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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 약자를 위한 예배와 저항의 책
이병학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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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서의 반열에 오르고만 책,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모든 성경이 그러하지만 특별히 더 난해한 까닭은 쓰여진 내용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동화책 같아서 마치 판타지 소설을 읽는 것처럼 보여서다. 요한이 쓴 편지라는데 앞부분만 조금 넘어가면 암어인지 은어인지 알 수 없는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책을 성경으로 읽어야하는지 의구심을 갖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기괴한 내용 덕분에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겟돈이나 종말의 때와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어왔기 때문이다. 영화, 소설, 종말론 등 굳이 교회가 아니더라도 관심만 있다면 금새 찾을 수 있다.

 

요한계시록이 이처럼 지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막상 성경을 자주 접하는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말씀이나 사도들의 가르침, 혹은 구약의 이야기처럼 삶이 담긴 일상의 채취를 찾아볼 수 없다 생각해 자주 존재를 잊어버리는 책이기도 하다.

 

 

- 약자를 위한 예배와 저항의 책, 요한계시록.

 

이 책은 요한계시록을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제목에서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은 약자를 위해 쓰였다.’ 이와 같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생각 외로 간단하다. 500쪽이 넘는 긴 분량을 자랑하지만, 필자는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을 두 단어로 줄일 수 있다고 본다. ‘저항’ 그리고 ‘현재’.

 

저자는 ‘현재 중심적’ 이라는 어구를 자주 사용한다. 계시록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한국교회와 한국 성도들은 계시록 대부분이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 상황을 예언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는 환상으로 덮인 그림책 같은 이 이야기를 현재의 관점으로 해석하도록 독자를 설득한다. 즉 요한계시록은 미래를 담은 책보다 현재의 이야기이며 더 나아가 정치 ․ 경제 ․ 윤리 ․ 종교의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약자들을 위해 쓰였다고 본다.

 

저자는 요한이 약자들이 겪는 모든 현재를 세밀한 눈으로 담아내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종말의 때, 다시 말해 세상의 끝에 대하여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의 기록에서 종말의 때란 폭력의 종말이며 곧 하나님의 구원이 마침내 이르렀음을 고하는 선포를 담아낸다고 해석한다. 소외당하는 약자의 현실을 다시 조명하여 종말론에 관한 이전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있는 셈이다.

 

또한 이 책은 ‘적극적인 무폭력 저항’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언급한다. 요한계시록은 교회가 보여줘야 할 덕목을 ‘사랑, 믿음, 섬김, 저항(계 2:19)’이라고 제시하고 있는데, 인내라는 단어에 저자는 집중한다. 저자에 따르면 요한은 그가 본 환상을 통해 로마제국이 설파하는 거짓된 평화에 교회가 물들지 않고 적극적 행동을, 곧 저항을 실천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 유대 묵시 문학, 요한계시록.

 

줄곧 언급해 왔듯, 요한이 미래가 아니라 현재(당시 로마제국)를 고발하고 그리스도인이 제국의 문화에 저항하도록 계시록을 썼다는 주장의 근거는 책 앞쪽, 자세한 서설로 대략 파악할 수 있다. 저자가 요한계시록을 유대묵시문학의 한 종류로 이해하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에는 유대묵시문학이 가지는 다양한 특징들이 고스란히 드러남을 여러 예시로 보여준다.

 

유대묵시문학이란 유대인의 역사관 ․ 세계관이 반영된 글의 한 종류인데 이러한 글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정의’라 부른다. 왜냐하면 이 문학들은 의롭게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의인들과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며 그들을 죽인 폭력의 역사를 마침내 종식시키실 거라는 믿음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구약에서 나타나는 유대묵시문학의 특징 또한 잡아낸다. 유대 문화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심코 지나치지 못할 정도로 요한계시록에 그려진 상당한 양의 비유와 환상이 구약에서 인용구 형식으로 차용되었음을 밝힌다.

