래야 왕조를 뒤엎은 역성혁명의 논리가 설 수 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성리학적 논리의 사회적 관철 과정이다. 성리학이라는 것이 달리 말하면 일종의 금욕주의인데 이걸 너무 내세우다 보니 인간의 욕망 같은 것은 음지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뚜렷이 구분되었고, 공영역에서는 엄격한 윤리가 요구되었지만 사영역에서는 노비를 마음대로 두들겨 패거나, 종을 간음하고 재산을 빼앗아도 모르는 척 눈감아주는 일이 많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주로 조선 양반들과 하층민 여성들이 사적 영역에서 교환했던 관계, 때로는 참혹하기까지 한 일방적인 관계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엔 또한 조선시대 첩과 연루된 사건 사고도 소개된다. 조선시대에 첩은 필수불가결의 존재였다. 항간에는 본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할 때 첩을 들였다는 인식이 통용되고 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첩이 아들을 낳아도 친형제의 아들을 입양해 장자로 삼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첩은 양반들의 사랑과 성욕을 채워주는 존재라는 게 솔직한 판단이다. 집안끼리의 약속으로 혼인이 이뤄졌기 때문에 정을 못 붙인 부부가 많았고, 지방관 부임 시 옆이 허전하다는 등의 이유도 많았다. <배다른 남매를 결혼시키려 한 소근>은 종 출신으로 양반의 선택을 받은 천첩이다. 그래서 신분콤플렉스가 있었다. 남편이 죽자 그녀는 자신의 전남편 사이에서 얻은 아들과 남편의 딸을 결혼시키려 했다. 사실, 자신의 아들이 딸을 임신시키자 이를 결혼으로 무마하려 했다는 게 정확한 말이다. 이것이 들통 나 세 사람은 모두 사형에 처해진다.


법보다는 인정과 힘의 논리가 지배한 조선. 조선시대 하층민 여성 33인이 보여주는 삶의 풍경은 자못 을씨년스럽다. 실록에 대대적으로 기록된 사건들이라고 해서 비일상적이고 예외적인 모습이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저자는 실록의 사료가 남성-지배자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사료를 여성-피지배자의 입장에서 읽기 위해 노력했다. 한 사건을 놓고 조선시대 왕은 법을 존중했지만, 왕족(종실)의 사건이나 공신들이 저지른 죄상에 대해서는 법보다는 인정의 논리, 힘의 논리를 따랐다. 저자는 왕의 결정에 어떤 배후가 도사리고 있는지, 그 정치적인 인과관계를 면밀히 따져봄으로써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지 못한 하층민 여성들의 삶을 객관화시키고자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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