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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버나딘 에바리스토 지음, 하윤숙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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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이야기, 딸의 이야기, 그들의 친구의 이야기로 한 부가 구성되어 있다. 서로 헐겁게 혹은 단단히 연결되었던 이들은 엠마의 연극 <다호메이의 마지막 여전사>를 통해 만난다.

이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마침표가 없다는 것이다.
문단 속 문장들을 구분 짓는 마침표는 모두 쉼표로 대체된다, 마지막 문장은 마침표 없이 열려있다
명사로 종결되는 문장 또한 많다. 산문시같은 형식이다.
처음엔 어색하다가도 어느새 물흐르듯 따라 읽게 된다.

총 열두명의 여성인물이 각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별개의 이야기처럼 보였던 인물들의 역사가 톱니바퀴처럼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인물들을 비참한 처지로 몰아넣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간 숱하게 봐 온 창녀가 된 여성, 비극에 수동적으로 휩쓸리는 여성, 죽음마저 포르노의 시점으로 비춰지는 여성의 모습에 신물이 났다.
<소녀, 여자, 다른 사람들> 속 여성들은 흑인/여성/빈곤층이 마주하는 폭력을 미화하거나 외면하지 않되 그들이 고통을 이겨내는 장면을 비춰준다.

물론 히어로 만화처럼 모든 고통을 말끔히 씻어낼 수는 없다.
기억 속 고함소리에 퍼뜩 잠을 깨고 잊고 싶은 기억이 되살아나고 테러리스트로 의심 받았던 때의 모멸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친구와 만나고 가족을 돌본다. 다른 사람들을 삶 속에 받아들이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삶을 꾸려나간다. 과거의 기억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을 유지한다.


인물들은 입체적이다. 모든 사람에게 착하거나 모든 사람에게 악한 인물은 없다. 인물들의 가치관도 마찬가지다. 서로를 부정하는 듯 긍정하고 대척점에 선 듯하지만 결국 연결된다.

'흑인'이 아닌 '나 자신'으로 인정받고자하는 인물이 있는가 하면 (캐럴, 롤런드)
흑인이라는 정체성을 과시함로써 '나 자신'을 내어놓으려는 인물이 존재한다.(엠마, 버미)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로 살아오며 급진적이고 반사회적이라고 평가받아왔던 인물들이
트랜스젠더 페미니스트에게는 소위 꼰대라고 불린다.

2부를 막 끝냈을 때는 흑인 퀴어 여성이 겪는 폭력을 고발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완독한 뒤엔 글의 내용을 단순히 고발록으로 정의내릴 수 없게 되었다.
‘흑인 여성을 단지 인종차별의 대상으로, 피억압자로 대상화해왔던 우리 인식 역시 그들의 삶을 왜곡하는 또 다른 편견이었을지 모른다(p.634)’는 옮긴이의 말에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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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의 진화
홍성욱 지음, 박한나 그림 / 김영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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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처음 받고 놀란 점은 책등이 없다는 것. 내 견문이 좁은 걸 수도 있지만.. 대형 출판사에서 노출 실제본을 택한건 처음 본다. 덕분에 책을 180도 펼칠 수 있다. 일반 책과 비교해 책읽기가 훨씬 편하고 필기하기도 수월하다.

 이 제본 방식은 어느 일러스트 책을 통해 처음 접했다. 처음에는 책등이 없고 실이 훤히 드러나 있어 파본인줄 알았다. 지금도 내 방 책장을 구경 온 사람들 열이면 열 모두 책등이 떨어졌다며 놀라곤 한다. 일상에서는 쉽게 만나지 못하는 가히 실험적인구성이다. 책 주제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굳이 실제본일 필요가 있나 싶다. 앞서 언급한 일러스트 책의 경우 그림의 중간 부분이 접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출 실제본을 택했다. 그러나 <실험실의 진화>는 글로 된 책이다. 삽화도 대부분 한 면에만 실려 있다. 일반적인 제본 방식으로 만들었어도 충분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나 저러나 눈길을 끄는 제본법이라는 건 확실하다. 책등이 없기에 제목을 보여주기 위해 넓은 띠지를 둘렀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또 눈길을 끌었던 점. 21세기의 책에는 큐알코드가 들어간다. 그림을 핸드폰에 띄워두고 글을 읽고 있으려니 감회가 새롭다. 독자에게 신선한 경험을 제공해주려는 저자와 편집자의 노력이 느껴진다. 다만 책 초반부 외에는 큐알코드가 거의 등장하지 않아 아쉽다.


