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시대의 재구성 -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시대의 내밀한 이야기
존 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소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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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1340년대 유럽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건 중 하나인, 훗날 ‘흑사병시대’라고 회상하게 만드는 페스트가 유럽을 강타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페스트가 어떻게 유럽을 강타했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또한 페스트가 유럽을 지배할 당시 유럽인들이 어떤 혼란을 겪었는지, 그 와중에 유대인이 학살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이가 있을까?

이럴 때는 돋보기가 필요하다. 거대한 역사의 장면을 세밀하게 관찰하게 해주는 도구가 필요한데 존 켈리가 <흑사병시대의 재구성>을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책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는 페스트가 어떻게 창궐했고,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를 꼼꼼히 살피며 흑사병시대에 유럽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도록 미시적으로 그 시대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럼 저자가 어떻게 역사를 재구성했는지 책 속을 들여다보자. 저자는 페스트의 이동경로에 초점을 맞췄는데 첫걸음은 중세의 무역항인 카파에서 시작된다. 제노바인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카파는 한때 잘 나갔지만 무적이라고 불리던 몽골군과의 싸움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카파는 고립된 채 죽을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몽골군이 퇴각한다. 덕분에 카파의 주민들은 살 길을 찾게 된다. 그리하여 1347년 4월 혹은 5월, 해방된 주민들은 서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몽골군을 피해 구원의 도시를 찾아 떠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무적을 자랑하던 몽골군이 퇴각해야 할 정도로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인 페스트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도망치던 제노바인들 때문에 유럽에 페스트가 상륙하게 되리라는 것을.

카파에서 도망치던 이들이 정확히 어느 도시에 상륙했는지는 모호하다. 몇몇 도시의 이름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인데, 중요한 건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이로 인해 유럽이 페스트의 사정거리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랬다. 도망치던 선박이 잠시 땅에 닿기만 해도 페스트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그 지역을 ‘접수’해버렸다. 그 지역의 군대가 이상한 분위기에 당황스러워하며 불길한 선박을 쫓아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직후였다. 더욱이 이렇게 쫓겨난 선박들은 다른 도시에서 똑같은 일을 만들어냈고 그리하여 페스트는 곳곳에서 유럽을 관통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기 전에 기근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던 유럽과 페스트의 종류 등을 살핀 뒤에 1347년 10월의 시칠리아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이때부터 도시와 시기에 따라서 페스트가 어떻게 유럽을 강타했는지를 세밀히 살피고 있는데 그 결과는 상상이상으로 끔찍하다. 페스트는 얼마나 위력적이었는가? 마을 인구 3분의 1이 죽었다는 보고가 평범하게 여겨질 정도로 페스트는 인간을 학살했다. 세계 2차 대전에 뒤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규모인 재앙이라고 할 정도니 그 참상이 오죽했겠는가.

페스트가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를 살펴보는 것과 더불어 <흑사병 시대의 재구성>에서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은 페스트의 공격에 대한 인간들의 ‘다양한’ 반응이다. 반응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살기 위해 가족을 버리는 몰염치한 행동인데 저자는 당시 많은 도시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외면하고, 남편이 아내를 외면하는 일이 당연하게 일어났다고 알려주고 있다. 그나마 좀 나은 경우가 환자가 자는 사이에 도망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 상황이 오죽이나 끔찍했으랴.

두 번째 반응은 이런 와중에도 도리를 지키려고 했던 인간들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시체를 들판에 버리지 않고 장례식을 치러주는 일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니 거대한 질병 앞에서도 도리를 지킨 인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반응은 유대인 학살이다. 당시에 엉뚱하게도 페스트의 원인이 유대인이 우물에 독극물을 넣어서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는데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 하나의 진실처럼 여겨졌다.

흡사 관동대지진의 원인이 조선인들에게 있다고 주장한 일본인들처럼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책임을 물고 분풀이를 했던 것인데 유대인에게 책임을 무는 인간의 모습은 페스트만큼이나 잔혹한 것이었다. 그 외에 언제 죽을지 모르니 쾌락을 즐기자는 사람들이나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의미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는 고행자들도 등장했는데 이들은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는데 한몫했다.

페스트를 쫓던 저자의 발걸음은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양지에 도달한다. 자연적으로 페스트가 끝났기 때문이다. 뒤에 계속해서 페스트가 창궐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은 만세를 지르며 거리로 뛰어나온다. 인구는 격감했고 로마의 시절처럼 텅텅 빈 건물들이 많아 유령의 도시 같은 곳이 많았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럽은 다시 살 궁리를 한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이처럼 <흑사병시대의 재구성>은 겉모양은 전염병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중세 유럽의 솔직한 풍경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돋보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는 듯 기존의 문헌 자료를 토대로 성직자, 귀족,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은 물론 페스트로 인한 벌어진 사회 현상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데 이는 평시에는 볼 수 없는 유럽인의 과거이기에 <흑사병시대의 재구성>은 흔치 않은 만남을 제공하고 있다.

