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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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런 통찰을 해낼 수 있는 것일까. 그 책과 그 영화를 보고서. 그리고 그런 통찰을 어떻게 이토록 적확한 언어로 표현해내는 것일까. 모든 글에 깊이 공감했고, 무릎을 여러 번 쳤으며, 따로 노트를 두고 문장들을 엄청 베껴 썼다.


개인적인 여러 일들을 겪으며 죽음, 신앙, 종교, 사랑, 영원 같은 주제에 요즘 꽂혀 있다. 이 책이 그 모든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좋았다. 어떤 대목에서는 공감을 넘어 마음이 떨리기도 했다. 그래, 이런 해석을 듣고 싶었어, 하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조심스레 넘겨나갔다.


가령 "영원한 사랑은 없다. 영원한 것은 이미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잃어버리는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없다. 잃어버릴 두려움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같은 문장들.


프리모 레비가 유대인 수용소에서 목격한 통역자에 대한 에피소드 이후 따라붙는 해석의 문장,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알아듣기 때문에 생존하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보다 먼저,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느낀다" 같은 구절들.


나는 지금 오래 기다려야 할 처지이기에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림이 한없이 지연될 것을 알고 대비해야 한다. 기다림을 삶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와 같은 비교적 평범한 문장도 이 문장이 도출되기까지의 서술 과정에 설득되어 마음을 울린다.


죽음에 대한 통찰, 신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자세, 광신을 경계하며 신앙하는 자세를 가지는 방법 등에 대해 무수한 영감을 안겨주는 책이었다. 이런 책을 고요하게 읽어내는 것만큼, 만족감 높은 행위가 없을 것이다. 내 안의 불안과 슬픔이 책을 읽는 동안 많은 위로를 받았다. 작가처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세상과 나와 타자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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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션 일레븐 스토리콜렉터 45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 지음, 한정아 옮김 / 북로드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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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극강의 치사율을 보이는 조지아 독감의 급속한 확산으로 인류의 99%가 죽고 문명이 붕괴된 세계를 그린 아포칼립스 소설이다. 혼돈과 절망이 가득하지만, 마냥 어둡고 혼탁하다기보다는 어둠 속에 어스름한 빛이 스며드는 풍경의 아름다움이 함께 느껴지는 이야기다.

 

문명 붕괴 직전에 명배우 아서는 연극 <리어왕>의 무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야기는 아서의 죽음을 전후한 상황과 폐허가 된 새로운 세상의 삶을 오가며 펼쳐진다. 다채로운 인간 군상이 등장해 문명 붕괴 전후의 삶과 선택을 보여준다, 주인공격인 인물들(커스틴, 지반, 미란다, 클라크, 타일러)은 모두 아서와 관련되어 있으며, 특히 문명 붕괴 후의 세계를 살아가야 할 유일한 세계로 인식할 수밖에 없게 된 커스틴과 타일러는 미란다가 만든 그래픽노블 <스테이션 일레븐>을 아서에게 선물받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다.

 

아서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초반에 조지아 독감이 인류를 붕괴시키는 과정을 다급하게 스케치한 이후로는, 아서의 삶의 결정적 지점들과 문명 붕괴 후의 세계(특히 커스틴의 유랑극단을 중심으로)를 수시로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간대가 자주 튀어서 이게 뭔가 싶지만, 결국 아서의 삶 혹은 선택과 이어진 캐릭터들이 대미에 직간접적으로 조우하는 과정까지 읽고 나면, 이야기가 얼마나 아름답게 구성되어 있는지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세번시티 공항에 불시착해 거기 잔류하게 된 클라크와 승객들이 직후의 상황을 판단하고 받아들여가는 챕터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그 모든 혼란과 절망이 시시각각 밀려오는 듯해 숨이 막히면서도, 거기서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사라진 이전 시대의 물건들로 박물관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이 숙연하기까지 하다.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는 붕괴된 세계를 떠도는 유랑극단의 멤버 커스틴이다. 이 당차고 유능한 소녀가 예언자와 대치하는 마지막 대목은 긴장감으로 쫄깃하다. 다만 예언자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클리셰에 가깝고 커스틴의 카리스마를 맞상대하기에 충분히 강력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뜻하지 않게 주어진 파국과 절망 속에서 단순한 생존 그 너머를 바라본 이들의 선택과 행보가 전해주는 어스름한 희망이 위로를 안겨주는 소설이다. 여전히 그 불완전하고 정돈되지 않은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나가야 할 커스틴이 안쓰러우면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선사하는 결말이라 마음이 조금 놓였다. 처절하고 아름다우며 매혹적인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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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쓸모
로랑스 드빌레르 지음, 박효은 옮김 / FIKA(피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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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 폭염이 시작되기 직전에 강아지가 하늘나라로 떠났다. 특별할 게 없었던 5월의 어느 날, 갑자기 잘 먹지 못하는 듯해 병원을 찾았다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고, 1년이라는 의사의 소견과 이어진 한 달간의 열렬한 투병에도 불구하고 한 달 보름 만에 갑작스럽게 떠났다. 마지막 며칠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만큼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떠나보낸 후 처음 한 달간은 거의 매일 오열하는 수준이었고, 두 번째 달은 그냥 내내 울었고, 석 달이 지난 지금은 조금 덜 울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리움과 위화감에 고통스럽다.

