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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L 제대로 배우기
랜달 슈왈츠 외 지음 / 김영식 외 옮김 / 한빛미디어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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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부분 펄이라고 하면 초기 웹이 태동할 때 C와 함께 cgi를 만들어 주는 언어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펄은 C언어와 더불어 현재까지 강력한 cgi 언어로 쓰이고 있으며 웹프로그래밍의 경우 자바나 php등에 비해 거의 쓰이지 않지만 패턴 처리, 문자열 처리 등 C언어조차 어렵게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을 여유롭게 해치울 수 있다. 최근에는 바이오 인포메틱스에 이용되어 분야에 까지 널리 쓰임을 알 수 있다. C언어를 요즘 다시 공부하면서 펄이라면 이렇게 할 텐데 하는 생각이 종종 드는건 아마 펄 매니아로써의 병이 아닐까 ...

지금까지 펄을 다루는 대부분의 도서들은 주로 게시판 만들기 식의 cgi에만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책은 펄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구성도 단순한 따라하기 식의 구성이 아니라 내용을 이해하고 연습문제를 푸는 식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책 한 권만으로도 펄 해커로 가는 길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두껍지 않은 부피와 깔끔한 편집이 초보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아 더욱 마음에 든다. 아마 유닉스를 배우거나 배우려는 이는 펄을 꼭 알아두셔야 할 것이다. 이 책이 그 때 훌륭한 가이드를 해 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책장에 곶아 놓고 두고두고 볼 수 있는 몇 권 안 되는 정말 아끼는 책이다. 프로그래밍에 두려움을 느끼는 자 이 책을 한 번 보라고 권하고 싶다. 어렵다는 C언어도 우스워(?) 보일테니....->펄은 알고 보면 C언어보다 난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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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정체성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01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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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작년에 유승준의 미국 시민권 취득 경위가 군입대 기피성이라는 의혹이 불거진 후 그에 대한 비난이 그의 개인적인 비도덕성에 국한되지 않고 민족 개념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이에 민족에 대한 구체적 개념에 대해 드러커의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화”를 읽고 정립을 요하던 중 몇 권의 추천서를 보았지만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몇 권의 책 중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저자는 한국의 정체성을 한국인의 정체성과 구별해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국의 정체성은 현재성, 대중성 그리고 주체성으로 알 수가 있다. 이는 결론적인 이야기이고 형이상학적 차원에 이를 논의하고 있다. 저자는 문화란 고유성과 창의성의 합에 의해져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중학교를 다닐 때 배웠던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명제에 대한 고찰을 시도한다. 세계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말하는 세계화란 것은 Globalization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 지구화라는 의미보다는 세계 권력의 중심으로 향하겠다는 의지가 내면적으로 숨어 있다. 그렇다면 세계의 중심은 어디인가 하는 고찰이 필요하다. 현재 세계는 미국은 패권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세계의 중심임을 차처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 이후 미국의 문화 식민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역시 그 중심을 향하려는 피식민의 의식을 놓지 않고 있다. 따라서 미국을 세계화로 상정하고 미국적인 것을 마치 세계적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우리는 한국적인 것을 세계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보다는 세계적인 것에 한국적인 것을 담아내야 한다. 그 예로 작가는 홍콩 영화를 예로 들었다. 홍콩의 느와르 영화나 무협 영화는 전세계적인이 좋아할 만한 보편-실제로 저자는 보편이란 개념에 대해 철학적 고찰을 시도한다-적인 기호인 액션(폭력), 섹스, 사랑 등에서 그들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실제로 중국은 수 많은 무협지의 배경이다-액션 무협을 선택했다. 한국의 정체성을 무엇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나의 대답은 저자가 언급한 시원에 대한 성찰일 것이다. 유도만 하더라고 우리는 그 기원이 우리의 삼국 시대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지금 가장 왕성한 곳은 일본이다. 그 시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도 현재에 계승되어 가는 것-현재성을 획득한 것을-을 정체성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유도가 우리 것이라고 주장해 봐야 이는 세계적인 인정을 받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주체성-이는 저자가 다음 책을 통하여 논의 했다-을 갖기도 힘들 것이다. 또한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정말로 우리의 것이라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회의를 해야 한다. 저자는 일례로 삼국 문화의 전파를 들었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문화를 전파해 주었기 때문에 일본은 우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여기면서도 우리는 문화를 전파해준 중국에 대해서는 이중적인 잣대를 적용하고 있다. 또한 일제의 침략 행위에 대하여는 매우 비난을 하면서 즉시 청산해야 할 것이라 여기면서도 우리 문화 곳곳에 녹아 들어서 아직도 우리의 생활 곳곳에 베어있다. 도리어 문화 식민으로 여겨지는 미국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역시 이중적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 한국의 정체성을 단지 그 시원에서 찾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 현재성, 대중성, 그리고 주체성에서 찾아야한다. 주체성은 그 집단의 성향-통계적인 의미로-으로 파악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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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 문예출판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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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년 여름 한국에 출판된 제목으로는 “지도를 못 읽는 여자 말을 듣지 않는 남자”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 후 남녀의 심리에 관하여 늘 생각해 오던 중 너무나도 유명한 저서인 “ 금성에서 온 여자 화성에서 온 남자”를 읽게 되었다. 후에 알베르니의 “우정론”을 일독하였는데 모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종류의 도서임을 염두에 두고 하고 평소 수능 문제 지문으로 밖에 접하지 못했던 에리히 프롬의 저서인 “사랑의 기술”을 구입하게 되었다. 초반부 사랑의 일반적인 정의와 사회적인 현상을 연계하여 정의와 그 메커니즘을 규정하는 부분은 누구나 쉽게 이해가 갈 만한 부분이다.

