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6
정이현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주인공 동백이는 옹산이라는 소도시에서 사내아이(필구)를 키우며 술집을 운영하는 미혼모다. 옹산에 자리 잡은 지 무려 6년 만에 동백이는 어쩔 수 없이 이웃 게장 집 여주인에게 아들을 잠시 맡아달라며 어렵사리 부탁한다. 쭈뼛거리는 동백이에게 게장 집 주인은 필구하고 내 아들하고 죽마고우라는 건 온 동네가 다 아는데 뭘 그리 어렵게 부탁하느냐며, 사람이 서로 엉기기도 하고 폐도 끼쳐야 정도 드는 법이라며 그간의 서운함을 토로한다. 급기야 마을에 떠도는 연쇄살인범으로부터 동백이를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며 평생 서울깍쟁이로 살아온 나는 대한민국 어딘가에 옹산이 있었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랐다.

반대로 이 책의 주인공인 세영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곳에 산다. 재건축 바람이 불고 있는 30년 된 아파트 단지에 사는 그녀는 개인 약국을 운영하며 중학생 딸아이를 키운다. 남편인 무원은 지방의 작은 호텔에서 전무로 일하며 서울에는 한 달에 한 번 올까 말까 하지만 세영은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바람 난 건 아닌지 궁금해하지도 걱정하지도 않는다.

뜻하지 않게 학교폭력위원회 부회장직을 맡은 세영은 얼마 전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 발생한 교내 폭력 건으로 가해 학생의 징계를 논의하는 위원회에 참석을 앞두고 있다. 문제는 세영이 그 가해 학생의 부모와 알고 지내온 사이라는 것. 변화를 귀찮아하고 주민과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살아온 세영에게 위원회 참석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만약 학폭위에 참석한다 해도 중요한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을 리 없었다. 기껏해야 미리 만들어진 의견에 거수로 찬반을 표현하는 정도겠지. 그러나 문제는 회의록이었다. 자신이 무심코 뱉는 한마디, 혹은 뱉지 않은 한마디는 회의록에 낱낱이 기록될 것이다. 그 말들은 독화살이 되어 어디로 날아갈지 몰랐다. 세영은 남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는 일은 손톱의 때만큼도 하고 싶지 않았다. (중략) 세영은 가해자 부모라는 자격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을 그들의 표정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중략) 슬그머니 피하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는 줄 알았다.

 

작가는 표준화된 도시에서 평화로움을 가장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소통이 무엇인지, 그리고 도리를 지키는 일과 오지랖을 부리는 일의 경계는 어디쯤인지 되묻는다. 개개인의 가치관과 개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그럴듯한 주장을 내세우며 실은 타인에 대한 나의 무관심을 합리화 해버리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자는 무언의 약속을 하고 남 일에는 적당히 눈감으며 폭력 아닌 폭력을 저지르는 우리를 정말 용서해도 되는 것일까.

내가 아는 정이현 작가의 작품이라곤 달콤한 나의 도시가 전부다. 그마저 드라마로 봤음을 고백한다. 하여 달콤한 초콜릿 같은 작품을 쓸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무심함과 무정함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자신을 지키기에만 급급한 등장인물의 심리와 행동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써 내려간 작가의 문장을 읽으며 나는 차갑게 얼어붙은 차창에 어깨를 기대고 있는 기분이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찬 기운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나처럼 동백꽃 필 무렵에 빠져 산 사람들은 하나 같이 옹산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정말 괜찮을까? 고작 드라마 속 가상의 도시를 그리워할 만큼 지독히 외로우면서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