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미소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은 시기/ 2016년 12월 18일 ~ 20일
/주제 분류/ 프랑스 소설
/읽은 동기/ 
   십여 년 전 전혜린의 에세이를 읽고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서 그 페이지들을 프린트했다. 그동안(그러니까 근 10년 동안) 잊고 있다가, 얼마 전 내가 가진 책들, 여러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프린트를 발견, 읽어보았다. 전혜린이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을 때 사강의 『어떤 미소』를 접했고, 후에 전혜린과 결혼하게 된 남자친구에게 그 소설의 줄거리를 들려준다. 남자친구의 소개로 전혜린은 『어떤 미소』를 번역 출간하게 된다. 
   이제는 중고서적에서도 찾기 힘든 전혜린의 『어떤 미소』. 그녀의 번역은 읽을 수 없지만 그녀를 움직이게 하고, 번역하게끔 한 『어떤 미소』가 과연 어떤 책인지 궁금해서 현재 구할 수 있는 책으로 읽었다. (재밌게도 몇 년 전에 읽은 책이지만, 줄거리도 다 까먹었다. 사강의 초기작들은 엇비슷한 뭔가가 있어서, 작품들끼리 헷갈린다. 줄거리보다 심리 묘사에 치중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등장 인물/
· 도미니크 - 나 (화자), 
· 베르트랑 : 도미니크의 남자 친구
· 뤽 : 도미니크가 사랑하게 되는, 베르트랑의 외삼촌
· 프랑수아즈 : 뤽의 아내
· 카트린 : 도미니크의 여자 친구
· 알랭 : 홀로 남은 도미니크의 곁에서 위로가 되어주는 친구 

/줄거리/
   이지적인 여대생 도미니크, 도미니크에게는 똑똑하고 자상한 남자친구, 베르트랑이 있다. 베르트랑이 수줍고 어리숙한 말고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 그녀 역시 어리숙한 답변으로 둘은 사귀게 된다. 둘은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도미니크는 문득문득 베르트랑을 사랑하지 않는 느낌을 받는다. 
14쪽. (...) 우리 관계의 지표들을 발견하곤 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나를 따분하게 해. 나는 모든 것에 무관심해.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완전히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자 터무니없는 열광의 감정이 내 목구멍을 가득 메웠다. 

20쪽. 내 안에는 늘 뜨겁고 살아 움직이는 짐승 같은 권태에 대한 취미가, 고독에 대한 취미가, 대로는 열광에 대한 취미가 존재했다. 나는 아마도 내 간에 이상이 있나 보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베르트랑은, 직업이 여행가인 외삼촌, 뤽을 도미니크에게 소개해 준다. 도미니크는 순간,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예감을 받는다. 도미니크 스스로 의식한 듯, 의식하지 못한 듯, 뤽에게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예감, 망각, 거부, 체념, 죄의식 등의 여러 감정들을  반복적으로 느끼다가 뤽과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도미니크 내부에서 뤽의 존재감은 점점 더 커진다. 
34쪽. 그래서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그것은 좋은 거라고,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보다는 덜 중요하지만, 행복해지려면 충분히 뜨겁게 사랑받고, 스스로는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나에게 자신은 매우 행복하다고, 왜냐하면 그가 프랑수아즈를 사랑하고 프랑수아즈도 그를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거기에 덧붙여서, 만약 내가 당신과 연애를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텐데." (아웅, 뤽은 완전 선수!!! - 먼지잼 주*)
   뤽의 도미니크에 대한 마음은 어떨까? 바로 위의 발췌문처럼 나이 든 매력적인 유부남이 상큼하고 통통 튀는 데다가 젊고 예쁜 여대생 도미니크를 그냥 한 철 애인으로 삼을 만한 사람으로 봤을까? 뤽 역시 도미니크에 대한 마음이 커진다. 하지만, 뤽이 진정 사랑하는 건, 그의 아내 프랑수아즈다. 그래서 뤽은 도미니크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도미니크에 대한 마음의, 감정의 변화는 있지만, (한 철 애인에서, 오래도록 두고 싶은 애인으로) 그녀를 결코 사랑하게 되진 않을 것이다. 

81쪽. "나는 말이야, 내가 널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하지만 지금 나는 너를 무척 존중해, 도미니크, 널 무척 좋아해. 내가 널 어린아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진정으로' 사랑할 수는 결코 없을 거야. 하지만 우린 닮았어. 너와 나 우리 두 사람 말이야. 이제 난 너와 자고 싶다는 생각만 하지는 않아. 난 너와 함께 살고 싶고, 너와 함께 여름휴가를 떠나고 싶어. 우린 굉장히 만족스러울 거고, 매우 감미로울 거야. 나는 너에게 바다를, 돈을, 어떤 형태의 자유를 가르쳐 줄 거야. 우리는 지루하지 않을 거야. 안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서로의 마음이 이러하여, 도미니크와 뤽은 여름 바캉스를 함께 떠난다. 1주일이 2주일로 늘어난다. 그들은 해변과 호텔 침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다른 것은 생각지 않는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도미니크의 친구, 카트린은 이런 사실을 베르트랑에게 말했고, 프랑수아즈의 대학 동창 역시, 뤽과 도미니크의 비밀 여행을 목격하고 프랑수아즈에게 모든 걸 다 말해버린다. 

