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러 삶의 의미
알프레드 아들러 지음, 최호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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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러의 사상을 네 가지 단어로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열등, 극복, 우월, 공동체

다시 말해 아들러는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누었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실로 보지 않고 자신만의 해석으로 본다. 그것은 각자가 가진 열등한 신체 기관과, 자신이 처한 열등감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그 해석을 뛰어넘으려면 공동체에 속함이 필요하다. 즉 열등감을 완화시켜내고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이 공동체라는 말이다.

갑작스레 열등에서 공동체로 뛰긴 했지만 아들러가 주장하는 바는 이와 같이 명약관화하다. 결국은 열등을 극복하는 기제는 공동체에 속하고, 공동체를 이롭게 하려는 어떠한 추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남들보다 비교적 열등한 부분을 가질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에게는 공동체를 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는 우월의 추구와도 맞닿아 있는데, 이것 또한 공동체성에 근거하고 있다. 우월이 남들보다 높아지거나 타인을 짓밟는 행동을 한다거나 지위를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아들러는 역설한다. 그는 철저하게 공동체성에 기반하여 자신의 개인심리학을 펼쳐나간다.

이는 매우 형이상학적이기도 한데, 그는 그것을 별로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형이상학으로 수렴되지 않는 과학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잠재적 비판자의 입을 막으려 한다. 물론 필자는 이러한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진 않지만, 일견 일리가 있다고 본다. 과학이 밝혀낸 어떠한 사실은 반드시 사람의 해석을 따라 살아 움직여 어떠한 세계관을 주창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분이 있다면 아들러를 잘못 해석했다고 말해드리고 싶다. 아들러가 공동체를 강조한 이유는 인간이 홀로 살 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즉 여기서 공동체는 하나의 몸으로 움직이는 유기적인 전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타인을 말한 것이다.

타인의 필요성을 주장한 아들러, 곧 해체될 수 없는 개인은 해체될 수 없는 또 다른 개인이 필요하다 말한 그는 한 인간을 공동체에서 읽어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매우 신선한 시도이며, 낯선 접근 방법이다. 개인을 독립된, 홀로 있는 존재로 보지 않고 그에게 걸쳐 있는 수많은 공동체의 그물망과 배경을 확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은, 탈개인화 사회를 겪는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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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 - 신앙과 과학의 통합을 추구한 우리 시대 기독 지성 25인의 여정
리처드 J. 마우 외 지음, 캐서린 애플게이트 외 엮음, 안시열 옮김 / IVP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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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홀로 남곤 했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구도에서 어디에서 속하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분자생물학을 전공하던 나로서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게 이율배반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스스로의 자괴감과는 달리, 학교나 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구도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결정해야만 했다. 아니, 언젠가는 결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의 배움을 포기할 것인지, 창세기를 다 뒤엎어야만 할 것인지 말이다.

 

아마도 나는 배움을 포기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세포생물학, 생화학, 세포생물학, 유전학, 생리학으로 이어지는 대학의 과목들 중에서 유일하게 듣지 않았던 과목이 진화학이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남겨진 마지막 양심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가득 채운 생물 종들이 진화라는 방법으로 창조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었나 보다. 하지만 이미 나는 진화를 방법이라는 도구로 여기고 창조를 세상의 시작으로 보았던 것처럼 어느 정도 유신 진화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인간의 지위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모든 종보다 특별하다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특별하게 지음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물론 지금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진화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인간의 존재를 격하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인간이 여타의 모든 종을 다스릴정도로 뛰어난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명확히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나의 한계다. 사실 나는 인간이 다른 종에 비해 월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종에 비해 뛰어난 부분이 있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고민들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로 있으면서 수많은 질문을 마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난 아직 알지 못한다는, 결정을 유보하는 상태로 남아있지 못했다. 오히려 분자생물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배경을 무기 삼아, 학생들에게는 기존의 창조론을 옹호하는 투사로 든든하게 남아있는 게 더 나를 지키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러한 투사의 위치가 나를 빛나게 만들어주었다는 뜻이다. 누구보다 내가 성서를 올바로 해석하고 있다는 교만에 빠져있도록 만들었다. 수많은 변증학 책들을 읽으며 나 자신을 무장해갔다. 창조과학 책을 읽으면서 무신론에 대항하려고도 해보았다. 신은 인간의 상상이고 종교는 인간의 발명이라는 그들의 기치를 밟으라고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창조과학이 보여주는 과학이 아닌 모습, 조악한 논리에 조금은 실망하고 있었다. 그것으로는 무신론에 대항할 수 없어 보였다.