 

이 발견을 따르면 요한은 ‘유대묵시문학’의 특징을 잘 알았기에 구약과 에녹1서에 등장하는 묵시문학적 수사를 계시록에 사용했다(그러기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서 한국인은 도움 없이 이 책을 올바르게 읽을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역으로 유대 배경을 가진, 1세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 출애굽기, 다니엘, 에스겔, 요엘, 욥기, 시편 등에서 등장하는 표현이 현실을 적절하게 풍자하거나 해석하는 편지 내용을 쉽게 파악했을 것이다.

 

 

- 약자들에게 위로를 준 책, 요한계시록.

 

요한계시록은 로마제국 중심의 모든 신화를 부정하며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예배할 때 사용하는 구원, 영광, 권능, 능력과 같은 익숙한 단어가 본래 당시 로마 황제가 자신을 신으로 칭하며 사용하던 용어라는 사실만으로도 요한이 정면으로 제국의 환상을 비판했음을 알 수 있다. 곧 요한은 이러한 참상을 예수께서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편지 수신자들에게 알리려 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예수는 요한을 통해 ‘폭력의 희생자인 예수’, 현재적 오심의 예수‘로 계시된다. 로마의 폭력으로 죽임당한 예수를 부활시키신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고백은 현실을 이길 위로였다. 그러니 이와 더불어, 당시 교회가 기억해야 할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의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약자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폭력과 죽음을 종말시키실 하나님이었을 것이다.

 

또한 유대전쟁을 겪었던 요한은 참혹한 전쟁의 참상을 알았기에 로마제국이 선전하는 평화가 얼마나 거짓되었는지를 알았을 거라고 얘기한다. 로마의 정치적 ․ 군사적 힘을 '짐승'으로 표현함으로써 식민지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 몰살시키는 제국의 잔인함을 폭로한다. '음녀'는 로마의 경제적 힘을 상징하며 로마를 살찌우기 위해 식민지를 약탈하고 약자들의 생명을 무시하는 불공정 독점무역을 고발한다.

 

 

- 성도들에게 소망을 상기시킨 책, 요한계시록.

 

저자는 요한이 이면에 숨겨진 로마의 잔인성과 우상숭배를 폭로할 뿐만 아니라 제국의 미디어에 대항하는 존재로서 부름 받은 교회에 관하여도 기록했다고 말한다. 당시 요한에게서 편지를 받은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는 로마제국의 문화에 동화될 위험에 처해있었는데 ‘니골라당, 뜨겁든지 차든지’ 라는 표현은 예수가 요한을 통해 제국의 문화에 동화되지 않고 교회가 깨어있기를 촉구하셨음을 보여주는 한 예다.

 

로마가 제공하는 시장의 논리를 따르려면 황제 숭배 문화에 참여해야만 했던 시대적 상황에서 교회는 실제로 죽음의 위험과 고통을 직면하며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매우 당연히 여겨졌을 당시의 문화에 타협하는 자들이 있었고, 반대로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가던 자들은 사회적 약자가 되어 경제적인 굶주림, 정치적 소외감을 경험해야만 했다.

 

당시 유대인 중에서는 자신들의 존속을 위해 로마제국의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무신론자'로 고발하기까지 했는데, 요한은 로마가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신적 수동태'로 표현한다. 즉 역사의 주인인 예수께서 권력 아래서 신음하는 삶들과 함께 계신다는 선포와 함께 성도들을 위로했다.

 

 

- 여전히 현재의 책, 요한계시록.

 

‘약자를 위한 예배와 저항의 책, 요한계시록’, 이 책은 한 장(chapter)이 끝날 때마다 요한계시록의 의도대로 현재를 바라보도록 실제 예를 제시한다. 여전히 다소 민감한 세월호, 노동운동, 5․18 민주화 항쟁과 같은 문제부터 6․25, 3․1운동과 같은 가까운 시대까지 여전히 언제나 약자들이 존재하고 존재했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교회인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묻기도 한다.

 

특별히 저자는 신자유주의 체제인 현 자본주의 시장이 또다른 제국주의의 발현이라 주장한다. 새롭게 나타난 제국주의가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현실을 외면하는 교회를 비판한다. 약자를 착취하고 생명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황은 로마제국 사회에서만이 아니며 지금도 나타나고 있다고 본다.

