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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고구려 - 이정기와 제나라 60년사
지배선 지음 / 청년정신 / 2018년 1월
평점 :
지난 2012년도에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이 하나 있었다.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에 새로 취임하는 플뢰르 펠르랭이라는
여성이 한국계라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인데, 당시 한국언론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이를 집중 보도하며 그녀의 성취를 개인의 성공이
아닌 '한국인의 우수성을 증명한 쾌거'로 만들 준비를 시작했다.
허나 사태는 예기치 못한 쪽으로 진행됐는데,
그녀가 자신을 한국인으로 생각하지 말라며 이를 정면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생후 6개월만에 버려져 프랑스로 입양되어
한국어는 커녕 한국에 대한 기억조차 없었고, 자신이 프랑스에
오게 된 경위를 알게 된 후에도 프랑스인으로 살기로 결정해
지금까지 한국을 와본 적도 없다고 했다.
당황한 언론은 그녀와의 인터뷰에서 내내
왜 친부모를 찾지 않는지,
발견되었던 동네에 들를 생각은 없는지,
왜 굳이 '나는 한국인이 아니고 프랑스인'이라고 강조하는지,
한국 술이나 노래, 영화 등엔 관심없는지,
지금이라도 한국어를 배워볼 생각은 없는지 등
끈질기게 '한국과의 인연'을 강요했지만 그녀는 확고하게 자신은
'프랑스인'임을 고수했고 결국 언론에선 '그녀는 사실 한국에서
버림받았다는 기억때문에 아직 한국에 대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은 것 같다.
혹시 동양인 입양아로 낮선 프랑스에서의 삶이 힘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녀의 삶 전체가 비로소 이해되는 듯 했다' 며 잘 알지도 못하는 그녀의
속내까지 추궁했고 끝끝내 그녀를 한국과 어거지로 연관시키며
이 전지적 시점의 소설 한편을 머쓱하게 끝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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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뢰르 펠르랭 사건은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
한국인이 되기 위한, 아니 어느 한 민족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법적 신분인 국적? 유전적 요소? 아니면 개인의 의지?
플뢰르는 명확하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밝혔기 때문에
더이상의 촌극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 대상이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역사적 인물이라면?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에서 활약한 유민출신 중 가장 성공한 사례인
이정기와 제나라 왕국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역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단지 그의 유전적 요소가 고구려인이라고 해서 고구려가 멸망한지 64년이나
지난 뒤에 태어난 이민 3세대 정도의 그를 곧바로 고구려의 자랑이자
한국인의 쾌거로 연결지어도 될 것인가?
저자는 이정기가 유전적으로 고구려인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기반이 된
지역에도 고구려인 후손들이 많이 살았기 때문에 제나라는 발해와 함께
고구려인이 세운 제3의 고구려 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에 보낸 국서에
스스로를 '고(구)려 국왕'이라 밝힌 발해의 사례와 달리 남겨진 기록 어디에도
그가 스스로 고구려인이라는 의식을 보인 일은 없으며 그의 아들과 손자들
역시 마찬가지이며 그의 중신들 중 고구려 출신이라 기록된 인물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정기가 고구려인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개인적 업적을 고구려인의 성취이자 한국인의 쾌거로 받아들여야 할까?
서두와 말미에서 밝혔듯 저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위대한 고구려의 마침표로 이정기 왕국을 알린다고 하지만, 정작 저자가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가 아닌 이유로 강조하는 '독자적인 천하관'을
이정기 왕국에선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문제다.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은 '왕'의 지위에 오르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당나라 황제의 아래인 위치를 유지했고 그에 따라 당나라 황제가 주는
벼슬들을 거부하지 않고 꾸준히 받았으며 일찌감치 아들들에게도
당나라 고위 벼슬을 챙겨주기까지 했는데, 이는 당시 무력으로 득세한
군벌세력들의 전형적인 세력굳히기 전략으로 독자적인 천하관과는 거리가 멀다.
저자는 신라와 조선의 비굴한 유교사상 때문에 감히 상국인 당나라와
당당히 맞선 제3의 고구려 제나라를 좋게 볼 수가 없어 지금까지 조명이
되지 않고 있다고 안타까워 하지만, 이처럼 이정기에 대해 확실한 건
그가 유전적으로 한국인의 조상이라는 것 뿐인 상황에서 섣불리 그의
성공을 한국인의 성취로 받아들이기엔 여러 문제점들이 있는 것이다.
만일 저자의 이런 논리를 그대로 따를 경우 동북공정문제에서 또 한 가지
골치 아픈 쟁점이 생기는데 바로 고조선의 '위만왕조'이다.
위만은 한나라인으로 고조선에서 일으킨 쿠데타가 성공하여 새로 왕조를 열었다.
저자의 논리라면 위만이 고조선을 정복한 일은 곧 중국이 한국을
정복한 쾌거가 되는데, 그럼 고조선도 중국역사라는 동북공정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고조선 멸망 후 설치된 한사군에서도 지배층은
분명히 중국인들이었는데 그럼 중국과 일본의 주장대로
한국 고대사의 고조선~한사군시대는 중국의 식민지였던 꼴이 된다.
동북공정은 물론 말도 안되는 무례하고 천박한 중국인들의 자위질에
불과하며 이를 좌시해선 안되지만, 그렇다고 중국의 억지 논리에 똑같은
방법으로 맞대응하는 것만으로는 위에 언급했듯 문제는 영영 해결되지 않는다.
목표는 어디까지나 동북공정을 분쇄시켜 다시는 이런 소리를
못하게 확실히 종결짓는 것이므로 저들의 뻔뻔한 곡학아세에도
좀 더 차분하고 의연히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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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 자체에 대해 평하자면, 이따금씩 등장하는
(이정기와 제나라가 고구려역사라는) 저자의 코멘트들을 제외하곤
책의 내용 자체는 전반적으로 만족스럽다.
의외다 싶을 정도로 저자는 자신의 저런 '코멘트'를 자제하고 있으며
여러 사료들을 잘 엮어 이정기와 제나라 55년사를 충실히 설명하고 있는데,
동북공정에 대한 반박은 책의 마지막 장에 별도로 구성되어 있어 역사는 역사대로,
사관은 사관대로 구분한 저자의 구성이 특히 만족스러웠는데,
다만 오타는 그렇다 쳐도 당시의 혼란한 정세와 다양한 등장인물들에 대한
좀 더 친절한 설명, 그리고 지도가 몇 장 더 있었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지도는 p45. p185. p188 로 딱 세장이 나오는데
문제는 이 지도가 이정기의 제나라 영토만 표시하고 있고 그 외의 지역은
아무런 표시가 없는데 책에는 제나라 영토와 인접한 다른 지역들이
수시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왕 만드는 김에 140페이지 분량의 텀 사이에
한 두 장 더 넣어주고, 인접한 지역들도 함께 표시해줬으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싶다.
비록 우리 역사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이정기와 제나라-그리고
저자가 전문으로 연구하는 다른 고구려 유민들-의 역사는 솔직히 재미있고
감정이입도 되어 신나기도 한다.
특히 이정기라는 인물 자체가 가진 전형적인 영웅으로서의 풍모와 매력,
그리고 이를 토대로 난세를 기회로 바꿔 역사에 남긴 큰 족적을 따라가는 건 정말 재미있다.
위에 주저리 떠든 사관에 관한 문제를 뺀다면,
부담없이 순도 100% 실화 이야기를 즐기기에 추천할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