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캉젤리크 - 바타유 시집
조르주 바타유 지음, 권지현 옮김 / 미행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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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오 나의 목마여

암흑 속의 거인

내가 바로 목마를 탄

저 거인이다.

ㅡ바타유, 《 『니체에 관하여』에서 》 中

바타유: 니체류 현기증의 계보.

詩. 그것을 읽는다. 그것은 때론 노래라기보다는 언어적 광물, 물성. 특히 바타유와 같이 언어적 질료를 다루는 시인에게선 더더욱. 좋음의 좋음에 대하여, 어떻게 "말할" 것인가가 내게는 꽤 문제였다. 비단 바타유뿐만 아니라, 우리가 시 안에서 어떤 특정한 언어적 풍경과 광휘에 사로잡힐 때, 와닿는 그것은 먼저 말이라기보다는 느낌이고 사로잡힌 그 매혹의 결 속에서 강렬하며 달콤한 악마적 시간들을 음미하면서 허우적대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그 느낌에는 정답이랄 게 없으므로, 해석학적 지평의 자유 위에서 우리는 우리의 느낌들을 믿어볼 수 있다. 바타유는 이전에 《불가능》을 읽어본 게 전부였고, 머릿속에 헛돌고 휘감는 그 문장들 중에 일부는 이해했다고 '믿었'고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번 시집은 달랐다. 시들이 배열된 질서에 맞춰 그의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금방 그 언어적 세계와 공기에 익숙해졌고 전자의 저서에서처럼 기표 위로 (생각과 그 외의 모든 것들이)죽죽 미끄러졌던 바 없이, 매끄럽게 잘 읽혔다. 언어적 질감은《불가능》에서 광인이 마치 압생트를 마시고 취해 미친듯 웃어대며 내키는 대로 마음껏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오줌을 갈기듯 호탕하게 느낌표(!)를 내지르던 분위기와는 달리 상당한 절제의 미학이 돋보였고, 세련됐으며, 검은 그림자들은 Petit했다. 작은 고독과 죽음의 공기를 행간에 치밀하게 배열했고 '똥'과 '오줌'은 상대적으로 그렇게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 그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이제는 익숙한 이야기들이므로 깊은 인상을 받기보다는, 그가 떼쓰는 죽음을 풀어내는 순서와 방식이라든지, 언어적 질감을 감상하는 것은 역시 흥미롭구나, 의 감상들을 불러일으켰던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좋았던 시들과 웃음을 터트렸던 시.

1. 대상이 부재한 기도

나는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나는 신음한다.

나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

나의 감옥을.

씁쓸하게 나는

이 말을 한다.

나를 질식시키는 말들,

나를 내버려 둬,

나를 놔줘,

나는 다른 것에

목말라.

나는 죽음을 원해

허락되지 않기를

이 말들의 지배,

두려움 없는

연속을,

갈구하고픈

두려움처럼.

아무것도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그렇지 않다면

있는 그대로를

비겁하게 받아들인다.

나는 증오한다,

이 도구적 삶을

나는 균열을 찾는다,

나의 균열,

부서지기 위해.

나는 비를 사랑한다,

벼락을,

진흙을,

어느 넓은 바다를,

땅속을,

하지만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

땅속에서,

오 나의 무덤,

나에게서 나를 해방하라,

나는 더 이상 나이고 싶지 않다.

눈물 흘리는 망령

오 죽은 신이여

퀭한 눈

젖은 턱수염

하나뿐인 이

오 죽은 이여

오 죽은이여

알 수 없는

증오로

당신을 뒤좇았다

그리고 증오로 죽어갔다

마치 흩어지는

구름처럼.

ㅡ《『내적 경험』에서》

하늘 높은 곳,

나의 영광을 찬미하는, 천사들의 목소리.

태양 아래 나는 작고 검은,

길 잃은 개미, 둥근 돌이

나에게 다가와,

나를 으스러뜨린다,

죽어서,

하늘에서

태양은 작열하고,

눈이 부시다,

나는 외친다.