책 사이사이에 생생한 묘사가 풍부하다. 또한 뚜렷한 서사구조로 구성돼 있어 저자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소설 못지않게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할까. <흑사병시대의 재구성>, 미시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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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시비돌이 > 드림위즈에서 김용화님의 서평 가져옴.
다시 아웃사이더를 위하여
지승호 지음 / 아웃사이더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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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은 날짜: 2005년 2월 10일
* 펴낸 곳: 아웃사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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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는 제도권 또는 주류권에서 벗어난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진보적 색채를 지닌 지식인의 상징이 되어 버렸다. 특히 인터넷 언론의 위력이 강화되면서 이들의 입지가 두드러진다. 위치는 아웃사이더이지만 여론에 만만치 않은 위력을 지닌 사람이 바로 현재의 아웃사이더이다. 진중권, 강준만, 홍세화 등이 대표 주자이다. 이 책은 8명의 아웃사이더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기록한 책이다.

[홍세화]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으로 그의 존재를 알렸다. 합리적인 지식인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물론 프랑스와 비교하면서 우리나라를 비판하기 때문에 누구는 '그럼 너가 좋아하는 프랑스로 가라'고 조롱하지만 분명 이 시대에 필요한 지식인임이 틀림없다. 현재 TV에서 토론 프로그램이 많은데 이 토론 프로그램에 문제가 많다고 그는 지적하고 있다.

"TV토론을 보면 너무 형식적이에요. 형식논리에 매달려 있어요. 또 하나는 구도 자체가 지극히 대칭적입니다. 구도에서부터 이미 토론이 재미없다는 느낌을 갖게 해요. 사회자가 중앙에 앉아서 양쪽에 찬성하는 사람, 반대하는 사람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상대방 의견의 포용 가능성을 구도 자체가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구요...이건 어떤 면에서 권위적인 구도예요. 토론을 죽이는 거죠. 그리고 사회자가 중립성을 지킨다는 것은 신화입니다. 사회자가 자기 생각을 중앙에 둘 게 아니라, 양쪽을 왔다갔다 하는 운영의 묘를 가져야 되요."

[강준만]은 <김대중 죽이기>라는 책으로 그의 이름을 드날렸다. 그 동안 그 누구도 건들지 않았던 민감한 지역감정 영역에 가감없이 자신의 솔직한 의견을 개진했다. 또한 실명을 거론하면서 직접 비판함으로써 그 동안 관습화된 가명에 대한 성역을 깨뜨렸다. <녹생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강준만 같은 천재가 우리 사회에서 <조선일보>와 싸우는 일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 불행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흔히 진중권은 천재형, 강준만은 노력형이라고 하는데 인터뷰어인 지승호는 강준만 역시 천재형이라고 생각한다. 강준만은 남을 잘 칭찬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근데 칭한 못하겠더라구요. 칭찬이 비판보다도 훨씬 어려운 것 같아요. 비판은, 제가 비판했던 사람이 나중에 좋은 일하면 제가 비판했기 때문에 사람이 좋아졌구나 하는 그 말을 들을 수 있어요. 근데 칭찬했던 사람이 개판 치면 정말 곤란해집니다. 그 시점에 괜찮은 일 했던 사람이 달라진 걸 절더러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근데 그걸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문제를 삼으니까 왜 사람들이 칭찬을 안 하는지 알 것 같아요."

[진중권]은 가장 통쾌한 논객으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이 시대 최고의 논객, 또는 천재형 논객으로 평가받고 있다. 강준만이 민주당(노무현 또는 지금의 열린우리당) 지지자라면 진중권은 민주노동장 지지자이다. 진중권은 최근에 강준만에 대해서 매우 실망한 모양이다. 편파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상당 부분 실망했습니다. 안티조선 초기에는 굉장히 순수했어요. 다르다는 걸 알고, 굉장히 조심하고, 서로 안 갈군 거죠....강준만이 쓰는 글은 처음부터 주제가 민주당 편향이에요. 서태지를 쓸 때도 '김대중 후보는 서태지를 좋아한다더라' 이런 식으로 쓸 거예요. 이분이 쓴 글의 리스트를 뽑아서 보면 그 글들을 쓴 목적이 다 있거든요....그런데 나중에 본색이라는 걸 알고 나서 엄청나게 실망한 거죠."

[박노자]는 러시아인이면서 한국에 귀화한 지식인이다. 그는 영화 <춘향전>을 보고 받은 충격 때문에 한국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유시민의 말에 따르면 '내가 40년을 넘게 살면서 두루뭉술 인식하고 있던 문제들을 불과 10년을 산 박노자가 너무나 분명하게 끄집어낸다'고 허를 내두른다. 그만큼 한국 역사에 능통하고 날카롭게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래서 딴지일보의 김어준 총수는 박노자의 글을 읽고 나면 한국에서 살기 싫어질 정도라고 말한다. 그만큼 한국에 대한 비판이 적나라하다. 그는 이문열을 결단코 지식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뭘까?