   바캉스가 끝나고 파리로 돌아온 도미니크와 뤽. 달콤한 휴가의 끝으로 그들의 관계도 예전 같을 수 없다. 뤽이 프랑수아즈가 마음 아파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싫어하고 괴로워하기 때문이다. 이미 알았었고, 이미 예견되었던 실연의 아픔을 도미니크는 겪는다. 아픈 와중에도 도미니크는 뤽의 전화를 기다리고, 그의 편지를 기다린다. 
184쪽. 나는 한 달 동안 그를 보지 못할 것이고,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것은 기묘한 절망감이었다. 사랑을 쫓아내는 기묘함. 그가 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나는 더는 울지 않았다. 

186쪽. '나는 나야, 도미니크.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뤽을 사랑해. 나눠 가지지 못하는, 슬프고 불가피한 사랑. 끊어버려.'
   어느 날, 도미니크는 프랑수아즈를 만난다. 인정 많고, 애정 많은 프랑수아즈는 아파하면서도 끝까지 도미니크를 좋아하고 존중해 준다.

196쪽. "이제 난 젊지 않아요. 별로 매력이 없어요."

196쪽. 나는 이 이야기에 다른 측면이, 내가 모르는 비참함, 아니, 비참하지조차 못한 일상적이고 슬픈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 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내 소관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프랑수아즈가 그들의 관계를 알면 그녀가 분명 마음 아파할 걸 알았지만 (그래서 처음 도미니크는 뤽을 거부하려고 애썼다), 진정 프랑수아즈라는 한 존재를 깨닫게 된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감정은 그녀의 마음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것, 관성적 존재다. 
199쪽. 사흘 째 되는 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강의를 들으러 갔다. 알랭이 다시 나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나에게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웃기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 문장이 끈질기게 나를 따라다녔다. "덴마크 왕국에는 타락한 어떤 것이 있다." 내 입술 위에 이 말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보름째 되는 날 나는 뜰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안단테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새벽을, 죽음을, 어떤 미소를 환기시키는. 나는 침대 위에 꼼짝 않고 누워 오랫동안 그 음악을 듣고 있었다. 나는 퍽 행복했다.
   몸이 아픈지 사흘 째 되던 날, 도미니크는 강의를 들으러 다니기 시작했고, 보름째 되던 날 아침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모차르트의 안단테를 듣는다. 그녀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고, 행복을 느꼈다. 그때 뤽에게서 전화가 왔다.
200쪽. 전화를 한 사람이 뤽이라는, 그리고 그 사실이 이젠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가 내게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
미소 짓고 있는 내가 보였던 것이다. 미소 짓는 나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혼자라는 것. 나는 나 자신에게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혼자, 혼자라고. 그러나 결국 그게 어떻단 말인가?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이다.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였다. 얼굴을 찌푸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도미니크는 첫사랑의 열병을 끝내고 거울 앞에서 미소 짓고 있는 자신과 마주하며 소설은 끝난다. 누구나가 겪는 첫사랑을 도미니크는 이렇게 떨쳐낸 것이다. 

/느낀점/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분명 전혜린이 감명받았을 것 같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첫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이지만, 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섬세하고 치밀하며 솔직하다. 소설은 짐짓 꾸며낸 이야기,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이야기들인데도, 작가의 솔직함이 담겨 있지 않으면 기억에 남는 작품이 될 수 없다. 돌아서면 잊혀 버리는 이야기 조각들. 『어떤 미소』는 사강이 21세 때 쓴 그녀의 두 번째 작품이지만 지금도 읽히는 건 사강의 솔직함, 자기 마음과 감정을 꼼꼼히 해부하고 샅샅이 훑어보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비록 다른 초기작들과 비슷한, 스토리 위주가 아니라 심리 묘사 중심이라서 소설의 줄거리, 등장인물들이 헷갈린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깊은 공감(혹은 불편함)을 자아내고,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읽히는 것은 그녀의 예리한 관찰력과 솔직함 덕분이 아닐까 싶다. (뭇 사람들이 살면서 느끼게 되는, 첫사랑의 감정인데도 모두가 이런 작품, 혹은 일기로라도 이런 글을 쓰지 못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 사강보다는 덜 치밀하고, 덜 자기 마음을 관찰하고, 덜 부지런해서 그럴 것이다) 

   프랑수아즈 작품을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단한 건 이런 이유가 아닐까. 
(위고나 디킨스 등등 인류를 위한, 인류에 대한 글은 결코 아니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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