 

 

- 기억의 책, 요한계시록.

 

저자에 의하면 요한계시록은 교회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제국의 문화에서 지속적으로 벗어나야 하는 주체, 즉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옷 입은 주체로 깨어있는 일을 중요한 부르심으로 본다. 요한은 정의를 위해 죽은 자, 곧 순교자들을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천년왕국’에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이 각성을 지속시킬거라고 보았다.

 

죽음을 권세로 약자들을 위협하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제국의 문화에 저항했던 그들의 믿음과 저항을 기억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살아 하나님과 함께있기 때문이라고 요한은 생각했다. 그들과 함께 '기억연대공동체'를 형성하고 그들을 기억하는 일은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며 억압받는 현실을 이겨내는 의지를 만들어낸다고 본 것이다.

 

 

- 폭력의 종말을 그린 책, 요한계시록.

 

요한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는 생명을 시장의 논리가 아니라 선물이라고 선포한다. 약자들의 생명을 갉아먹는 착취적 경제 대신 모든 사람을 위한 경제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고백이다. 몇몇 사람만 들리는 휴거가 아니라 새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오는' 이유이다.

 

요한계시록이 증거하는 유일한 미래종말의 사건, 하나님께서 결국엔 친히 이 땅으로 내려오신다. 그곳에서는 ‘돈이 없는 자’도 마음껏 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으며, 그 잎사귀로 치료를 받을 수 있음은 하나님이 마침내 이루실 구원의 완성이 어디에서 끝마쳐질지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 라는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예수께서 승천하시며 제자들을 떠나기 전에 하신 약속. '내가 너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겠다‘ 번복되지 않는 말씀이 지금도 우리에게 유효하다면 요한계시록에 담긴 폭로와 저항, 약자를 향한 그리스도의 약속, 또한 폭력의 종말로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실 하나님의 약속 또한 유효하다.

 

 

- 성령의 말씀을 듣는 교회의 책, 요한계시록.

 

한국교회는 성경을, 그 중 유독 요한계시록을 지나친 신비주의와 문자주의로 해석한다. 이러한 해석은 신학적으로도 빈약하고 현실을 해석하고 품어내는 면에서도 부족하다. 그러기에 교회는 사회적 약자들, 정치적 ․ 경제적인 문제로 생명의 절벽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

 

요한계시록은 어린 양과 결혼할 신부를 '새 예루살렘'이라고 소개한다. 교회가 신부가 아니다. 교회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을 자들이다. 결국 새 예루살렘을 준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분이 역사와 구원을 완성하시는 '알파와 오메가'다.

 

교회는, 폭력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으시고 약자들의 눈물을 영원히 닦으시는 예수께서 어서 오시기를, ‘이 땅’에서 바라며 기다리는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니 교회는 새 예루살렘과 함께 도래할 하나님의 통치를 증언하고 이 땅을 위로하는 ‘저항’의 공동체가 되야한다고 요한계시록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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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 고대 중동의 삶, 역사, 문화를 통해 본 복음서
케네스 E. 베일리 지음, 박규태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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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간단한 소개] 

이 책의 제목을 처음 접하는 사람은 분명 이 책이 새로운 관점을 소개해줄 거라 생각할 것이다. 당연히 우리가 놓치고 있던 관점을 새롭게 제시해줄 거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책들이 그러하듯이 예상하던 그런 책은 아니다. 단순히 새로운 성경해석과 해석론을 나열한 책이라기보다 설명문이나 이야기책에 가깝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이 책을 쓴 저자에 따르면 성경은 문학적 수사가 담긴 한 편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분명 성경은 역사성을 갖춘 기록물이지만 저자의 의도와 성경이 쓰인 문화적 한계 내에서 편집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러니 이러한 성경의 특성을 저자가 충실히 반영하려 했다면 분명 잘 쓰인 책임이 틀림없다. 