"그분(이문열)은 지식인 아니에요. 장사꾼이죠. 한국에서는 근대 초기에 그런 부류가 생겼어요. 일제시대 때 그런 사람들이 많았는데, 대중 매체가 생기고 나서 그 글들을 대중 매체에 팔아 명성을 얻고, 대중의 취향에 영합하기도 하고, 기득권에 영합하기도 하면서 양쪽에서 명성을 얻고, 결국에는 사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 전에는 대표적으로 이광수 같은 사람이었죠...그 사람들은 재주는 많았지만 진실성이 없었고, 유교적인 배경이 전혀 없었어요. 형식적으로 유교적 배경이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매문업자들이 일제시대 때 생긴 겁니다. 이문열이 속한 부류는 그 매문업자의 부류이지, 지식인이 아니에요. 매문을 아주 성공적으로 한 부류죠."

[김정란] 교수는 원래 시인이었으나 평론가를 거쳐 요즘은 정치평론까지 발을 넓히고 있다. 여성 논객 중에 가장 논리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진중권과는 달리 강준만 교수에 대해서는 호감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

"강 교수에 대한 첫 느낌은 당혹감이었죠. 글쓰기의 적나라함에서 오는 미적 충격을 받았어요. 나 같은 문체주의자들이 빠지게 되는 함정에 저도 빠지게 된 적이 있죠. 그런데 강 교수의 글을 꼼꼼히 뜯어 읽으면서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어떤 지점에서 틀려 있었는가를 알게 되었고, 이 사람을 돈키호테로 끈타게 해서는 안 되겠다, 같이 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홍구]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는데 사진을 보니 TV토론 프로그램에서 본 듯한 얼굴이다. 그는 <대한민국사>라는 책을 냈다고 한다. 그의 역사이야기는 우리가 애써 외면해왔던 국가와 군대의 민간이 학살이라든지, 우리가 왜곡해왔던 치부들을 들추었다고 한다. 그래서 보수단체에 강력한 항의 및 협박을 받기도 한다. 그는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보수가 없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보수 세력이라는 게 뿌리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의 보수 세력은 뿌리가 없죠....프랑스 같은 데서 극우에 가장 반발하는 것은 좌파가 아니라 우파죠. 건전 우파와 극우파가 일부 비슷한 주장이 있는데, 헷갈릴까 봐 '저쪽은 정말 큰일날 놈들이다'라는 걸 가장 열심히 떠들 수밖에 없는 게 우파란 말이거든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게 안 되었던 거죠. 왜 합리적인 보수나 자유주의자가 없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극우수구 세력의 엄청난 칼바람에 오히려 몸을 사리는 거죠.....보수주의가 허약해진 건, 진보에 의해서 허약해진 게 아니라 수구꼴통의 득세에 의해 허약해져 버린 거거든요....한국에 보수파가 왜 없는가, 수구꼴통들에 의해서 분쇄를 당했던 것이고, 거기에 한 자락 걸쳐서 해먹지 않으려던 사람들이 진보판을 형성했던 거죠."

[김민수]는 서울대 미대교수인데 선배 교수들의 친일행각을 거론하면서 그게 발단이 되어 교수재임용에서 탈락하자 항의 중이다. 인터뷰 당시 역시 5년째 항의중이었다. 그런데 엊그제 뉴스를 보니 '재임용탈락 취소청구 소송'에서 승소하여 복직한다는 반가운 뉴스를 들었다. 그는 한강 다리와 시내버스를 예로 들면서 한국 사회 디자인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다.

"애초에 다리를 아름답게 디자인하지 않고, 추가예산 쳐들여 경관등 켜서 그림처럼 아름답게 장식하려 하거든요. 다리란 '보는 것' 이전에 본질적으로는 '건너면서 느끼는' 구조물입니다.....다른 예로 우리의 시내버스를 한번 보세요...앞쪽 문 옆에 바퀴를 따라 산봉우리처럼 솟은 좌석을 보세요. 그게 어떻게 인간이 앉으라고 만들어 놓은 건지, 그 뒷자석에 앉아 있는 사람은 미끄러져서 다리를 어디다 놔야될지 모르잖아요. 버스 안에 앉아 있는 사람들 다리 보면 하나같이 다 우그러져 있어요.....시민에 대한 배려가 정말 눈꼽만큼도 없어요. 짐 싣는 화물차로나 적합할까. 그러면서 세계 5대 자동차 생산국이라는 타이틀이 무슨 소용이에요."

[노혜경]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의 정형근과 맞붙어 고배를 마신 바 있는 시인이다. 인터뷰는 그 이전에 이루어진 내용이다. 인터뷰어인 지승호가 대표적인 여성 논객이 극소수라고 하자 그 이유를 2가지로 설명한다.

