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책 말미에 "인권활동가들에게 이 책을 바친다"고 썼습니다. 서론에서도 투쟁, 참사, 재난의 현장에서 기존의 사회와 고립된 피해자들과, 또 연대하는 활동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패턴을 지켜보는 경험애서 나온 책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다만 실제로 이 책의 구성 전체는 서론과 결론에서 명시한 저술 동기보다 좀 더 넓은 범주로서의 고통을 다룹니다. 정신적, 실존적, 사회적 차원의 고통 범주 중 인권 문제는 세 번째 층위에서 자주 다루어지게 되죠.

각 층위에서 발생하는 무의미와 고립, 주객전도, 단절과 불통, 곁의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각 층위와 그곳에서 발생하는 현상은 다른 무언가로 쉬이 해결될수도 없고 환원되지도 않습니다.

주로 미디어와 온라인에서 표현되고 전시되고 소비되는 고통의 문제 역시, 왜 자극과 관심에 매달리다가 해결과 연대까지 나아가지 못하는 매커니즘이 반복되는지를 설명하는 힌트가 되기에 반드시 필요한 설명이었습니다.

다만, 이것을 다루는 동안 그만큼 절실하고 무력하다고 느꼈을, 처음과 끝에 명시된 활동가와 당사자들의 케이스는 다소 옅어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저술 동기는 구체적 인권 투쟁 현장에서 나왔으나, 텍스트는 좀 더 포괄적 욥기, 혹은 세속화되 신정론에 가까워져 있습니다. 예상 독자 역시 지식인으로서 현장과 괴리된 독자들을 포괄적으로 겨냥한듯 합니다. 혹은 포커싱이 두 사물 사이 텅빈 공간에 잡혀있는 듯 합니다. 

그런 지점에서 정희진 역시 어딘가 자기검열이 작동했는지, 저자가 충분히 밀고 나가지 못했는데, 서평들마저 어딘가 피상적이라고 합니다. 어떤 의미로든 저자는 '지식인'스러운 면모를 보입니다. 거리를 두고, 관조하며 지식을 생산해서 사태의 해결에 기여하고 싶어합니다. '민중의 고통을 중심에 둔 해방신학'의 세례를 받았다는 소개 답게, 그는 민중에 대한 죄책감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 보입니다. 민중이라는 단어가 낡았다 한들 잔인한 사회의 변두리에서 가장 먼저 희생당하고 소외되는 민중성은 여전히 난민, 노숙자, 성소수자, 여성, 장애인의 삶 안에 녹아있습니다. 대중과 민중,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지식인으로서 그는 양자를 모두 겨냥하다가 텅빈 듯해보이는, 그러나 사실 자기 자신이 있는 위치를 드러내는 글 쓰기를 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텅 빈 공간이되, 텅빈 공간'들'입니다. 홍은전 같은 활동가가 있습니다.(그냥 사람), 김인정같은 언론인이 있습니다.(고통 구경하는 사회). 나는 조금씩 채워진 자리를 보며 그 공간들에 내 자리가 있음을 느낍니다. 그렇게 아마도, 곁의 곁의 곁의 연쇄반응들이 일어나기를 저자는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나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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