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시대의 재구성 -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시대의 내밀한 이야기
존 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소소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1340년대 유럽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건 중 하나인, 훗날 ‘흑사병시대’라고 회상하게 만드는 페스트가 유럽을 강타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페스트가 어떻게 유럽을 강타했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또한 페스트가 유럽을 지배할 당시 유럽인들이 어떤 혼란을 겪었는지, 그 와중에 유대인이 학살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이가 있을까?

이럴 때는 돋보기가 필요하다. 거대한 역사의 장면을 세밀하게 관찰하게 해주는 도구가 필요한데 존 켈리가 <흑사병시대의 재구성>을 통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책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는 페스트가 어떻게 창궐했고, 어떤 경로로 이동했는지를 꼼꼼히 살피며 흑사병시대에 유럽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도록 미시적으로 그 시대를 ‘재구성’한 것이다.

그럼 저자가 어떻게 역사를 재구성했는지 책 속을 들여다보자. 저자는 페스트의 이동경로에 초점을 맞췄는데 첫걸음은 중세의 무역항인 카파에서 시작된다. 제노바인이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 카파는 한때 잘 나갔지만 무적이라고 불리던 몽골군과의 싸움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카파는 고립된 채 죽을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몽골군이 퇴각한다. 덕분에 카파의 주민들은 살 길을 찾게 된다. 그리하여 1347년 4월 혹은 5월, 해방된 주민들은 서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몽골군을 피해 구원의 도시를 찾아 떠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르고 있었다. 무적을 자랑하던 몽골군이 퇴각해야 할 정도로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인 페스트가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도망치던 제노바인들 때문에 유럽에 페스트가 상륙하게 되리라는 것을.

카파에서 도망치던 이들이 정확히 어느 도시에 상륙했는지는 모호하다. 몇몇 도시의 이름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인데, 중요한 건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이로 인해 유럽이 페스트의 사정거리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랬다. 도망치던 선박이 잠시 땅에 닿기만 해도 페스트는 놀랄 정도로 빠르게 그 지역을 ‘접수’해버렸다. 그 지역의 군대가 이상한 분위기에 당황스러워하며 불길한 선박을 쫓아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직후였다. 더욱이 이렇게 쫓겨난 선박들은 다른 도시에서 똑같은 일을 만들어냈고 그리하여 페스트는 곳곳에서 유럽을 관통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페스트가 기승을 부리기 전에 기근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던 유럽과 페스트의 종류 등을 살핀 뒤에 1347년 10월의 시칠리아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이때부터 도시와 시기에 따라서 페스트가 어떻게 유럽을 강타했는지를 세밀히 살피고 있는데 그 결과는 상상이상으로 끔찍하다. 페스트는 얼마나 위력적이었는가? 마을 인구 3분의 1이 죽었다는 보고가 평범하게 여겨질 정도로 페스트는 인간을 학살했다. 세계 2차 대전에 뒤이어 인류 역사상 두 번째로 큰 규모인 재앙이라고 할 정도니 그 참상이 오죽했겠는가.

페스트가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를 살펴보는 것과 더불어 <흑사병 시대의 재구성>에서 관심을 갖고 지켜볼 것은 페스트의 공격에 대한 인간들의 ‘다양한’ 반응이다. 반응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은 살기 위해 가족을 버리는 몰염치한 행동인데 저자는 당시 많은 도시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외면하고, 남편이 아내를 외면하는 일이 당연하게 일어났다고 알려주고 있다. 그나마 좀 나은 경우가 환자가 자는 사이에 도망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 상황이 오죽이나 끔찍했으랴.

두 번째 반응은 이런 와중에도 도리를 지키려고 했던 인간들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시체를 들판에 버리지 않고 장례식을 치러주는 일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니 거대한 질병 앞에서도 도리를 지킨 인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반응은 유대인 학살이다. 당시에 엉뚱하게도 페스트의 원인이 유대인이 우물에 독극물을 넣어서 발생한 것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는데 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어 하나의 진실처럼 여겨졌다.

흡사 관동대지진의 원인이 조선인들에게 있다고 주장한 일본인들처럼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책임을 물고 분풀이를 했던 것인데 유대인에게 책임을 무는 인간의 모습은 페스트만큼이나 잔혹한 것이었다. 그 외에 언제 죽을지 모르니 쾌락을 즐기자는 사람들이나 하느님께 용서를 비는 의미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하는 고행자들도 등장했는데 이들은 교회의 권위를 약화시키는데 한몫했다.

페스트를 쫓던 저자의 발걸음은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양지에 도달한다. 자연적으로 페스트가 끝났기 때문이다. 뒤에 계속해서 페스트가 창궐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은 만세를 지르며 거리로 뛰어나온다. 인구는 격감했고 로마의 시절처럼 텅텅 빈 건물들이 많아 유령의 도시 같은 곳이 많았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럽은 다시 살 궁리를 한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이처럼 <흑사병시대의 재구성>은 겉모양은 전염병을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중세 유럽의 솔직한 풍경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돋보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는 듯 기존의 문헌 자료를 토대로 성직자, 귀족, 평민 등 다양한 계층의 모습을 비교하는 것은 물론 페스트로 인한 벌어진 사회 현상들을 깊이 있게 다루고 있는데 이는 평시에는 볼 수 없는 유럽인의 과거이기에 <흑사병시대의 재구성>은 흔치 않은 만남을 제공하고 있다.

책 사이사이에 생생한 묘사가 풍부하다. 또한 뚜렷한 서사구조로 구성돼 있어 저자의 발걸음을 따라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소설 못지않게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할까. <흑사병시대의 재구성>, 미시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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