 

사실 난 쌓여만 가는 고민 더미에 묻혀 옴짝달싹 못하는 중이었다. 생물학이 전해주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집단의 환경 적응과 종의 다양성을 설파하는 진화론의 설명이 아름답다고 여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신은 왜 나의 삶에 이러한 시련을 주시는가, 수 만 번 질문했던 것 같다. 왜 나를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하셔서 어느 것도 부정할 수 없게 만드시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신론을 택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것이 단서였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너무 오랜 일이 지난 이후였다. 2014년 그분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분은 어디 계시는가.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신다는 분이 어쩌다 죄 없는 어린 학생들의 수많은 목숨이 꺼져가는 사건을 지켜만 보셨는가. 나는 그때쯤 교회를 나왔다. 사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에서 나를 홀로 남겨두었던 그들이 신의 부재 사건에 대해서도 침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무신론까지 떨어졌던 것 같다. 신은 계시지 않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경험했던 영적인 체험들과 기도의 결과는 뇌의 장난이었고 우연의 일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나님을 등지고 내가 바라는 정의를 찾으러 세상에 뛰어들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본디 조용히 살던 이가, 타자와 상호작용하기를 피곤해하던 이가 갑자기 세상과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나는 이내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그것이 당연히 귀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케노시스 창조이론>이라는 책을 나는 어느 날 마주한다. 신이 자신을 비우시는 행위가 창조라는 사건이며, 그것(신의 자기 비움)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웠음은 지금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새로운 심상을 나에게 제공해주었다. 신이 세상을 자신의 품 안에 끌어안고 계시는 형상, 세상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는 자명한 가능성, 이것을 알고도 그분은 그분의 성품을 따라 세상을 만들었다는 사실 말이다.

 

케노시스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나는 그제야 제 삼의 길을 깨닫는다. 창조와 진화 모두가 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월호 참사와 함께 우시는 신을 발견하며, 잔혹해 보이는 진화의 과정에도 함께하시는 신을 발견했다. 신은 자신 안에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시며 그것의 과정, 곧 고통을 감내하시기로 작정하신 듯 보였다.

 

이내 나는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에서 한 저자가 말하였던 나의 성경이 실은 나의 성경 해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창세기 1장이 세상이 어떻게 지음 받았는지, 와 기원을 설명해주는 장이 아니라 세상이 왜 지음 받았는지, 와 기능을 설명하는 거라면 나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족이지만, 나는 여전히 생물학도로서 그리고 지금은 심리학을 전공하는 석사생으로서 여러 해결하지 못한 고민을 여러 곳에 남겼다. <뇌의 장난, 우연의 일치><영적인 체험, 신의 섭리>라는 두 영역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어려워한다. 그러나 진화와 창조가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는 발견처럼, 또 다른 설명이 우연히 섭리처럼찾아올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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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유인원
나이절 섀드볼트.로저 햄프슨 지음, 김명주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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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독자에게 처음 안겨주는 놀라운 사실은 이렇다. 털이 없는, 소위 벌거벗은 종인 호모 사피엔스는 언어를 획득하기 이전에 도구를 사용했다는 정보 말이다. 무엇보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 외부의 물건으로 지구 전체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겐 어찌 보면 익숙한 일상일 수 있다. 그러나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의 변화에 반응하는 수많은 종들과는 달리, 자연을 변화시키고 인공물의 세계를 만들고 진화라는 것에 직접 참여한다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매우 낯설게 느낄 것이다.