저자는 사랑의 4가지 중요한 필요충분조건으로 어머니의 모성애와 같은 책임을, 아버지의 보호를, 서로에 대한 존경을-내 생각엔 이는 형제애와 아버지의 부성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마지막으로 서로에 대한 혹은 대상에 대한 지식-역자는 지식이라 번역했으나 나는 감히 앎이란 표현이 적절치 않을까 생각한다. 원문을 보지 못하였지만 프롬이었다면 knowledge보다는 한층 더 추상 단계의 단어인 acknowledge가 어울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는 나의 짧은 단견임을 표명한다.-을 들었다.

사랑에 있어 가장 무서운 것은 이기주의와 무관심이다. 일반적으로 처음 만난 둘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참으로 기적과 같은 일이다. 서로 몰랐던-혹은 알았더라도-둘이 하나의 일체감을 형성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하지만 둘의 사랑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은 일시적일 수 있으며 그 동안 그들이 얼마나 외로웠는가를 반증해준다.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로에 대한 관심이 적어지면 무관심으로 그리고 이기주의적으로 변모하기 쉽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의지와 행동이다. 의지가 없이는 행동이 이루어질 수 없고 행동이 없는 사랑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사랑은 감정의 행위가 아니다. 우리가 “사랑한다(make love)” 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이라는 것은 몸으로 실천할 때 비로서 그 완성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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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56
올더스 헉슬리 지음, 정홍택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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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세력을 휘어잡고 인간을 지배한다-에머슨
이 책을 보면서 20세기 초중반의 책은 어쩌면 이리도 닯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업화가 완성되어 분업의 형태가 발달하고 콘베이어를 이용하여 인간을 단순 작업에 얽매이게 한 포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랄까? 어쩌면 지난 세기 초반에 인간은 과학에 대한 환상을 신봉하면서도 그것을 두려워하는 모순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소설이다.

산업화의 발달로 인한 인간의 획일화, 유럽에서 태동하고 있는 파시즘에 대한 대한 두려움, 인간 이성의 무한한 믿음이 한데 어우러진 20세기의 최고 소설이 아닐까 여겨진다. 프롬이 지적했듯이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착각이며 오히려 사회에 흡수됨으로써 자유를 찾지만 오히려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당시 사회적 메커니즘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여실히 들어내주는 작가의 통찰력에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다. 이 글을 단지 문학 작품으로만 보기엔 너무나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산업화가 모든 것을 가져다 주리라는 유토피아적 환상은 결국 불행으로 끝나며 우매한 대중을 프로파간다로 현혹하는 당시의 사회적 기류를 읽을 수 있다. 어찌보면 그 시대보다 지금이 더할 지도 모른다. 더욱이 '매스미디어와 인터넷'이라는 '소마'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대중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며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게 묶어두는 지도 모른다. 계급사회, 물질 만능주의, 소마....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큰 암시를 던져주는 '멋진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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