간단히 말하면이 책은 중동의 예수를 보도록 독자를 이끈다. 조금 더 신중히 표현하자면, 2000년 전의 중동을 조심스레 그려낸다. 따라서 '중동의 눈'이란 2000년 전 성육신하신 예수를 보는 '2000년 전의 눈'이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순간부터 죽으시기 전까지의 내러티브가 모두 중동이라는 무대 위에 있다는 사실을 저자가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주다보니, 책을 덮을 때즘엔 '중동의 반쯤 잠긴 눈' 정도는 뜬 것 같은 뿌듯함이 든다. 하지만 '반쯤 졸린 눈'이 되어서 중동의 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위험성을 발휘해 만약 '지금의 중동의 눈'으로라도 예수를 본다면 아주 심각한 왜곡을 허용하게 될 것이다. 만약 필자와 같이 신학에 전문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저자의 눈만 충실히 따라가도 충분할 거라 생각한다. 


[책의 특징] 

말에는 뉘앙스가 있고 글에는 문맥이 있고 대화에는 상황이 있듯이 저자는 성경을 특별히, 예수의 탄생부터 그의 행적이 담긴 사복음서를 재탐사한다. 우선 전문가들이나 알 법한 글에 나타난 특징들, 대표적으로 수사적 장치에 저작의도가 드러나고 있다는 전제를 제시하며 독자를 익숙치 않은 중동의 세계로 친절하게 이끈다. 그리고 현지에서 오래 살아 온 사람만이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는 단어와 상황에 주목하면서 중동인이었던 예수의 말과 행동의 의도를 신빙성 있게 풀어내준다. 

어려울 수도 있는 신학적, 윤리적인 부분까지도 이야기처럼 풀어가는 저자의 능력 덕분에 가독성이 높은 책임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새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600면을 훌쩍 넘는 분량의 책을 읽기란 여간 피로한게 아니다. 그럼에도 책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의지가 단순한 지적 호기심을 넘어 '예수가 진정 누구이신가'라는 갈급한 질문으로 발현됨을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포기하지 않고 읽은 독자들은 먼저, 자신의 눈이 어두웠음을 알게 되고, 두 번째로 그 이유가 의심의 안개가 아니라 모호의 구름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쉬움과 고민] 

읽으면서 아쉬웠다. 신학적 배경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 접하는 성경의 장면을 새롭게 조명하는 저자의 시도가 더 다채롭고 분명하게 다가올 수도 있을거라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러기에 목회 현장에 있는 분들에게 추천해드리고 싶다. 성도들보다 더 민감하게 책의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 '훈련된 눈'이 본다면 더 많은 보물을 캐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결국 모든 성도들에게 읽힐만한 책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밭에 감추인 보화를 캐낼 만한 용기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책을 읽는 도중에 성경을 천천히 정독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를 성급히 읽어내기 전에 다시 '예수의 눈'으로 그 시절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고 왜 1세기의 문화를 읽어내려고 시도하지 않았는지 절로 고개가 저어지며 고민을 하게 된다. 어느정도 성숙해진 사람은 관계를 이어갈 때 상대방이 살아 온 배경을 살펴보려 하고 책을 볼 땐 쓰인 배경을 찾아보곤 한다. 그러나 성경에 관하여는 개인적인 독서습관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장점] 

기존의 생각을 뒤엎는 관점만이 아니라 기존의 신앙을 보강해주는 더 선명한 관점을 제시해준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다. 우리가 신앙체계 내에서 이미 어느정도 받아들인 진리가 저자가 그려낸 시대적 맥락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다가온다. 만약 온전히 새로운 답을 찾으려고 책을 열었다면 실망할 것이다. 진리는 변하지 않고 그곳에서 빛나고 있고 도리어 구름이 걷힌 하늘의 태양처럼 더 분명하게 빛을 발한다. 저자의 주장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성경의 주장들에 다시금 설득당하고 설복당하는 경험을 할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또한 분명한 한 가지는 저자가 말했듯, 이 책이 제시한 성경해석이 아무리 개연성이 있다한들 잠시 동안만 최종성을 가진다고 본다. 다시 말해 언제나 예수님의 뜻을 따르려 애쓰는 과정이 우리 삶을 관통해야하고 그 과정 중에 성경해석을 늘 바로잡고 고치려는 고민이 존재해야 함을 이 책은 기억하게 한다. 우리의 삶이 여기가 끝이 아님을, 여전히 거울을 보는듯 하지만 예수께서 보이신 성육신과 대속을 풍성히 풀어내는 저자를 통해 예수께서 말씀하신 약속들을 다시 고대하게 한다. 결국 익숙한 것들 사이에 예상치 못한 빛을 발하는 보석들을 발견한다. 보석을 찾아내려면 바닥에 엎드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저자는 무심코 내비치는 듯 하다. 저자가 풀어내는, 끊임없이 흐르는 신약성경의 이야기가 잊혀졌던 소망의 빛이 다시 비취도록 돕는다. 


