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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을 말하다 - 개항도시 인문학
유시민 외 지음 / 혜윰터 / 2025년 7월
평점 :
“60대 후반 넘어간 사람이 총리 장관 해 가지고는 답이 없어요. 육체적으로 안 돼요.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리지 못합니다.”(p.65)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단순히 권력을 가진 한 개인의 몫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통령은 한 사람의 성격이나 능력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시대의 요구, 국민이 바라는 가치, 그리고 그 순간의 정치적 환경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자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이 시킨 게 아니고 이후락 정보부장이 알아서 하다가 그렇게 됐던 겁니다. 거기서도 죽은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다만 조갑제 대표의 위 발언은 매우 문제적인 평가다. 김대중 납치 사건은 단순히 누가 죽고 안 죽고의 문제가 아니다. 당시 국내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은 국가 범죄이자 국제적으로도 심각한 외교 사건이었다.
“죽은 사람이 없지 않느냐”라는 식의 발언은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파괴당하고, 정치적 폭력 앞에서 공포를 겪은 수많은 시민들의 피해와 고통을 철저히 무시하는 태도다. 실제로 유신 정권 시기에는 납치·고문·감시·해직 등 수많은 민간인의 인권이 억압되고 희생당했다. 목숨을 잃은 사람만이 ‘피해자’라는 듯한 접근은 권력의 폭력을 축소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지도자와 권력자의 행위는 개인 한 명의 생사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반과 민주주의의 기반을 흔드는 문제다. 이 평가는 결국 폭력적 권력을 면죄하려는 시각이며, 민주주의의 역사를 훼손하는 위험한 태도다. 역사를 바라볼 때는 죽음이라는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무너진 정의와 짓밟힌 자유를 함께 바라봐야 한다.
이 책은 여러 대통령들의 리더십과 당시의 상황을 짚어내며, 그들이 내린 결정 하나하나가 얼마나 무거운 의미를 갖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시춘 이사장은 생전 김대중 대통령이 힘쓰던 남북 문제를 여러번 강조한다.
“평화협정을 맺고 양쪽에서 쓰고 있는 국방비의 절반만 줄여도 지금 우리 삶은 훨씬 좋아질 수 있습니다.”(p.130)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구절은 시대의 변화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부분이었다.
“여성이 똑똑하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하는 게 아닙니다. 암탉이 울면 알을 낳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20·30 여성들의 비상계엄을 대하는 태도와 집단적 움직임을 보면서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p.137)
유 이사장의 위 발언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어떤 목소리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문화와 대통령의 관계에 대한 부분도 흥미로웠다.
“김대중 대통령이 가지셨던 문화에 대한 자세, 즉 ‘지원하되 결코 간섭하지 않는다’는 리버럴리스트의 철학을 다음 정부도 좀 관철을 해주기를 바랍니다.”(p.143)
이 철학은 단순한 정책 구호가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에서 문화가 가져야 할 자율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김대중 대통령은 문화를 정치적 도구로 활용하거나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가 문화와 예술을 존중하면서도 일정한 지원을 통해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주되, 권력이 개입하여 창작의 자유를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정부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라는 점을 강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볏단을 움켜쥐고 있는 사진과 농민들 틈에서 막걸리 마시는 사진을 많이 배포했습니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심고자 했던 이미지죠.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군복을 입은 대통령과 연예인을 안가로 불러서 시바스 리갈을 마시는 대통령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p.196)
박정희 정권은 대중에게 근면·서민적·농민 친화적인 지도자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주입했다. 이는 언론과 사진, 상징을 활용한 전형적인 정치적 이미지 조작 전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민이 기억하는 박정희의 모습은 단순히 ‘근면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군복과 권위로 대표되는 권력의 상징이었고, 권위주의 정치와 억압을 체현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 차이는 정치 지도자가 아무리 이미지를 세심하게 가공하더라도 국민의 체험과 역사적 기억 앞에서는 왜곡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정치적 이미지 메이킹이 단기적으로 효과를 거둘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국민이 겪은 체험과 역사적 맥락이 더 강력하게 남는다는 사실을 박정희 사례가 증명한다. 결과적으로 정치 지도자가 추구해야 할 것은 꾸며낸 이미지가 아니라 국민 앞에서 드러난 실제 행동과 정책이며, 결국 그것이 집단적 기억에 남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전에 갖고 있던 대통령에 대한 시각도 달라졌다. 특정 대통령에 대해 단순히 지지나 비판을 반복하기보다, 왜 그 상황에서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먼저 고민하게 됐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결국 시대의 무게를 짊어진 인간의 자리이며, 한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흐름이 녹아 있는 자리라는 걸 다시 느꼈다.
단순히 대통령 개인을 평가하는 책이 아니라, 한 나라의 역사와 시대를 관통한 고민의 결정체를 보여주는 책이라는 점에서 일독할 만하다. 읽고 나면 대통령을 바라보는 시야가 조금은 더 넓어지고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