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SNUP 동서양의 고전 10
조너선 스위프트 지음, 송낙헌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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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렸을 때만 해도 나는 가장 순수하고 선한 존재가 인간이라 믿었다. 그러나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인간은 순수하고 선한 존재라고 여겼던 나는 혼란스러웠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사람에게 실망했던 순간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한 번쯤은 인간 본성이 원래 그런가 하는 사색에도 잠겨보았을 것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나단 스위프트도 그러했던 순간이 있었던 듯하다. 소설에서 그는 인간을 휘늠() 보다도 못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 걸리버는 네 번째 항해에서 완벽하게 이성을 활용하여 모든 일을 처리하는 종족(휘늠)을 보며 배신, 탐욕, 사기와 같은 인간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낀다. 고국으로 돌아와서 아내가 꽉 껴안고 키스를 퍼부을 때, 걸리버는 기절하여 정신을 잃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역겨운 동물과 접촉하는 데에 익숙지 못하기 때문이다(347)’는 서술은 이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조나단 스위프트는 정말 인간을 혐오했던 걸까. 걸리버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가 소인국과 대인국의 여행소설이라고 알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 릴리펏(소인국)과 브롭딩낵(대인국)의 이야기는 원작 소설에서 내용의 절반(1부와 2)에 불과하다. 이 고전문학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3(라퓨타 여행기)4(휘늠의 나라 여행기)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한다.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4부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당대 영국의 정치상황과 사회를 풍자하며 인간내면과 본성을 고찰한다. 주인공 걸리버는 선상의사로서 바다를 항해하며 다양한 인간들을 만난다. 풍자소설답게 긴박하고 재미있게 여행담을 풀어내고 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걸리버의 묘사는 과감해졌다.

 

1부와 2부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릴리펏(소인국)과 브롭딩낵(대인국)에서의 이야기이다. 흥미롭게도 두 이야기는 서로 대칭되는 점이 많다. 걸리버는 릴리펏의 나라에서 황제의 신하로 있었는데, 블레프스큐라는 나라와 계란을 깨는 방식이 서로 달라 분쟁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는 저자가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종교분쟁을 풍자하고 있는 것으로 독자들이 이를 보며 사소하다고 느끼게 한다. 두 번째 항해에서 표류하게 된 섬은 브롭딩낵으로 그 곳에서 그는 난쟁이이자 거인들의 장난감이었다. 그가 자국에서의 정치상황과 분쟁의 역사를 왕에게 설명하자, 국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의 대부분을 여행으로 보냈으니, 너의 나라의 많은 악덕에 이제까지는 물들지 않았기를 바라고 싶다. 그러나 너의 이야기와, 내가 너에게서 애써 이끌어내고 짜낸 답으로부터 판단하건대, 너의 나라의 대부분의 인간은, 대자연이 이제까지 이 지구상에 기어다니도록 허락해준 작고 역겨운 벌레 중에서도 가장 고약한 족속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151)’

 

걸리버는 릴리펏에서 크고 강한 존재였지만 뒤집어보면 브롭딩낵에서 걸리버는 한 마리의 쥐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가장 연약한 존재였다. 릴리펏에서는 소인들의 분쟁이 보잘 것 없어 보였지만, 정작 고국에서의 분쟁,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은 브롭딩낵에서 보잘 것 없는것으로 치부되었다. 소설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편협한 시각’, 우리는 이것에 옭아 매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 저자는 이 부분에서 정치와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만, 나는 우리가 이성을 잃고 혼란에 빠지는 이유는 편협한 시각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읽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 <<걸리버 여행기>>가 고전문학으로서 지금까지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다.

 

세 차례의 항해에서, 걸리버는 크고 작은 시련을 겪는다. 이쯤 되면 그만둘 법한데 걸리버는 또 한 번의 항해에 선장으로 나선다. 이 세상을 보고 싶다는 나의 갈망은 여전히 강렬했다(177)’는 걸리버. 이 구절을 읽고 어쩌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바다 위를 항해하는 걸리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사람한테 시련을 받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실망하면서도 우리는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그것은 저서에서 주인공 걸리버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를 지배하는 고약한 운명(173)’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4부의 여행지, 휘늠의 나라에서 인간과 유사한 생김새를 갖고 있는 야후는 가장 더럽고 추악한 생김새로 묘사되고 있다.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말의 생김새와 유사한 휘늠이었으며 이들은 전적으로 이성의 지배를 받고 있어(319)’ 그들의 세계에는전쟁, 법률, 처벌과 같은 것들을 표현할 어구가 존재하지 않았다(289)’. 그리고 이 이성 발휘의 완전성은 걸리버가 인간을 혐오하게 된 시초가 된다.

 

그러나 저자는 완벽해 보이는 이 휘늠의 나라가 사실 완벽하지 않다는아이러니를 드러내고자 했다. 남성에 있어서는 건장함과, 여성에 있어서는 미모가 주로 존중된다. 그것은 애정 때문이 아니라 종족의 퇴화를 막기 위해서이다. (중략) 젊은 한 쌍이 만나서 결합하는 것은 오로지 부모와 친구들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일상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들은 이것을 이성적인 동물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하나의 행위라고 간주한다.(321)’는 서술은 감정없는 완벽한 이성의 발휘가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을 들게 한다.

 

휘늠의 나라에서 야후의 모습은 인간의 추악한 모습과 흡사했다. 이 책의 작가는, 네 번째 에피소드를 통해 독자들에게, 인간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이성을 잃어버렸을 때, 인간이 어떻게 될 수 있는지를. 동시에 감정이 없는 완전한 이성의 지배를 받는 것이 어떤 폐해를 낳는지 지적한다. 옮긴이는 이를 황량한 유토피아로 해설하고 있었다.

 

릴리펏에서 걸리버를 시기했던 자의 계략을 미리 그에게 전해주었던 정부 요인. 브롭딩낵에서 사랑과 애정으로 그를 보살폈던 유모 글림덜클릿치. 휘늠의 나라에서 걸리버가 고국으로 돌아올 때, 자신과 다른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은 다른 선원들로부터 걸리버를 보호해주었던 선장 페드로. 이들은 이성을 적절하게 발휘하면서도 따뜻한 감정이 느껴졌던 사람이었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인간을 혐오했다고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을 때,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뒤를 돌아보자. 당신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가 바로 뒤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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