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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왕 ㅣ 폭스코너 청소년소설 8
너새니얼 레소어 지음, 신선해 옮김 / 폭스코너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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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읽은 청소년소설이다.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고 잘 읽힌다.

학교 일진 무리이자 왕으로 군림하던 앤톤의 변화와 성장을 다루고 있다. 물론 일진 소년에게 값싼 면죄부를 주는 내용은 아니다. 

앤톤은 아빠가 폭력 행위로 감옥에 갔을 때 주변 아이들로부터 의심에 찬 눈길을 받았는데, 그때 오히려 그걸 멋있다고 생각하고 그를 치켜세워준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우정을 나누고 무리를 이루게 된다. 아빠의 후광(?)까지 더해져 앤톤은 학교의 왕으로 군림하게 되는데, 그 무리들이 학교의 일진 그룹을 형성하면서 앤톤도 자연스럽게 무리의 규칙을 답습하게 된다. 하지만 그에게는 정의로운 엄마와 자애로운 할머니가 있다. 걔들이 절친이라 함께 어울리고 있고, 학교의 왕이라는 타이틀이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자산이라 여기는 어린 마음이 있지만, 같이 어울리는 (절친이라 믿고 있는) 케힌데 같은 아이처럼 악독한 성격은 아니다. 그냥 주어진 위상에 걸맞게 부러 껄렁하게 굴고 선생님에게 맞서고 허세 가득한 삶을 살고 있을 뿐. 

그런 앤톤이 학교의 왕이자 일진 무리의 리더라는 위상과 도통 어울리지 않는 '해피 캠퍼스'의 주말 캠핑에 참석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거기서 평소라면 절대 어울리지 않았을 학교의 대표 괴짜 매튜와 얽히게 된다. 소설의 유머는 주로 이 매튜의 행동에서 나온다. 괴짜이기도 하고 순진하기도 하고 겁도 많으면서 또 할 말은 다 한다. 일진 무리의 멋잇감으로 딱인데, 어쩌다 보니 매튜에게 서서히 잠식당하는 건 외려 앤톤이다.

이제 앤톤은 이중 생활을 하는 처지에 놓이는데, 한편에서는 원래의 절친들이라 믿어온 케힌데 무리와 이전처럼 허세를 부리고 꺼드럭거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매튜와 새로운 방식의 우정과 관계 맺기를 배워간다.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십 대들이 그렇듯, 앤톤은 어느 쪽을 확실히 선택하지 못한 채 번민하고 고심하며 결정의 순간으로 내몰린다. 그 과정이 우습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다.

진정한 우정과 관계 맺음에 대하여, 허울뿐인 명예와 추구할 가치가 있는 참된 목표를 가르는 기준에 대하여, 용기와 만용의 차이에 대하여, 맨박스에 대하여,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고 성장해나가는 청소년들의 심리와 감정에 대하여, 상당히 흥미롭고 설득력 있게 다루는 소설이다. 

청소년들이 직접 선정하는 카네기 섀도어스 초이스상을 받은 작품인데, 확실히 청소년들이 좋아할 만하고, 그럴 가치가 충분한 책이었다. 유머도 풍부하고 의미도 깊어서,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과도 함께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사랑 말이다, 앤톤. 내가 뭐 도덕적으로 잘났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거든. 사랑은 우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까지 영향을 미친단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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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가벼운 나날 + 어젯밤 - 전2권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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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은 단편대로, 장편은 장편대로 간결한 문장이 뿜어내는 정서적 여운이 엄청난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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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피터 초상 - 소설체로 쓴 이상의 삶과 문학 이야기
권영민 지음 / 폭스코너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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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상의 불운하고 고독했던 삶에 대해 새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쓴 문학의 위대함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시대를 앞서 간 천재였기에 독자를 얻지 못했던, 그러나 그토록 갈망했던 이상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의 삶과 문학을 읽었다. 

<오감도>를 비롯해 그의 작품 여럿의 평론이 함께 실려 있는데, 그의 삶의 궤적과 연관해 읽으니 이전보다 더 많은 게 읽힌다.

금홍과의 연애사는 퇴폐적이고 낭만적인 이상 대신, 약간은 찌질함을 장착한 순정남 이상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건 그것대로 좀 새롭다. 평생의 지기 구본웅이나 김기림과의 우정도 잘 묘사되어 있다.