[추측해 본 저자의 의도] 

'중동의 눈으로 예수를 본다' 에 담긴 의미는 우리가 그 분을 찾으러 간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음을 기억하자는 제안이다. 즉 우리의 처지와 생각에 맞추어 예수의 말씀을 간단히 이해하고 쉽게 적용하려는 관행에서 벗어나자는 요청이다. 저자는 '예수'께서 우리의 처지와 생각에 맞추어 말씀하셨음을 일깨워 도리어 우리에게 예수를 맞추어내는 해석과 우리에게 맞추시는 사랑을 구분하도록 돕고 있다. 이는 '살아계셨던' 예수가 아니라 우리와 '사셨던' 예수를 보게한다. 

역으로 '현대'의 눈으로 보면 전혀 이상하지 않을 부분을 과거의 눈으로 봄으로써 놀라운 통찰을 얻는다. 우리가 예수께서 전파하신 사상과 가르침에 모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본다. 예를 들어, 지금은 너무 당연한 인권의 문제를 오래 전의 기록물이 다루고 있다면 읽기에 당연히 느껴진다. 그래서 이전에는 읽으면서도 쉽게 넘기거나 따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께서 보이신 삶에 놀라워하며 오히려 우리가 더 얻을 무언가가 없는지, 우리가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진 않은지 스스로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이것이 타당한 태도이고 겸손이다. 한 걸음 더,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고, 정말 중요한 것이 메 앞에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시는 예수를 본다. 성경의 텍스트에서 인간적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신 그 분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하다. 저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 분이 역사적 존재로 그리고 실존하는 문제를 다루시는 분으로 다가온다. 


[책이 그려낸 예수의 모습] 

더 놀라운 사실은 인간을 대하시는 그 분의 태도이다. 한결 같이 사복음서의 모든 곳에서 낮은 자를 높이시고 억압에서 건지시고 모든 이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성육신하여 오신 하나님, 곧 예수께서는 인간의 삶으로 들어와 우리가 삶을 다른 자세로 바라보고 살아야함을 직접 보이시며 제시하신다. 그렇게 그 분은 자신의 성품이신 정의와 긍휼을 보이시며 '참 스승이자 참 인간이시고 참 하나님이시다' 라는 고백을 받아내신다. 스스로 구원할 자가 없다는 진리를 따뜻한 눈길에 담아 전하시는 예수의 너그러움을 마주하자 놀랍게도 구원을 받은 기쁨과 나를 구하신 구원자 앞에 다시 서 있는 경외가 필자를 덮었다. 

다시 읽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게 하는 두께의 책이나 짧지 않은 시간동안 접한 책의 내용을 떠올리면 두고두고 보며 익히고 싶은 책이다. 비록 필자의 배경적 한계 때문에 전문적 지식을 근거 삼아 책의 주제를 다 기억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예수께서 '성육신'과 '대속'으로 보이신 '긍휼을 베푸는 정의'와 '자기비움으로 드러낸 은혜'의 신학은 앞으로 이어갈 삶을 이끌어 갈 충분한 지표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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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 신학자 칼 바르트와 1906-1968의 정치
프랑크 옐레 지음, 이용주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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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100년도 채 지나가지 않은 인류의 어두운 사건들 한복판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토대로 깨어 있는 동시대성`을 가졌던 신학자, 칼 바르트에 관한 연대기를 담아낸 책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정치, 정치의 종교적 절대화를 끊임없이 반대하던 반 세기 전의 신학자의 유산이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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