"일단 논리성이 약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 거구요. 김정란씨는 굉장히 명징한 사람이지만, 조기숙 교수나 저 같은 경우에는 솔직히 구멍이 비는 얘기를 할 때가 많잖아요. 구멍이 빈다고 하는 것이 다분히 여성적인 특징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이 아주 명징하고 논리적이기 위해서는 어떤 측면에서는 추상화시킬 수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제가 추상화를 잘은 못 시켜요. 왜냐하면 디테일이 아까워서......논객의 세계 자체가 추상화를 누가 잘하는가에 대한 부분이 있잖아요. 두 번째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상당히 엄격하게 구분하려는 가부장 사회의 특징 때문에 여성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인다는 것에 대해 다소간 부정적으로 보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이 시대의 지식인은 시대의 불의와 부패와 부조리를 눈치없이 일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 사회는 이런 비판에 대해 관대하지 못하다. 그래서 위와 같은 뛰어난 지식인들은 제도권에 안착하지 못하고 아웃사이더라 불리고 있다. 시대는 급격히 변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당당하게 제도권에 머무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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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겸손, 겸손, 겸손 이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요?"

 

 

 

 

아침에 전철을 타고 오면서 작년 11월말 한겨레 대담기사로 '송건호언론상에 강준만 교수를 선정한 이유'를 읽었다. 언젠가 프린트한 걸 가방에 계속 넣고만 다니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사실은 바삐 전철에 오르느라 매점에서 조간신문을 살 시간이 없었다) 읽은 것인데, 거의 두달 전 기사이지만 '시사적인' 내용이므로 귀가하기 전에 인용/정리해두려 한다. 이런 기사도 저작권 보호를 받는 것이므로 전문을 퍼오진 않고 부분 인용/발췌를 하면서(사실 이런 '인용'을 가장 잘,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강준만 교수이다) 드문드문 몇 마디 덧붙이고 하겠다. 대담은 '강준만 입문'으로서 아주 유용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16년 동안 122권의 책을 낸 '우리시대의 볼테르'에 대해서 이번에 처음 상이 주어졌다면 과소한 듯도 한데, 이 기회에 '강준만의 시대'를 잠시 돌이켜보고 싶다(나는 강준만을 지지하지 않을 때라도 그의 작업만은 적극 지지한다). 비록 내가 적격자는 아니더라도.

나는 단행본으로 나온 그의 책을 한두 권 정도밖에 갖고 있지 않으며 다만 "성역과 금기에 도전한다"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인물과 사상>만은 여러 권 사서 읽은 적이 있다. 그 자신은 '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고 하지만, 내가 안티-조선에 동참하게 된 건 순전히 그의 '운동'  덕분이었다. 더불어, 아마도 그와 '인물과 사상'의 주도적인 문제제기에 따라 '문학권력'과 '주례사비평'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읽어보기도 했다. 여러 모로 도움을 받은 셈이다. 이건 겸손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제목으로 붙인 "겸손, 겸손, 겸손 이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요?"는 그의 수상소감문이며, 나는 과중한 겸손을 오히려 경계하는 사람이기에. 기사/대담의 중반으로 건너뛰겠다(기자와 강교수의 주거니받거니이다).

 

 

 

 

-언론학자로서도 훌륭하지만, 사회과학자, 정치평론가, 행동가로서도 폭넓게 활동했는데, 스스로를 언론인으로 생각하나?

=언론인까지야. 대중적 글쓰기하는 언론학자지. 나를 언론인라고 하면 과찬이고, 전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물론 언론인 역할 하면 좋겠지.(*언론학자 강준만의 대표작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10년쯤 전에 보던 책들은 <언론플레이>나 <대중문화의 겉과 속> 같은 책들이었다. 과조교 시절이었는데, 과방에는 언론고시생들이 읽던 책들이 나뒹굴고는 했고 '강준만'도 그런 책들에 속했다. 고시에 뜻이 없었던 나는 그냥 훑어보는 걸로 충분했다.)   

-안티조선의 주요 활동가였는데 최근 언론상황에 대해서는 별로 발언하지 않는 것 같다. 최근 한 글에서 조중동의 문제에 대해서는 성실함을 줄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조중동에 대한 생각은 같은데, 싸운 뒤에 이유를 생각해봤다. 내 생각은 국민이 호응을 안했는데, 그것은 강고한 ‘정치·경제 분리주의’ 때문이다(*나로선 적극 '호응'했지만, 원래 조선일보의 독자가 아니었으므로 실상 안티-조선일보 운동에 내가 보태준 건 별로 없다. 나는 주로 한겨레와 한국일보를 본다. 보다 정확하게는 김훈과 고종석의 독자였다. 두 지면의 사설들에 동의하는 건 아니므로. 강준만 교수는 요즘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기도 하다. 어쨌거나 언론학자 강준만은 한국사회에 조선일보의 해악을 폭로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맘때쯤 나는 강준만이란 이름과 다시 만났고, <인물과 사상>의 비주류 독자가 됐다. 매번 사읽은 건 아니었으니까).