"감히 못할걸"

감히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아니다' 아니 아니지

나는

사막 밤 광활함이다

무엇인가

사막 광활함 밤 짐승은

돌아오지 않고 재빨리 허무가 되는

그리고 무엇도 알지 못하고

죽음

즉답

태양의 꿈이 뚝뚝 흐르는

스펀지

나를 무너뜨려라

이 눈물밖에

모르도록.

나는 별을 좇는다

오 죽음

천둥의 별

내 죽음의 미친 종鍾.

용감하지 못한

시들

그러나 감미로움

환희의 귀

암양의 교성

저세상으로 가라 저세상으로

꺼진 횃불.

ㅡ 《저 높은 곳에 나의 영광》

'무신학 전서'에서 신이 없는 기도와 대상 없는 기원의 경험에 대해 다루려고 했다는 역자의 주석으로 인해 흥미롭게 읽은 시들이었다. 신을 가장 사랑해야만 했던, 그래서 증오했던, 목마에서 떨어진 니체류 인간들은 결국 기원을 상실한 허무 속에서, '나'의 해방을 기원하며 대상 없는 기도를 실행한다. 사막-밤-광활함으로 이어지는 구도가, 사막-광활함-밤-짐승으로 이어져 바뀌는 구도 또한 흥미로웠다. 바타유는 다른 무엇의 질서에 내맡기지 않고, 부차적 질서 형성에의 욕망을 버린 채 내적 흐름에 따라 시의 운명을 내맡기는 짓을 잘 한다. 그게 실패하지 않으려면 이렇게 치밀할 수밖에 없다.

2. 화살

오 무덤 바닥에서

가녀린 밤의 손가락 사이로

던져진 주사위여

태양 새의 주사위

취한 종달새의 뜀

밤에서 태어난

화살 같은 나

오 뼈의 투명함이여

태양에 취한 나의 심장은

밤의 손잡이다.

ㅡ《『니체에 관하여 』에서 》中

뜨거운 손으로

나는 죽는다 너는 죽는다

그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진짜로

나는 죽었다

죽고 죽었다

칠흑 같은 밤

그에게

쏜 화살.

ㅡ 《신 》

내가 몰지각한 밤을 비웃고 있는 복도

문 닫히는 소리에 내가 웃고 있는 복도

내가 화살표를 사랑하는 복도

ㅡ 《무덤》

그의 시에서 자주 반복-변주하여 등장하는 몇몇 시어들 중에는, '화살'이 있는데 이것은 존재의 보증, 질서에 저항하는 창(槍)과 같이 기능하고 있다. "별칭(꼬챙이)으로 가리키는 상태를 묵상의 형식으로 몇 자 적는다."라는, 시《『니체에 관하여』에서》 의 첫 행을 봐도 눈치챌 수 있다. 그것은 이미 '바닥'과 '복도', '밤'과 같이 제한되고 막다르고 닫혀버린 곳에서 태어나는, 인생 내내 쉴새없이 빠르게 진행되는 현존, 피흘리는 시간의 지속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3. 웃음을 터트렸던 시. 여기서 나는 내 무슬림 친구 W가 언젠가 썼던 '대륙철학적' 사유가 넘치는 글을 먼저 인용하고자 한다. 섹스가 프랑스식 은유로 '작은 죽음'임을 생각해볼 때, 그 어원에 대해 바타유식 에로티슴의 방식과 관련하여 고찰해볼 만한 글이다.

