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의 의 개념 연구 - 신학적·윤리학적·비교문화적 고찰 한국 구약학 시리즈 2
유선명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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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가. 연분홍의 꽃잎. 넓게 뻗은 가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떨어지는 분홍빛깔. 푸른 새 순과 어울리는 모습. 무슨 심상을 그려냈든 땅 속 뿌리부터 하늘을 가리킨 가지까지 모두 벚꽃나무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정한 무엇을 표현한 그림이 다양하다면 포괄하여 파악할 수 있다. 단면을 모을수록 사각지대는 줄어들고 다양한 해석은 문제를 바라보는 실마리를 풍부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때때로 다양한 실마리를 시대가 요구하기도 한다. 요즘처럼 사회적 정의와 개인이 내린 선택의 결과가 의심을 받는 시급한 때처럼 말이다. 만약 당신이 어떤 현상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압력을 받는다면, 특별히 그것이 의로움이 관한 의문이라면(만약 당신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여긴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무의 뿌리를 쉬이 보지 못하듯 특정 단어의 개념을 이해하고자 오래된 용례를 찾아보기란 분명 까다롭고 난해하다. 그러기에 저자가 밝힌 '의' 개념은 종교와 시대를 막론하고 매우 귀중하다. 이 연구 결과는 매우 독특하기까지 한데 기독교인이 보편적으로 이해하던 '의로움' 개념과 다른 결과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지금까지 적용하던 사회정의나 구원론 측면의 교리적 해석 틀이 '구약성경 잠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와 맞지 않음을 의미한다.


저자의 연구를 간단히 소개하기 전에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이것은 책 끝부분에서도 명시된 내용으로, 의로움을 규정하는 데는 어떤 이론도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설명되는 '의' 개념은 성경이 말하는 혹은 기독교 세계가 견지하던 모든 의로움에 대한 생각을 대표하지 않는다. 다만 저자의 연구에 의의가 있다면 지금까지 외면받아 오던 영역을 발굴해 새로운 '단면'을 밝혀줬다는 데 있다.


잠언에서 말하는 의로움은 인격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깃든다. 부연하자면 의로움은 단순히 개인의 행동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 전인격, 품성 전체를 지칭한다. 이는 극단적인 인물상의 등장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는데 현실과 달리 잠언에선 악인과 의인의 구분이 뚜렷하다. 일종의 교육을 목표로 한 수사적 장치인데 도덕적 판단을 길러주는 구체적인 인간상을 제시한다. 이런 인물상 구성은 여전히 품성교육에 유효한데 악은 어딘가에 따로 존재하지 않고 인격과 함께 발현되기 때문이다.


악의 결정체를 가정한 후 그 행동을 보여주고 의인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그려내 비교하는 방식에 익숙해진 학습자는 악을 냄새 맡듯이 알아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특정한 순간마다 의인의 행동을 모방하여 선택의 갈림길마다 구체화된 '의'를 행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행함을 곧 지혜라 하는 잠언은 의로움을 추구하는 자라면 지혜를 배워야 한다고 종용한다. 지혜는 물론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미덕이고 의로움과 개념상 다르지만 잠언은 그 둘이 함께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곧 이러한 행동이 반복되어 품성을 만들고 그 품성이 곧 의로움이라는 결실을 맺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외에도 잠언에는 직관을 거스르는 특징이  있다. 잠언은 악인에게 관심이 없다. 악인이 어떻게 의인이 되는가, 라는 질문만이 아니라 의인이 되는 방법에도 그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다만 악인의 행동을 의인의 행동과 대조하는 방식으로 의로움을 추구하는 자가 어떻게 바른 결정을 해나갈 수 있는지 도우려고 할 뿐이다. 도리어 의로움을 추구하는 자와 의인에 차이를 두지 않아 인격이 결정한 삶의 방향성을 강조한다. 이는 대표적인 개신교 신학의 이신칭의, 즉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개념의 '의'로 이해하기엔 너무 결이 다른 서술이다.



잠언은 결국 다음을 주장한다. '의로움은 지혜로운 행동을 지속하는 사람의 품성에서 나온다. 악은 어딘가에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서 잉태된다. 사람이 자신의 잘못된 선택에서 돌이키지 않을수록 악은 쌓인다. 곧 악이 인격 자체가 되어 무슨 일을 해도 악행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행동을 판단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 의로움을 추구하는 자는 이러한 악의 전염성, 곧 그 영향력을 경계해야 한다.'


의로움의 새로운 단면을 소개했다고 하지만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의로움을 추구하는 자를 이미 의인과 같게 보는 잠언의 관점을 수용한다면 설명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다만 자세히 설명할 재간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 내면을 고찰한 고대 지혜문학의 주장이 그리 먼 곳을 가리키지 않는 것 같아 여전히 씁쓸하다.


마지막으로 미처 소개하지 못한 내용을 언급하며 글을 마쳐볼까 한다. 잠언은 부(富)의 용이함을 회피하지 않는다. 역으로, 지혜를 얻기 위해 가난과 같은 극단적 고난을 선택하라 종용하지도 않는다. 다만 부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의 한계를 지적하여 제한을 둔다. 부는 의로움에 종속돼야 한다. 즉 의로움을 추구하는 삶에서만 부는 제대로 기능한다. 그리고 잠언은 경고한다. 악을 택하여 사치를 부리는 삶보다 의를 택한 검소한 삶이 행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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