 

 

 

 

유권자로서는 민주세력 찍지만, 신문은 안 바꾼다는 것이다. 어떤 민주 인사가 공직 들어서면 재산 공개했는데, 왜 돈이 그렇게 많은가(*다른 말로 하면, 좌파는 부유해도 되는가, 이다. 이건 일종의 '수행적 모순'이다. 기사가 달린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닌다는 일부 노조위원장들의 사례도 마찬가지이다. 네그리의 말대로, 혁명의 원천은 '가난'이고 '빈곤'이다. 결코 '의식'이 아니다. '부자 아빠'에의 유혹과 '자발적 가난' 사이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정치와 경제를 분리한다는 것을 감안한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또 주류 영합주의가 강하다. 내 삶의 경쟁력에 대한 판단이 정치적 선택과 다르다. 주류 매체고 영향력 있다는 그 판단이 크다. 이것이 가장 세고 주류라는 것이 한국인 특유의 경쟁력주의를 부추긴다. 기러기 아빠가 일반 국민뿐 아니라, 개혁·진보 인사에서도 있다. 진정성 갖고 운동해도 신문 안 바꿨다.

이제 경제를 치고 들어가야 한다. 이재현씨가 어느 글에서 “진보적 진영에서 문화운동하고 그러면서 경제를 중시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정확한 말이다. 경제는 감시 대상일 뿐이고 스스로 ‘경제 플레이어’라고 생각지 않는다. <한겨레>같은 언론도 재벌들로부터 독립해 신문사를 꾸려가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낸다는 것에 치중한다. 한국 경제를 더 높은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 총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일탈·비리만 다루지 주도적 플레이 안 한다. 그러면 영원히 조중동에게 깨진다. 엉거주춤하지 말고 분명히 해야 한다. 다수 국민이 어리석은 게 아니라, 경제적으로 보수적이다(*때문에, 아직도 국민의 '어리석음'이나 탓하는 이들을 나로선 신뢰할 수 없다).  

-최근의 신문법이 시행됐고,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신문발전위원회, 신문유통원이 활동에 들어갔다. 이런 기구들이 신문시장 정상화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여러 가지로 불만족스럽지만, 기대가 있다. 이런 기구들로 얼마나 달라질 것인가에는 의문이 있다. 왜냐면 한국 독자들이 가진 묘한 체질이 있기 때문이다. 김대중 광신도 노무현 광신도가 <조선일보>를 본다. 그런데 한국적 상황에서 합리주의다. 왜? 노가 개혁한다고 나서도 주변 핵심 인사들의 재산 규모가 역대 정권 비해 적지 않았다. 경제적인 문제는 보수고 진보고 다르지 않았다. 중요한 문제다. 사람들은 경제가 중심이고 가외로 개혁을 이야기한다.

진보적 입장의 정통 좌파들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해 신자유주의라고 싸잡아 비판한다. 한편으로 노 정부 요직 인사들도 자기 재산 다 챙기고, 국민들은 신문에서 아이들 논술과외 서비스도 받아야 하고, 부동산·증권 투자 정보도 얻어야 하고, 각종 광고도 봐야 한다. 그런 신문이 유리하다. 경제는 이렇게 간다.(*그러니까 생각도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비판'론'이 아니라 '현실'에서부터.) 앞서 안티조선 운동 하면서 모멸을 가하는 공격도 해봤다. 소용없었다. 북·서유럽 복지 국가 모델? 나 죽을 때까지 안 된다고 본다. 자원 없고 수출로 사는 나라를 어떻게 북유럽 나라들에 비할 것인가?

 

 

 

 

우리 나라 사람 경제적 보수성을 낮은 곳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택시 타보면 운전기사들이 결코 무식하지 않다. 물론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도 많지만, 지혜를 갖고 있다. 장하준 교수 글에 대해 여러 말 많지만, 그 정도 글을 갖고 이야기해야 한다. <한겨레>가 장하준 정도의 시각을 받아들인 것만 해도 대단하다(*그런 식으로 대단한 건 창비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을 아는 체하는 인문·사회학도들이 경제를 모른다. 경제에 대해 뭘 알아야 국민들 마음 속으로 치고 들어갈 수 있다.(*경제에 대한 무관심에서 나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건 대개 '실물경제'에 대한 무관심이고 갈브레이스의 <불확실성의 시대>에서부터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에 이르기까지 읽느라고는 읽었다. 가정경제에 도움이 안 됐을 뿐이다.) 

-<한겨레>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아직 창간 정신을 잊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볼 때 초심을 갖고 있는 게 문제다. 창간 당시는 기적이고 감동이었다. 독재정권에게 대항했던 이들이 자체 매체 가진 감격이었다. 지금은 민주적인 정권이 둘이나 나왔는데, <한겨레>가 비판을 넘어서서 의제를 스스로 만들고 끌어가지 못하고 있다. 과거 저항세력이 가졌던 견제·감시·비판 수준이다. 반면 조중동은 의제 설정을 멋대로 하지만 한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하고 독자들은 익숙해 있다.