장자는 삶이란 기(氣)의 모임과 흩어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체 왜 '氣'는 모여 있는가? 모여 있는 것은 꽤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장자의 '氣'를 현대적 언어로 번역하면 에너지가 될 것이다. 즉 생명이란 에너지가 꽉 들어차 있는 것이다. 좀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겠지만, 나는 통합과학 시간에 대기대순환과 에너지불균형에 대해 들어본 기억이 있다. 전지구적으로 에너지가 불균형하기 때문에 그 균형을 위해 에너지가 특히 대기가 끊임없이 순환한다는 내용이다. 높은 위치에너지를 가진 물이 낮은 곳으로 뚝 떨어지는 것은 그 자체로 자연스럽다. 예컨데 에너지는 그 불균형함의 산포도가 0이 되도록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대체 생명은 왜 에너지가 모여있는 것인가? 에너지의 순환의 관점에서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서 일종의 프로이트의 죽음 충동이 나타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생명이 자연의 관점에서 부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죽음의 의지가 드러난다. 이것은 비인격적이고 충동적이며 지극히 원시적인 기제이다. 유전자 수준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생명은 죽음 충동과 죽음을 통해 모여있던 에너지를 전소하고 존재론적인 평등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이거랑 꽤 비슷한 게 있는 것 같다. 바로 섹스다. 섹스는 에너지를 정말 단시간에 소모한다. 사람은 오르가즘의 순간에 극한의 쾌감을 누리며 정말 큰 힘을 쓴다. 섹스와 죽음은 에너지의 전소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래서 고대 중국인들의 양생술에서 사정행위를 두려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무튼 사정행위가 생명을 배태시키는 행위이면서 동시의 죽음 충동의 예증이라는 것이 만약 우스갯 소리가 아니라면 정말 재미있는 지점인 것 같다. 죽음이 만약 평등을 또 인간의 모태와의 결합을 추억하는 행위라면 섹스를 통한 결합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성서를 비롯한 많은 고대 신화와 제의들은 인간의 죽음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흙은 동시에 무궁무진한 창조로서의 여성의 자궁을 의미한다. 죽음이 근원적 생명관계에로의 회귀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남자의 입장에서 여성과의 결합은 잃어버린 어머니와의 결합이 아닌가? 여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아닌가?

섹스와 죽음은 그리고 종교성과도 연관된다. 앞서서 나는 관계의 회복으로서 죽음과 섹스를 말했다. 이것이 종교와 연관이 되는 지점인 것 같다. 종교의 어원으로 지목되는 Religare은 "다시 묶는다."라는 뜻이고 라틴어로 종교를 의미하는 religio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섹스와 죽음이 근원적 관계의 회복이라면 그 내밀한 면에서 신성함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성 그레고리우스 대종의 <성인전>의 성 베네딕도 부분에는 베네딕도가 아름다운 여인을 잊지 못하고 가시덤불에 몸을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레고리는 "그가 불길을 바꿈으로서 유혹을 이겨냈다." 라고 말한다. 여기서 단순히 엄격한 수도전통을 떠올리면 우리는 아무 교훈도 얻을 수 없다. 우선 우리는 '유혹' 이 무엇인지 더 생각해야한다. 하느님의 아름다운 피조물을 느끼는 것이 정말 죄인가? 내 생각에 그것은 말도 안 된다. 오히려 아브라함 종교의 전통에서 생각해봤을 때 그것은 '아름다운 것을 소유하려는' 유혹을 지시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아름다움은 피조물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그래서 베네딕도는 모세가 하느님을 목격했던 가시덤불에 몸을 던지는 것이다. 즉 지배적 관계에서 '유아적 자아를 버린다는 점에서 참 고통스러운 길이지만' 근원적 관계로 변신을 추구한 것이다. 즉 성욕은 에너지를 전소하여 평등을 회복하는 일종의 불길이며 활력이다. 그래서 이 죽음과 생명의 성욕을 조화시키면 모든 존재자가 하나가되는 체험을 하게 된다. 칠층산의 주인공인 토마스 머튼이 생애 말미에서 불교도들과의 교류 중 스리랑카의 플론나루에서 불상을 보고 "모든 것이 공sunyata 이며 자비karuna" 입니다. 라고 말한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ㅡW, 무제의 글 중에서

그리고 바타유 아니랄까봐, 이 시집에서도 역시 그의 에로티슴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아래의 시, 그의 뒤집힌 신학적 미학('무신학 전서'의 연장선상일ㅡ)의 세계관을 보여주는《오라토리오》가 등장한다.