우리, 즉 호모 사피엔스는 도구를 사용하기 위한 뇌와 엄지손가락, 즉 외부의 물건을 조작하는 능력을 다른 종과 달리 발달시켰다. 다른 종과 달리 생존을 아주 특이한 곳에 걸었다. 때문에 생긴 선순환은 매우 강력해졌다. 영리한 뇌를 사용함으로써 먹고 남을 만한 식량을 얻었고, 남은 에너지로 더 많은 에너지를 원하는 더 영리한 뇌를 발달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뇌의 발달로 인간은 생물학을 포함하고, 넘어서 사회학을 발전시켰다. 선순환이 하나 더 생긴 셈이다. 사회적 협력의 탄생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사는 지리적 공간은 더욱 복잡하게 변화했고, 이 두 개의 선순환이 인간이라는 종을 현재의 모습까지 진화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진화의 측면에서 보든, 사회학적 면에서 보든 '도구'는 인류의 발전에 있어 매우 놀라운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다. 사실 공생관계나 공진화라는 말을 쓰려면 생물 개체의 모임 간의 이야기여야 하지만, 인류가 만들어낸 도구, 특별히 그중에서 '디지털 도구'는 우리의 삶을 다시 재편할 정도로 '살아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이것은 생명력의 정의 혹은 자기의식을 가진 인공지능이냐, 라는 철학적 논쟁을 부르는 주문이 아니다. 단지 그만큼의 파급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필자가 강조하고 함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류는 자신의 생명력을 마치 마법사처럼 주변의 도구에 부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이 주장하는 바, 곧 '도구가 우리를 발명했다'는 주장이 그리 과장된 것은 아니다. 이 책 <디지털 유인원>은 다른 어떤 요인보다, 인류의 진화에 있어 도구의 역할과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이는 필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4차 산업 혁명과 맞닿아 있는 주장일 것이다. 점점 복잡해져 가는 도구와 인간과 인간 혹은 인간과 사물을 잇는 도구 망들이 사피엔스의 손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저자들이 주먹도끼에서 느낀 기시감을 그리 복잡한 직관력을 발휘하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디지털 유인원>은 또한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생물학이 전달하는 유전 정보보다 훨씬 많은 규칙과 정보를 문화 속에 넣어두는 능력이 사피엔스에겐 있기 때문이다. 학습된, 도구로 개척하거나 만들어 낸 인공물, 그것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는 사회체제 같은 것이든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수도 없는 정보와 규율을 학습하게 된다. 놀라운 사실은 그 문화조차 인류가 발명한 도구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명한 현실이다. 이러한 시간을 따라 일어나는 대규모 정보 축적 사건들은 인류를 변화시키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당당히 이렇게 선포한다. '우리는 진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고, 몇몇 분야에서는 명백히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제는 도구라고 부르기 민망한 기계 혹은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저자들은 그것에 그리 호들갑 떨지 않는다. 인간은 여전히 기계보다 잘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는 그들을 - 그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만들 수 있는 지능이 있으며, 둘째로는 도구의 범주에 들어가는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과 능력을 확대할 줄 안다. 그러니 저자들은 아직 이르다 말한다. 무엇을 이르다 말하는가. '자기'를 위하여 일하는 도구가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말이다. 다만 그들은 우리에게 주문한다. 기계를 통제할 줄 알라고.