국가보안법 처리 문제 때 경호권 발동 문제가 핵심이었다고 본다. 유시민 의원·리영희 선생도 경호권 발동 반대했고, 열린당 그것을 망설였다. 당시 <한겨레>는 때묻히지 않으려고 원론 수준으로만 얘기했는데, 너무 무책임한 것이다. <한겨레>가 경호권 발동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된다, 안 된다는 이야기 마당을 펼쳤어야 했다. 경호권 발동 안 된다는 리영희 선생 얘기도 싣고, 또 예외적으로 경호권 발동해서 보안법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다뤘어야 한다. 기사로 다룰 수 있고, 나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야 고민하는 사람들이 그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다. 유시민 의원은 다 끝나고 국회 사망선고하면 뭐하나? 한겨레가 썼으면 여야가 심각히 고려했을 것이다. <한겨레>는 고급지로서 어젠다에 대한 영향력이 있다. 전술·방식의 차이는 얼마든지 다룰 수 있다.

 

 

 

 

국가보안법 말고 다른 것에도 적극성이 없다. 진보세력의 문제점 안 다룬다. 조중동 따라서만 조금 다룬다. 그러다 보니 어젠다를 다 넘겨준다. 정권 주류가 비주류적으로 일관하듯 <한겨레>도 그런다. 나는 그걸 아웃사이더 체질이라고 본다. 아웃사이더는 고귀하다. 권력·부에 욕심 없고, 옳은 소리하고 저항하고 감시·견제한다. 그러나 인사이더는 집단을 어디론가 끌고가면서 궂은일, 더러운일 하는 것이다. 아웃사이더는 욕할 것 많지만, 인사이더는 어렵고 욕먹을 일이 많다. 이해가 상충하는 경우 인사이더는 책임져야 한다. 아웃사이더는 휘말리지 않고 옳고 아름다운 이야기만 한다. 메이저로서 아웃사이더 하면 좋겠지만, 조중동 70%가 인사이더 하는데, 마이너만 아웃사이더 한다? 결단이 필요하다.

정파성을 강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 비판도 더 하고, 개혁진보세력을 더 세게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의제를 만들어 가야 한다. 기사 쓸 때는 진보세력과의 유대도 끊어야 한다.(*2000년부터 격월로 간행되던 <아웃사이더>가 결국 폐간됐고, 나에겐 <다시 아웃사이더를 위하여>란 인터뷰집 두 권만이 남았다. 갖고 있는 책인 줄도 모르고 2,000원 떨이판매 하길래 또 산 것. 어쨌거나 '고귀한 아웃사이더'들이 많아지면 좋겠지만, 정의상 '아웃사이더'는 '소수'이며, 세상을 바꾸기엔 역부족이다. 해서, 보다 더 많아져야 할 것은 '인사이드 아웃사이더'가 아닐까 싶다. 자신도 이 진흙탕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의식 없이 목소리를 높이는 건 기만이다.)     

-최근 칼럼에서 신문산업이 지식산업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신문시장은 지금 조중동이 문제가 아니다. 조선·동아는 그래봐야 거대자본의 소유는 아니다. 그런데 앞으로 인터넷 언론 기업 성장하고 통신업체 중심으로 매체 융합 나타나면 엄청난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이를테면 한나라 집권하면 케이비에스2·엠비시 민영화 안 할 것 같나? 신문이 살아야 민주주의가 산다. 루퍼트 머독 식의 거대한 미디어그룹이 나오면 현재의 조중동보다 민주주의에 더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아무리 당파적이니 편파적이니 해도 신문이 살아남아야 한다. 살 방법은 지식인 전통을 살리는 것이다. 아직 기자에 대한 신화가 있다. 그것을 살려서 지식 산업쪽으로 힘을 펼쳐야 한다. 거대 기업들속에 편입되면 절대 안 된다. 비교 우위는 지식 산업인데, 신문업계 선두주자인 조중동은 정권 죽이기에 몰두하고 있으니 큰 일이다. 제 무덤을 파고 있다.

 

 

 

 

-엑스파일 사건으로 이건희·홍석현에 대한 수사가 진행중이다. 최근 책 <이건희 시대>에서 삼성의 문제에 대해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벼락공부하지 않으려면?

=한국 사회에 ‘홍수민주주의’가 있다. 지난 민주당 분당에 민주당의 책임만 있나? 삼성에 대해서도 그렇다. 문제가 있으면 평소에 원인을 찾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다. 평소에 잘못된 것을 잘 눈감아 주다가 건수 생기면 국민 모두 짱돌 하나씩 들고 나선다.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처리하는 홍수식이 화끈한 맛은 있다. 그런데 홍수 났을 때 사람들이 신중하게 하겠나. 우격다짐식이다. 아무리 우리 체질이어도 이제 와서 삼성만 죽일 놈이라고 하지 말고 우리도 공부해야 한다. 평소에 대학 총장들도 삼성 포함한 재벌 돈을 끌어와야 한다. 재벌 은전 받는 것이다. 삼성의 문제를 평소에 이야기하면 문제가 덜 할 텐데, 이벤트성이 강하다. 한 번 걸리면 홍수 맛좀 봐야 한다는 쏠림이 강하다.(*이 '홍수민주주의'에 대한 지적은 예리하며 유익하다. '한국의 민주주의' 교과서에 들어갈 만한 항목이다.) 

