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현상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23
테야르 드 샤르댕 지음, 양명수 옮김 / 한길사 / 1997년 4월
평점 :
데카르트 이후 근대사상은 물질과 정신을 분리한 철학적 이원론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근대과학의 실험정신 역시 감각적으로 인식 가능한 관찰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정신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유물론에 경도되었다. 그러자 과학적 세계관이 주도한 근대문명은 유물론적 철학에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정신세계의 가치와 중요성을 상실한 유물론적 윤리로 역사와 사회를 오염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에 대한 반성이었을까?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과학은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등장하여 근대 물리학의 기초를 재구성하고, 철학 또한 정신과 물질을 하나로 엮어 세계를 유기체적으로 사유하려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앙리 베르그송, 사무엘 알렉산더, 로이드 모건, 알프레드 N. 화이트헤드가 등장한 것이다.
떼이야르 드 샤르댕(1881~1955)은 이러한 근대사상의 변곡점에서 태어나 종합적 사유를 체득한 과학자이자 신학자였다. 그는 가문의 전통을 따라 예수회에 가입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하였지만, 이집트에서는 물리학과 화학을 가르쳤다. 또한 신학수업을 마치고 30세가 되어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삶에서든 생각에서든 과거의 종교에 머물지 않았다. 고생물학적 관심을 갖고 화석을 연구하는 지질학 교수가 되어, 몽골과 중국, 인도와 자바에서 발굴탐사를 하면서도 ‘우주의 운행방식과 목적’에 관한 종교적인 사색을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로 구성된 발굴팀이 북경원인의 유골을 발견하여 과학자로서의 명망을 얻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학적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교회의 박해와 추방에 시달려야만 했다.
[인간현상]은 떼이야르의 사상이 무르익은 1938년(57세)부터 2년 동안 집필된 책이다. 철학적으로는 젊은 시절 깊은 영향을 받은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1905]의 목소리가, 과학적으로는 블라디미르 버나드스키의 “정신세계(noosphere)” 이론이 이 책에 녹아 들어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종교와 과학 양 진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진화론과 결합된 종교사상을 담고 있는 [인간현상]은 교황청의 서적 검열에 걸려 그가 죽고 나서야 출판되었고, 출판되고 나서도 과학계로부터 “형이상학적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사는 동안 자기 시대를 맛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창조적인 사상은 얼마가지 않아 과학과 종교 진영 모두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신학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구성할 수 있는 사상적 무기를 얻게 되었다.
[인간현상]은 정신과 물질, 종교와 과학, 창조와 진화를 총체적으로 용해시킨 책이다. 유물론에 기초한 신다윈주의적 과학의 진화이론과 목적론에 근거한 정통 기독교신학의 창조론 사이의 대립구도를 깨뜨리고, 이 둘을 모두 수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실재를 구성하는 핵심요소를 정신(뜻과 얼)에서 찾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도입하고, 존재의 사실성만이 아니라 의미를 동시에 포착하려는 종합적 직관을 과학에 주문함으로써 만들어낸 길이다. 그러나 인간 “현상”은 우주의 운동에 대한 설명을 특정한 존재론에서 유추하는 방식에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따라 출현하고 있는 것들의 어떤 경험법칙”을 찾는 방식으로 독자의 동의를 구한다.
떼이야르는 진화를 생명에 국한시키지 않고, 물질 자체에 “생명을 향한 목적을 지닌 기초적인 정신”이 있다고 봤다. 지구를 구성한 무기물의 운동에 이미 진화의 시작이 있었고, 이 진화는 새로운 형질의 우연한 출현에 의해서가 아니라 “목적이 있는 정향진화(正向進化)”로서 일정한 방향을 지닌다는 주장이다. 어디서 어디로 가는가? 무기물(“이른 생명”)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반성적 의식인 “생각”으로, 생각에서 보다 큰 “다음 생명”인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서 우주사건은 펼쳐진다. 이것이 [인간현상]의 4부 구조를 구성하는 골격이다.
그렇다면 왜 진화를 “인간” 현상으로 이름 짓고, 그것을 통해서 우주사건의 특징을 대변하려 했을까? 떼이야르는 정신과 물질이 종합된 “우주의 바탕”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쇄가 인간이고, 인간에게서 우주 바탕의 변화가 가장 활발히 일어난다고 봤다. 이것은 근대 계몽주의를 독선으로 빠뜨린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와는 전혀 다르다. 떼이야르는 우주가 그 동안 진화해온 까닭이 “인간의 탄생”에 있다고 보고, 인간을 “생명 전체가 기울인 노력의 열매”요, 진화의 “첨탑”이요, “꽃봉오리”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 정체된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과 인류의 분투에 대한 촉구를 동시에 겨냥한 말이다.
떼이야르는 [인간현상]에서 상승하는 우주운동에 관한 필연적인 법칙이나 종교적인 낙관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우주의 진화가 이제 “진화 자체가 된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함으로써, 인류로 하여금 “다음 생명”인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아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 생명”을 다루는 4부는 과학적 논증보다는 종교적 비전으로, 논리적 연역보다는 직관적 지혜로 채워져 있다. 우주의 진화로 인해 등장한 반성적인 “생각”과 그것의 집단현실인 “얼누리(noosphere),” 이 현재 우주의 본바탕에 이미 활동하고 있는 “오메가 포인트”를 향한 사랑과 생명의 열정으로 “큰 사람”이 등장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떼이야르가 [인간현상]에서 우주진화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사유는 매우 거대하고 장엄하다. 그는 독자들로 하여금 과학을 읽으면서 종교를 연상하게 만든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를 튼튼하게 할 때 인류의 얼은 최고에 달하고 가장 활기찬 생명력을 띠게 될 것”이라는 그의 확신은 문명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인간현상]은 단지 고생물학적 관찰의 결과나 종교적 신념을 서술하지 않고, 인류의 참된 비상(飛上)을 호소한다. “주저하지 않고 (인류가 길러낸 생명과 평화의) 직관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 여기에 진화하는 우주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