  책 모양새에 대한 감상은 이쯤하고, 책 내용에 대해 리뷰해보자면

 현대 사회는 바야흐로 과학의 시대다. 예능, 영화, 책 등등 대중매체에는 과학이 넘쳐난다. 특히 서점에서는 다양한 분야 다양한 주제의 과학책이 넘쳐난다. 아직 책으로 출간되지 않은 분야가 있기나 할까 궁금해질 정도다.

 그런데 막상 책장을 들여다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과학 원리와 응용에 대한 책은 많지만 정작 그 과학 원리가 발견된 곳인 실험실에 대한 책은 거의 없다는 것.

 <실험실의 진화>는 바로 그 실험실을 비추기 위해 쓰인 책이다.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토론장에 참여하듯이,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 서재를 방문하듯이,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의 요람인 실험실을 비추어야 한다.

 과학자의 실험실은 근대 과학의 산실에 다름없다. 철학의 영역에 속해있던 과학이 별개의 학문으로 독립하게 된 과정에는 실험실의 공로가 크다. 과학자들은 실험실을 통해 자연을 적절히 통제하고 일정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 합리와 설득이라는 철학의 영역에서 증거와 인증이라는 과학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실험실이 과학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시대에 따라 실험실의 성격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본다. 연금술부터 현대 대학교까지 수세기동안의 실험실 발전 역사를 다루기에 역사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 시민 과학의 비중이다. 띠지에는 '연금술에서 시민과학까지' 모두 살펴본다고 적혀 있는데, 막상 책을 열어보니 시민 과학과 관련된 이야기는 마지막 한 문단. 끝. 너무 소략하다.

 시민 과학자들의 실험실은 곧 그들의 집이기에 쉽게 소개하기 어려웠겠다 싶다가도.. 띠지의 홍보문구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기대가 깨져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15장은 충분히 재밌었다.


 이래저래 덧붙인 말이 많다. 그만큼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결론적으로는

1. 실험에 관심이 있다면

2. 연금술과 과학이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다면

3. 무엇보다 실험실이라는 단어를 통해 흰 가운, 보안경, 정적이고 모범적인 분위기를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길 추천한다.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실험실을 직접 보거나 방문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그렇지만 우리의 일상은 실험실에서 만든 존재들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2020년, 현대 문명을 마비시킨 코로나바이러스와 부족하게나마 싸울 수 있는 것도 PCR 검사와 항체 검사를 가능케한 진단키트, 마스크 필터, GPS 같은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공물 덕분이다. (중략) 그런데도 우리는 실험실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배우는 과학 지식은 대개 이론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런 틈새를 메꾸기 위해 기획되었다. - P6

실험은 자연을 실험실로 가지고 들어오는 행위에서 시작된다. (중략) 자연에서는 한 번 하기도 힘든 연구를 실험실에서는 백 번을 반복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실험은 근대과학의 강력한 방법론이 되었다. - P55

필드와 실험실의 관계는 다중적이다. 우선 필드 자체가 일종의 실험실이 될 수 있다. 이런 사례들은 과학사에서 종종 발견된다. 18세기 말엽에 나폴리의 화학자들은 나폴리 왕립과학아카데미 내의 화학 실험실이 폐쇄되자 근교에 있던 베수비오 화산을 일종의 실험실처럼 사용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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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
김비 지음, 박조건형 그림 / 김영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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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씨>, 김비


 잔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어딘지 '지금거리는' 이야기.

 우울증을 극복하거나 모녀가 흉금을 터놓거나 잔잔한 음악이 깔리며 오열하는 영화 같은 풍경은 없지만 그렇기에 더 현실적이고 더 공감하게 되는 이야기.

 '복희씨랑 헤어질 때 절대 울지 말아야지.'