 

많은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위로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 사실 그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게 당연하면서도 씁쓸했다. 위로랍시고 만나 밥을 사준 몇몇은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나을 뻔했을 정도로 무심한 말로 상처를 안겨주기도 했다. 상실감, 이별, 위화감, 죄책감, 그리움, 우울감. 이런 감정들이 나를 사로잡았고, 지금까지도 잔여물이 남았다. 보통 그러하기 때문에 나도 그냥 일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슬픈 와중에도 웃고, 일을 처리하고, 회식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었다. 사놓고 강아지를 간호하고 떠나보내고 슬퍼하느라 읽지 못했던 책들도 읽었다.

 

<철학의 쓸모>는 그런 내게 쓸모가 충분한 책이었다. 딸이라 여긴 강아지의 죽음을 맞아 상실감과 고통에 휩싸여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은 그런 문제(죽음, 허무, 고통)를 바라보는 통찰과 나름의 철학적 처방을 제시하는데, 어떤 구절들은 너무나도 동의가 되었고 현재의 마음과 이런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를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냥 내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정말 위로가 되었다. 아마 그것이, 그 언어를 발견하는 것이야먈로 철학의 쓸모가 아닐까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런 구절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죽음이 아닌 타인의 죽음, 사랑하는 이의 죽음만을 경험한다. 그래서 죽음은 애도의 얼굴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을 멈추게 하는 죽음은 나날들이 계속해서 흘러갈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과 그의 존재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분명한 사실을 보란 듯이 무너뜨린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이 아닌 삶의 덧없음을, 그의 부재가 만들어낸 절대적이고 극단적인 공허를 경험한다. 바로 그 순간이 삶에서 무를 대면하는 유일한 순간이다.” (50)

 

언젠가 고통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추억만 남는다고 해도, 시간이 다 해결해준다는 말은 거짓이고 기만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매일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마다 그의 죽음을 다시 마주한다. 그를 그리워하는 일 역시 오늘로 끝나지 않고 매일 계속된다. 철학은 이 고통을 치유해줄 수 있을까?”(53)

 

바라볼 수 없고 실감할 수 없는 것에는 치료법이 없다. 산다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슬픔을 위로하려고 하는 이들은 슬픔을 더욱 깊어지게 할 뿐이다.” (55)

 

저자는 죽음으로 인한 그런 상실과 슬픔에 대한 처방으로 몽테뉴의 <에세>를 언급한다.

 

어설픈 위로나 격려보다 주변을 환기하는 편이 낫다. ‘변화는 늘 고통을 덜어주고 무너트리며 흐트러트리기때문이다. 슬픔에 빠진 사람은 고통과 싸우려 들지 말고 주변환경, 일거리, 만나는 사람들에 변화를 주면서고통을 가라앉혀야 한다. ()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면 다른 곳을 바라볼 수 있다. 특히 소소하고 즐거운 활동일수록 보다 쉽게 몰입할 수 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삶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잠시나마 걷어낼 수 있을 것이다.” (56)

 

단언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않아서 좋았다. 슬픔과 상실감이란 시간이 지나면 바람에 불려 날아가듯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대신, (그것은 인생이 품어야 할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다만) 잠시나마 걷어내기 위해 주변을 환기해보는 게 어떻냐는 소박한 조언이 내게는 더 실용적이고 위로가 되었다.

 

나는 철학적 지식을 쌓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때로는 철학이라는 것이 말장난이나 지나친 비약으로 인한 뜬구름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는데, <철학의 쓸모>를 읽으면서, , 철학이란 게 실제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거나 쇄신하거나 관점을 바꿔주는 실용적인 측면이 있네, 하고 새삼 느꼈다. 이 책은 그렇게 죽음과 슬픔과 질병과 고통과 사랑과 삶의 다양한 개념들을 진단하고 처방한다. 확실히 지금의 내게는 쓸모가 있는 독서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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