이상문학 권위자인 노교수의 작품이고, 주요 작품 해설도 함께 실려 있어서 좀 딱딱하고 고루한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술술 읽힌다. 다 읽고 나니 그만큼 이상에게 바짝 더 다가선 느낌이랄까.

어쨌든 이상은 한국문학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고, 늘 모종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인지라, 일독할 가치가 충분했고, 1930년대 경성을 직접 거니는 느낌으로 만족스럽게 읽었다. 재미있는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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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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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통찰을 해낼 수 있는 것일까. 그 책과 그 영화를 보고서. 그리고 그런 통찰을 어떻게 이토록 적확한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일까. 모든 글에 깊이 공감했고, 무릎을 여러 번 쳤으며, 따로 노트를 두고 문장들을 엄청 베껴 썼다.


개인적인 여러 일들을 겪으며 죽음, 신앙, 종교, 사랑, 영원 같은 주제에 요즘 꽂혀 있다. 이 책이 그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좋았다. 어떤 대목에서는 공감을 넘어 마음이 떨리기도 했다. 그래, 이런 해석을 듣고 싶었어, 하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조심스레 넘겨나갔다.


가령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리는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같은 문장들.


프리모 레비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목격한 통역자에 대한 에피소드 이후 따라붙는 해석의 문장,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듣기 때문에 생존하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보다 먼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느낀다" 같은 구절들.


나는 지금 오래 기다려야 할 처지이기에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림이 한없이 지연될 것을 알고 대비해야 한다. 기다림을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와 같은 비교적 평범한 문장도 이 문장이 도출되기까지의 서술 과정에 설득되어 마음을 울린다.


죽음에 대한 통찰, 신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자세, 광신을 경계하며 신앙하는 자세를 가지는 방법 등에 대해 무수한 영감을 안겨주는 책이었다. 이런 책을 고요하게 읽어내는 것만큼, 만족감 높은 행위가 없을 것이다. 내 안의 불안과 슬픔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위로를 받았다. 작가처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세상과 나와 타자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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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일레븐 ㅣ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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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강의 치사율을 보이는 조지아 독감의 급속한 확산으로 인류의 99%가 죽고 문명이 붕괴된 세계를 그린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혼돈과 절망이 가득하지만, 마냥 어둡고 혼탁하다기보다는 어둠 속에 어스름한 빛이 스며드는 풍경의 아름다움이 함께 느껴지는 이야기다.

 

문명 붕괴 직전에 명배우 아서는 연극 <리어왕>의 무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야기는 아서의 죽음을 전후한 상황과 폐허가 된 새로운 세상의 삶을 오가며 펼쳐진다. 다채로운 인간 군상이 등장해 문명 붕괴 전후의 삶과 선택을 보여준다, 주인공격인 인물들(커스틴, 지반, 미란다, 클라크, 타일러)은 모두 아서와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문명 붕괴 후의 세계를 살아가야 할 유일한 세계로 인식할 수밖에 없게 된 커스틴과 타일러는 미란다가 만든 그래픽노블 <스테이션 일레븐>을 아서에게 선물받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다.

 

아서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초반에 조지아 독감이 인류를 붕괴시키는 과정을 다급하게 스케치한 이후로는, 아서의 삶의 결정적 지점들과 문명 붕괴 후의 세계(특히 커스틴의 유랑극단을 중심으로)를 수시로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간대가 자주 튀어서 이게 뭔가 싶지만, 결국 아서의 삶 혹은 선택과 이어진 캐릭터들이 대미에 직간접적으로 조우하는 과정까지 읽고 나면, 이야기가 얼마나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는지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세번시티 공항에 불시착해 거기 잔류하게 된 클라크와 승객들이 직후의 상황을 판단하고 받아들여가는 챕터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모든 혼란과 절망이 시시각각 밀려오는 듯해 숨이 막히면서도, 거기서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사라진 이전 시대의 물건들로 박물관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숙연하기까지 하다.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붕괴된 세계를 떠도는 유랑극단의 멤버 커스틴이다. 이 당차고 유능한 소녀가 예언자와 대치하는 마지막 대목은 긴장감으로 쫄깃하다. 다만 예언자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클리셰에 가깝고 커스틴의 카리스마를 맞상대하기에 충분히 강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파국과 절망 속에서 단순한 생존 그 너머를 바라본 이들의 선택과 행보가 전해주는 어스름한 희망이 위로를 안겨주는 소설이다. 여전히 그 불완전하고 정돈되지 않은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나가야 할 커스틴이 안쓰러우면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선사하는 결말이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처절하고 아름다우며 매혹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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