 표지의 글이 제목보다도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엄마, 집하면 언제부턴가 마음이 싸리하게 아려온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노래를 부를 때도, 글을 쓸 때도, 이야기를 나눌 때도 늘 고향을 그리워하는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집이 뭐가 그리 애틋할까. 그냥 벗어나고만 싶은데. 나는 대학만 가면 바로 자취할 거야를 3년동안 입버릇처럼 외우고 다니던 나였지만 막상 그랬던 나도 자취 시작 일주일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차표를 끊었다.

 밉다가도 그립다가도 서먹하다가도 다시 부둥켜안게 되는 가족<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씨>도 그런 가족의 이야기를 담았다.

 작가 김비는 십여년만에 남편과 함께 제주도를 찾는다. 목적은 두 달 제주 살이격한 파도와 차가운 방바닥, 새카만 해안도로로 시작된 여행은 순탄치만은 않다일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고 예상치 못한 횡액이 닥친다일행과 부딪혀 피로해지고 때로는 우울해진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맞닿은 손가락 하나로 서로를 용서하게 된다새카맣다 못해 두려웠던 해안도로는 다음날이면 시리도록 투명한 바다가 되고 우연히 발견한 놀랍도록 아름다운 풍경은 누군가의 오랜 노력이 닿은 결과였다.


 왜 돌아왔을까 후회하다가도 돌아오기를 잘 했다고 마음먹게 되는 건 제주도 가족도 마찬가지다.


 책을 읽으며 작가의 여행에 동참하는 기분이었다코로나로 오랫동안 여행을 떠나지 못해 답답했는데, 이번 책을 통해 나도 복희씨의 집에 들러본 것만 같다책을 덮은 이후로도 마음 한 구석이 계속 지금거린다.

 작가는 아직 우리 여행의 이름은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서평을 쓰는 내내 이 여행을 어떻게 소개할까 고민해봤지만 역시 나도 아직 이 여행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혹시 아직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부디 직접 읽어보고 이 복잡하고 벅찬 여행을 함께 경험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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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도대체 왜 그 모양인지 이해할 수 없어도 우리가 같은 여행을 하는 나란한 여행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최소한의 몸짓이 필요할 때.
나는 다시 또 손가락을 내민다. 그의 손가락이 와닿는다.
말은 필요 없다. 우리는 여행하는 외계인들. - P101

그러나 아직 우리 여행의 이름은 찾지 못했다. 너무도 많은 일이 일어났고 너무 많이 울었고 너무 많이 설레었던 그 여행의 이름을 앞으로도 찾지 못할 것 같다. 물론 조금도 상관없다. -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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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
이랑 지음 / 창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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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을 전공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성 디자이너의 맞춤 디자인을 단돈 몇 만원에 판매하는 사이트가 있다는 것, 심지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연예술계의 열정페이가 심각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코앞으로 바짝 다가온 기분. 그런데 알고 보니 요새는 디자인도, 번역도, 그림도, 글도 모두 너무나 적은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공짜로,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그냥 한번 해보는일이 되어버린 거다. 특히 엄연한 임에도 놀이로 취급되는 문화 예술의 피해가 컸다.

 

제목의 돈은 필요합니다는 열정페이가 당연시되는 예술계 종사자의 항변이다. ‘열정페이라는 말이 우리나라를 한바탕 흔들었을 때 우리는 열정의 값을 0원으로 매기는 사람들을 소리 모아 욕했지만 사실 크게 변한 건 없다. 142만원, 296만원의 잔고, 인터뷰 페이 20만원을 꺼려하는 잡지사는 아티스트라는 허울 속에 교묘하게 숨어 있다.


본인을 자영업자제조업자라고 소개하고 다닌다는 내용을 보고 실실 웃었는데, 뒷부분을 읽으면서 마음 한 편이 점점 쌉싸름해졌다. 사람들은 왜 이리 배고픈 예술가를 좋아할까. 나는 한 끼만 굶어도 금세 기운이 빠지고 온 세상을 저주하곤 하는데, 그런 상태에 처한다고 해서 학점을 빛낼 아이디어나 천만 교수님을 울릴 명작이 떠오르진 않는다. 오히려 과제가 술술 풀릴 때는 맛있는 밥을 먹고, 친구와 이야기 나누며 적당히 스트레스를 날려 보낸 뒤 노트북 앞에 앉았을 때다. 대학생의 과제와 예술가의 작품은 사뭇 다르지만 술술 잘 풀리는조건만큼은 다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 , 사랑하는 사람들.