-이번 사건에서 보면 <중앙일보>는 또다른 삼성이자, 언론계의 실력자다.

=<중앙일보>가 조·동에 비해 개혁세력으로부터 덜 얻어맞는다. 유시민도 조·동은 독극물, <중앙>은 불량식품이라고 했던가? 남북문제에서 비교적 자본의 합리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조·동은 자본의 합리성도 없이 생래적 거부감으로 접근했다. 한국사회에서 민족문제 다루면서 자본의 위험이 가려졌는데, 사실은 운동권도 그렇지만 민족문제와 자본문제가 쌍벽이다. 중앙의 잘못이 제대로 부각이 안 되고 있다. 조·동이 중앙을 키운 셈이다. 아마 조동이 남북문제 시각 바꾸면 중앙 입지가 위축될 수 있겠다.

-인물과 사상의 중단과 인터넷 시대와 무슨 관계가 있나? 휴대전화도 쓰지 않는데?

=최근 <한겨레21>에 휴대전화 관련 글을 썼는데, 일종의 균형잡기 지적이었다. 휴대전화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 않다. 오히려 자본에 친화적이다. 새 기술에 대한 거부감은 자본주의를 보는 시각과 관련 있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고 대중문화 자체를 좋아한다. 딴따라 끼도 있다. 영화도 엄청 좋아한다.

 

 

 

 

-전북 전주에 살고 전북대 교수를 하고 있다. 지방이라는 것은 언론사도 그렇고 한국 사회의 또다른 문제라고 했는데?

=내부 식민지이론을 믿는다. 여기는 식민지 체제인데, 열이 나지 않는가? 서울서 국회의원하는 지방의 엘리트 계층이 여기 사람인가? 여기를 대변하는가? 여기 사는가? 아이들이 여기 있나? 다만 여기 근거로 제 입신양명하는 것이다. 이 신문 제목 좀 봐라. 지역 언론이 정말 이러면 안 된다. (전북 지역의 신문 두 개를 보이며) “노대통령 전북홀대 심각” “전북 홀대론 확산 분노” 언론은 이런 보도 좀 하지 말고, 중앙정부는 지역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이 지역 엘리트들이 이런 문제 생각하나? 인구가 계속 줄어든다. 60년대 250만명이 넘었는데, 최근 190만명선이 무너졌다. 내가 처음에 전북대 와서 지역 문제 갖고 혈압 좀 올렸다. 그런데 나만 성격 이상한 놈으로 찍혔다. 가만 보니 이 곳 사람들에게는 체념의 지혜가 있었다. 괜한 소리 했다가는 “억울하면 출세해라” “서울 못 가서 배 아파서 그러냐” 그런다. 최근에 지역 신문 발전기금 나눠주는 것도 그렇다. 지방 언론사 사주가 토호라고 해서 매우 엄격한 기준 적용해 특정 지역 언론이 집중 지원받았다. 그런데 토호와 재벌이 다른가? 재벌은 선진적이라서 좋고, 토호는 비리 복마전이라서 나쁜가? 재벌처럼 토호도 장단점이 있다. 그런데 지역기업이 잘 되면 악질로 본다. 그 시각의 이중성을 지적하고 싶다.

좋은 지역 신문은 경제력에 달렸다. 어느 지역에는 <한겨레>만한 매출을 올리는 신문사가 있고, 대부분 다른 지역에는 그런 신문사가 없다. 기업의 건전성은 경제력에 달렸다. 이렇게 기준 만들다 보니 지원이 일부 지역에 몰렸다. 사람도 같다. 빈곤층을 볼 때 게으르고 못난 사람이라고 봐야 하나. 구조적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양면을 봐야 한다. 지방을 썩어빠진 것으로만 보는데, 그렇지 않다. 이런 얘기하면 지방에 오래 있어 물들었다고 한다. 심지어 지방대 교수들도 지방언론사를 욕한다. 그리고 지방대에서 좋은 학생은 다 서울로 편입가고 교수도 서울로 떠난다. 지금은 무조건 서울에 있는 것이 경쟁력이다. 안면 몰수하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 지역안배는 안 된다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는 지역 안배가 지역 균형발전 정책이다.

-지역을 살리기 위해 균형발전 정책, 행정도시, 기업도시, 공기업 이전 추진중이다.