이 서평을 마치기 전에 저자들이 주목하는 현대 도구의 특징을 살펴볼 가치가 있다. 이들은 '사회적 기계'를 언급하며 거대한 양의 데이터를 가지고 우리의 사회성을 돕고, 창발성을 돕는 도구들을 주의한다. 이것이 바로 모라벡의 역설(인간이 수행하기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기계를 만들기는 쉽지만, 인간이 쉽게 여기는 일상의 일들을 기계를 제작하기는 어렵다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즉 주먹도끼부터 현재의 스마트폰까지 도구는 인류가 직접 하지 못하는 일을 하도록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도구가 지금 인류의 사회성 확장에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필자는 저자들이 인간은 자신이 만든 도구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도를 지닌 채 본서를 내놓았다고 본다.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현재의 도구는 지식을 가지고, 인간에게 조언을 제공하고, 인간과 협력하는 등 인간이 해 오던 역할까지 맡고 있'기 때문이다. 전 지구적인 변화를 어느 때보다 복잡하게 만들어가는 도구를 손에 쥔 종, 심지어 모든 종의 진화에 손을 댈 수 있는 능력을 얻어가는 사피엔스에게는 당연히 어느 때보다 막중한 책임감이 주어진다. 그러니 우리는 디지털 유인원에서 남아있어선 안 된다. 진화를 조망하고 세대를 뛰어넘는 속도를 지닌 도구를 갖춘 사피엔스는 이제 자신의 도구에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 우리를 좀 더 나은 존재로 진화시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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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그리스도인 - 세상을 밝힌 한국 기독교 저항사
강성호 지음 / 복있는사람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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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관용어구라는 게 있다. 입에 익숙하거나 글을 쓸 때에 적합하다 느껴지는 단어의 합으로 그 의미가 명확할 만큼 진부할 수 있으나, 자주 사용되는 만큼 그 역할을 다한다. 우리에게 그렇다면 저항은 무엇과 어울릴까? 우리의 기억 속에서 무엇보다 저항은 최근의 촛불혁명을 기치로 하여 뒤로, 뒤로 이어진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이하 개신교)는 어떠한가? 개신교는 어떠한 말과 어울리는가? 분명한 건 저항과 개신교를 두고 되물어볼수록 고개를 흔들게 된다는 점이다.

 

이 책은 그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무언가에 저항했던 그리스도인들의 행적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아니 잠깐만, 그들이 과연 무엇에 저항했단 말인가? 솔직한 심정으로 믿기 어려운 내용이다. 보수 기독교 단체의 목소리가 현대 한국 기독교의 확성기가 되어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단순히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그 한계점까지 서술했다는 점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독자의 생각보다 의미 있는 책으로 여겨질 것임이 분명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며 그러기에 인간에게 불의한 것은, 곧 하나님께 불의한 것이니 복종하지 않는다는 개신교의 기본 정신을 되살려 보자. 이를 토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그러하였듯이 역사 속에서 저항했다. 불의한 일제의 탄압과 폭정에는 31운동과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저항했으며 부정선거의 현장과 여성인권이 짓밟히는 곳에서는 그들을 고발하는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었다. 고문과 계엄, 강제 진압이라는 물리적 폭행 앞에서 시민들을 선도하고 그들 앞에 서는 용기를 내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당신이 만약 이 책의 독자가 된다면 그리스도인이든지 비-그리스도인이든지 간에 놀랄만한 점을 하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소개함으로써 이 짧은 서평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 놀라운 점은 본서가 주목하고 있는 성서의 주제다. 사람들에게 성서는 주로 위로부터 오는 권세에 굴복하라는 질서와 순종의 책이라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체제와 질서를 유지하는 친-권력형 종교로 쓰인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이라는 구심점에서 퍼져 나오는 동심원에서 많은 것을 찾아낸 역사가의 책을 지금 본다.

 

물론 한계점은 분명히 있다. 성서의 절대성을 부정하기 어려웠던 개신교인들, 특별히 문자주의적인 해석을 고수했던 이들은 그들의 행동을 그 문자 안에서만 해결하려고 했다. 또한 자신의 사회상을 뛰어넘지 못하고 가부장제에 갇힌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 문자와 시대에서 조국의 해방과 독립, 시민의 주인의식, 여성의 인권, 의로운 권력을 읽어냈다는 점은 우리에게 여러 시사점을 안겨준다. 성서가 여전히 읽혀질 만하다는 점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가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그들이 해석했던 시대상, 그리고 읽어냈던 성서를 현대의 개신교인들 혹은 비-개신교인들은 어떻게 읽어내고 있는가. 또한 우리의 시대상을 어떻게 해석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우리는 저항해야 할 것에 충분히 저항하고 있는가. 필자는 말머리에서 관용어구를 말한 바가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기에 저항하려 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거기에 더해, 당신과 어울리는 단어는 무엇이냐고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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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 사회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극단주의의 실체
김태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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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필자는 극단에 치우쳤다 하지 않고, 극단에 '선' 자들이라고 제목을 붙였을까? 그것은 이 책이 말하는 극단주의의 정의와 맞닿아 있다. 저자 김태형은 극단주의가 오용되었다는 주장을 <들어가는 글>에 붙여 자신이 앞으로 어떤 내용을 쓸지 말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극단주의에 관한 미국의 심리학 이론은 친자본, 친 제국주의, 어용 이론이다.'