 

작가가 책 속에서 내내 언급한 사랑하는 사람들(과 고양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필요하다. “잡지에 잘 나온 사진들만 남기고 굶어 죽을 수는 없는 일이라는 작가의 말이 계속 맴돈다. 예술 좋고 열정 좋지. 그래도 굶어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다른 사람의 좋아서 하는 일공짜로 해줄 수 있는 일로 여겨지지 않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예술가에게도 밥, 집,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떨 때는 창작 활동보다 증명 활동을 더 많이 해야 하는 것 같다. 유,무형의 창작물을 만들고 파는 것이 내 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 P54

서로가 평범하다고 우기던 수강생들은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머리 길이가 달랐다.옷 입는 방식도, 들고 있는 가방도 달랐고 한 명 한 명 다 다른 노트와 펜을 가져왔다. 왜 그 노트를 가져왔는지 물으면 각자 대답이 달랐다.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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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남형도 지음 / 김영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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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기사판을 돌아다니다가 ‘체헐리즘’ 기사를 처음 읽었다. ‘남기자의 체헐리즘’? 독특한 제목에 카테고리를 클릭하자 눈앞에 진짜 기사가 펼쳐졌다.
최초 보도 기사를 제목만 갈아 끼워서 새 기사인양 내는 시대에서, 직접 보고 겪고 느낀 것을 적겠다는 콘셉트는 기본에 충실하기에 놀랍다. <제가 한번 해보았습니다.>는 바로 이 체헐리즘 기사를 책으로 엮어낸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 놓쳤던 기사를 새로 읽기도 하고, 좋았던 기사를 곱씹어보기도 했다. 각 기사 말미 작가의 코멘트를 통해 기자의 마음을 짐작해보기도 했다.
브래지어 입고 생활하기,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하기, 50번 거절당하기 등등 새롭고 독창적인 기사가 많다. 그 중 ‘80세 노인의 하루를 살아봤다’는 기사가 가장 와 닿았다. 우리나라는 아직 노인 친화적인 시설 하나 갖춰지지 못한 형편이다. 20년, 30년 뒤 노인이 되었을 때 과연 나는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늘 기자의 의견에 공감가지는 않았다. ‘62년생 김영수’는 뭐랄까, 기자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소외된 것을 다루고 싶다고 했으니 여성의 소외된 삶을 소외받는 가장의 이야기로 바꿔보고 싶었겠지. 그러나 기사를 읽으면서 ‘62년생 김영자’의 삶이 떠올랐다. 4남매 중 막내아들인 영수씨 위의 세 명의 누나, 집안일에 방해받기 싫어 전화기마저 만들지 않은 영수씨 대신 아이들을 키우고 집안일을 도맡았을 아내 등등. 김영수씨가 설거지는 본인이 한다고 소심하게 항변한 뒤, 세탁하고 청소하는 아내를 뒤에 두고 떡갈비 홈쇼핑 방송에 넋을 놓는 장면이 절정이다. 기자는 연민의 시선으로 다뤘지만 독자인 내게는 영 떨떠름할 뿐이었다.
물론 기자는 남녀 갈등을 조장하고 싶지 않다고 썼다. 그저 소외된 한 가장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을 뿐이라고. 그렇다. 우리네 외로운 아버지 이야기다. 그러나 ‘62년생 김영수’라는 제목은 결국 그 뒤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주목하게 만든다.

위처럼 시선의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헐리즘 기사는 의미 깊다. 남형도 기자는 체헐리즘 기사를 계속 작성하고 있다. 지난 6월 20일 게시된 <'치마', 남자가 입어봤다> 기사도, <9살 봄이의 '온라인 개학'...선생님이 돼봤다>라는 기사도 모두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시원한 기사다. 우리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일들, 생각해본 적 없었지만 사실 정말 중요한 문제들을 가져와 보여준다.
서평을 작성하는 내내 ‘홀로 견디는 당신을 위해’라는 부제에 공감했다. 홀로 ‘불편함’을 견디는 당신, 홀로 ‘고통’을 견디는 당신, 홀로 ‘외로움’을 견디는 당신. 소외받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사가 앞으로도 더 많이, 자주 나오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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