오라토리오

등장인물

내레이터

창녀 90세,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스무 살에는 숭

배할 만큼 아름다웠다) 벌거벗은 어느 날, 그녀는 『소돔

120일』에서 도쿠르가 뒤클로를 섬기듯 신을 섬겼다.

사제 30세.

일종의 두꺼운 책.

내레이터가 등장인물을 불러 소개한다. 의상도 장식도

없다. 무대는 창녀의 방이다.

창녀: 하수구

난 하수구야

아!

사제: 나, 사제는

너의 소년이다

죽어가면서

내 귀를

만져다오.

오 내 성체의 빵

내 하수구 어머니

내가 당신을 거양하겠소

두꺼운 책: 나는 신이다

사제여

네 머리를 박아버리겠다

너를 죽이겠다

나는 머저리다.

ㅡ바타유,《아르캉젤리크》중에서

읽자마자 이야 바타유, 이걸 이렇게 써? 당신 정말 골때리는 양반이야. 하면서 크게 웃었다. 바타유식 유머 혹은 그 다운 화법. 형식 면에서나 내용 면에서나, 여러가지로 굴릴 쾌감을 느끼게 하는 굉장히 재미있는 시다. 종교개혁 이후의 현대에서 신 또는 신성을 대리한 존재자로서의 사제, '창녀'로 대변되는 만연한 성 중독과 섹스라는 종교와 자연스럽고 당연시된 자본주의적 성애화, 신이 죽은 이후의 세계에서의 신성과 속됨을 찌르고 동시에 내지르고 현현하고 비트는 솜씨가 극도로 세련됐다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이 세계에서 창녀는 육체를 지닌("오 내 성체의 빵") 미식회의 종교의식이자 마리아("내 하수구 어머니")이다. 신은 바깥의 내레이터의 음성으로서 소개되길, "일종의 두꺼운 책"으로서 "너를 죽이겠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바타유식 블랙코미디라고 이름붙이고 싶다. 극의 형식을 취했음에도 시의 형식에서 넘치거나 벗어나지 않도록 고도로 정치하게 조절한 결과가 노련미 넘치고, 원래 이런 취향은 아니었음에도 이 시가 꽤 마음에 들었다. 니체주의자는 아니지만 니체주의자들을 긍정하는 입장에서 나는 니체주의자들의 이런 행보를 여전히 즐겁게 지켜볼 것이고, 시의 전략에서 성공한다면 흥미로운 방식이 될 것이다. 이런 실존적 시도-쓰기가 없는 모험들이란 그만큼 금방 시시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니까. 자신의 존재자를 죽음 전체에 내걸고 내맡기는 사상이 더 이상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진 않거나 심지어 유치하게 느껴질 때가 있더라도 우리가 현실을 유쾌하거나 진지하게 폭로하고자 할때, 이런 비애극의 방식은 매력적인 바깥을 보여주기도 한다.

*

"언어의 파괴는 나의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나를 없애버린 순간처럼, 오로지 나를 파괴함으로써만 내 안에서 일어난다. (지금 나는 말하고 있지만 헛되이 말할 뿐이다)

(...) 내가 '신'을 말한다면, 나는 내 안의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극복되기를 바라는 주권을 양도할 것이다. (...) 나체, 오줌이 나오는 틈, 똥의 이웃과 죽음의 관계는 일출과 낮의 관계와 같다. '하찮은 죽음'의 예술은 매 순간 내 안에서 위대함의 공포를 예고한다. 신은 썩은 흙에서 그랬듯 나의 똥 같은 나체에서도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ㅡ바타유, 《명상》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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