=노 정부가 요만큼 지역 균형발전 하는 기미 보이더니 수도권을 풀었다. 지방에 공기업 이전 계획 발표하고 수도권에 공장 신·증설 허용한 것은 지방에 어음주고 수도권에 현찰준 꼴이다. 균형발전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나?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지역 균형발전 정책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데 서울쪽은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신도시, 공장 신·증설 풀어줬다. 갑갑하다. 인구가 아무리 수도권에 몰려도 아직 지방이 다수다. 전북 국회의원들은 서울서 아이들 교육시키고 또 본국(?)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 지방은 묘한 이중 식민지 구조가 돼 있다. 이런 이야기하면 그러면 당신 애는 공부 잘 해도 지방대 보내겠냐고 말한다.

-서울대 문제 책도 쓰고 해법 제시했는데, 잘 바뀌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국공립대 통합안을 제시했는데?

=국공립대 통합은 정말 좋은 안인데, 민주노동당 집권해야 된다. 손호철 교수가 민주노동당 쓴소리 강연 갔다가 이래서는 집권 못한다고 호통쳤다고 한다. 진보진영 쓴소리 경청 했는데, 손 교수가 2010년대에 집권 못한다고 그랬다. <한겨레 21>하고 서울대 문제 갖고 토론도 했는데, 서울대 개혁 얘기하는 사람도 학벌에 대한 의견이 달랐다. 나는 정운찬 총장처럼 서울대와 연·고대 비중 축소해서 가자는 것이다. 명문 일류대도 경쟁의 필요성이 있다. 주요 권력기관 출신대를 봤더니 3개 대학이 50%를 먹어버리는데, 이것은 안 된다. 적어도 수십개 대학이 경쟁할 수 있는 체제는 돼야 한다. 그래야 대학에서 공부한다. 대학들이 공부하는 데 드는 돈 아끼려고 고교등급제를 하는 것이다. 또 고교 등급제보다 대학 등급제가 더 큰 문제다. 기업에서 원초적 차별 가하니 명문대 아닌 대학생들 공부할 맛이 안 난다. 노 대통령이 그런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사법고시 식으로 경쟁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시 덕에 노 대통령도 나온 것 아닌가?

 

 

 

 

-강 교수가 펴낸 책을 검색해보니 122권이었다. 왜 이렇게 많이 쓰는가?

=내가 창피해서 언제부터인가 권수를 세지 않는다. 나는 책을 작품으로 생각 안한다. 주위에서 심혈을 기울여서 역작을 내라고 하는데, 나는 아니다. 나는 책 내는 쪽으로는 디지털화돼 있고,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예전에 책이 귀할 때는 밟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책을 함부로 본다. 메모도 함부로 하고, 소모되는 것으로 본다. 물론 철학과 같은 분야는 다르다. 이론 분야는 작품이 나온다. 그렇지만 우리 신방과 쪽에서 작품이 나오겠나? 흐름이 빨리빨리 지나간다. 한 책을 오래 쓰다 보면 이미 낡은 것이 돼버린다. 내게 책 내는 데 불성실하다는 비판도 있다. 물론 공을 들일 수 있지만, 이 정도면 된다는 생각이다(*나는 다른 고종석, 김훈, 홍세화 등과 달리 강준만에게는 '문체'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 '문체없음'은 사실 그의 전략이기도 한 것. 더불어 '소모되는 것'을 자임하는 그의 미덕이기도 하다. 적어도 문체적으론 그는 나르시시즘으로부터 자유롭다.)   

내게 책 쓰는 것은 중독인 것 같고, 일종의 취미생활이다. 사명감 같은 게 없고, 누구는 내가 돈 때문에 많이 쓴다고 하지만, 오히려 거꾸로다. 자주 내는 것은 덜 팔려서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띄엄띄엄 내는 게 돈벌이로는 낫다. 나는 그냥 책 쓸 준비하고 책을 내는 게 취미다. 매우 재미있다. 요즘은 한국인의 특성을 범주화하는 책을 쓰고 있다. 이를테면 쏠림, 홍수민주주의, 소용돌이 현상, 빨리빨리. 냄비 근성 등 한국 상황을 보여주는 개념들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이 재미있다고 하는데, 내겐 책 쓰는 게 그 재미다.(*책을 읽고 쓰는 재미에 나도 공감한다. 책에 대한 구속 덕분에 나는 '온라인 게임'과 '드라마'로부터 자유롭다.) 

-그렇게 쓸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가 따로 있나?

=무작위로 책을 보다가 재미있는 내용이 나오면 입력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메모한다. 또 신문 보다가 사례가 나오면 오려놓는다. 그런 것들을 각 주제별로 파일에 입력한다. 지금도 이미 쓸 책들이 정리돼 있다. 자료 입력을 미리미리 했기 때문이다. 보통 10~20권씩 진행한다. 주제별로 입력해놓은 것이 20권 정도 분량이 된다.(*이런 류의 페이퍼도 아니고 단행본들을 20권씩 진행하다니! 그나저나 그런 식으로 책이 쏟아지면 우리는 '강준만의 시대'를 언제쯤 면하게 되나?)

06. 01.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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