이 책은 필자가 보기에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토막은 '극단주의의 예', 가운데 토막은 '극단주의를 말하는 미국 심리학의 태도 비판' 그리고 마지막 토막은 '극단주의의 발생기전과 예방'이다.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제외한 가운데 부분이, 전체 250쪽이 넘는 책의 거의 반절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저자는 이 책에서 극단주의를 비판하는 데 방점을 찍은 듯하다.


그럼 이제 그가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보자. 저자는 집단 극단화 이론에서 '극단'을 강도 혹은 양과 관련된 개념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곧 질을 배제한, 즉 내용을 빼버린 극단 개념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존의 신념이 강화되거나 다양성이 사라지고 동질성이 높아지는 것 자체를 극단화로 볼 수 없다는 내용으로서 촛불 혁명이나 미투 운동을 극단주의로 매도할 수 없다고 예를 들기도 한다. 쉽게 말해 현재 집단 극단화 이론은 현실을 담아내지 못하는 비현실적인 이론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러한 이론적 배경에 깔려 있는 미국 심리학의 인간관을 비판하기도 한다. "인간이란 수동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존재 혹은 선동꾼들에게 놀아나는 존재"로 보는 집단 극단화 이론을 어용 이론으로 보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간관은 인간을 불신하게 만들고, 인간 혐오에 빠지게 만들 영향이 크며, 군중을 매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의하면 사람은 인지-행동주의 심리학이 말하는 것처럼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각각의 고유한 개인사를 따라 복잡한 감정과 동기에 맞추어 정보를 능동적으로 처리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는 심리 환원주의를 비판하는 셈이다. 어떠한 사회적 현상을 인간의 심리현상으로 설명해낼 수 있다는 잘못된 시각을 비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저자 김태형이 주장하는 극단주의란 무엇일까? 그는 우선 3가지 요소를 뽑는다. 배타성, 광신, 강요. 그리하여 "광신에 사로잡혀 세상을 배타적으로 대하고 자신의 믿음을 타인들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혐오'를 덧붙이는 데, 이 네 가지가 극단주의를 정의 내리는 요소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한다. 무시당하거나 굴욕을 당하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이 사회를 비판하고, 인간 혐오를 만연하게 만드는 자본가들의 심리학을 비판한다. 민중의 계급적 분노를 엉뚱한 대상에게 향하도록 만드는 것, 곧 희생양 만들기'를 통해 군중을 극단주의로 매도한다는 말이다. 또한 이 행위는 실제로 극단주의로 향하게 만들어 혐오를 양산하고 내가 당한 학대 경험을 나보다 약한 자에게 전가하게 한다.


저자는 여기서 우리에게 요청한다. 자신이 당한 혐오 경험을 나보다 약한 자에게 하지 말고, 그것을 하게 만든 사회의 시스템을 보라고 말이다. 군중이 단결하여서 병적인 세상에 저항할 줄 알아야 진정으로 극단주의를 예방하고 사회를 물들이는 혐오 사건들을 단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의 주장을 세 개 정도로 요약하면, 기층 민주주의 확립, 자본주의 제도 개혁, 국가의 국민 차별 대우 중단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사회 심리학에서 시작했던 김태형의 글은 사회학으로 마무리 지어지는 듯한데, 그가 주장했던 것과 상통한다. 극단주의는 심리학으로 단순히 풀어낼 수 없는, 즉 각 개인에게 책임 전가할 문제가 아니다. 극단주의란 사회 그 자체를 이끌어나가는 개념과 이데올로기를 수정하지 않고는 사라지지 않을 망령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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