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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일들

― 김연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일반적으로 김연수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말로 정의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이 말은 문체론적으로 분리될 필요가 있다. 즉, ‘인문학적’이란 말은 기록된 역사로의 거시사로, ‘상상력’이란 말은 기록되지 않은 역사로의 미시사로 정리할 수 있단 얘기다. 이 텍스트 안에서의 거시사라면 왕오천축국전의 축약본과 그에 대한 주석이 해당되고, 미시사라면 그의 여자 친구의 죽음과 그로 인한 이별이 그에 해당된다. 즉, 독자는 여기서 표면적으로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 두 개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기록된 역사에 대한 서술 부분을 살펴보자.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나오는 나라에 대해 혜초는 이렇게 썼다. “이름은 소발나구달라(蘇跋那具怛羅)국이라고 한다. 토번국의 관할 아래 있다. 의상은 북천축과 비슷하나 말은 다르며 지대가 대단히 춥다.”

 

마르코 폴로는『동방견문록』에 이렇게 썼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이 사흘 거리를 다 가면, 동북쪽과 동쪽 사이로 거의 40일 거리를 줄곧 산과 능선과 계곡을 지나고 수많은 강과 황야를 거쳐서 기행해야 한다.…중략…그들은 힘이 세고 사악한 사람들이다.”

 

한편 혜초보다 먼저 이 지역을 다녀간 현장은 『대당서역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발로라국은 주위가 사천여리나 되고 대설산 속에 있으며 동서는 길고 남북은 좁다. 의복은 가죽옷이고 문자는 인도와 대체로 같으며 언어는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

 

 

썼다’라는 동사와 텍스트의 직접 인용을 통해 작가는 역사를 기록했다는 행위에 대한 강조를 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해 인용문 안의 내용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다만 그렇게 ‘쓰여진’ 기록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강조들은 단순히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서사와의 대비를 통해 이 소설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신입생이라면 새벽 네시까지 졸음을 참아가며 선배들이 권하는 술을 받아 마신 뒤 겨우 잠들었다가 해가 뜨면 선배들보다 먼저 일어나 2학년생들을 도와 밥을 지어야 했다. 그런 몸으로 선인봉에 매달렸기 때문에 온전히 버텨낼 수 없었다. 중간쯤 올라가니 육체적 한계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봤지만,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정상에 올랐다. 거기가 바로 육체적 한계를 넘어선 지점일 것이다. 그 지점은 어떤 사람의 등반일지에도 나오지 않는다.

 

문장은 몹시도 더디게 진행됐다. 인과관계에 어긋나는 일들은 문장으로 남기지 않았다. …중략… 여자친구에게 현실의 그는 은밀한 존재, 혹은 무의미한 존재였다. 은밀한 존재는 현실의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소설 속의 문장으로는 들어올 수 없었다.

 

 

그는 대학시절 산악부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오랫동안 등반일지를 써왔다. 그러나 처음 등반한 도봉산 정상에 대한 기록은 남길 수 없었다. 정상은 이미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 도달한 지점이었기 때문에 현실과 꿈이 혼재된 상태이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정상을 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그는 여자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소설 작업은 어떤가. 여자친구의 투신에 논리적으로 부합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문장의 탈락을 결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록으로서 쓰여진 모든 것들이 진실과 사실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사실을 다룰 순 있되 진실은 결코 손댈 수 없다는 것이 맞겠다.

 

 

즉, 이 소설의 전제는 분명히 일어났으나 기록은 되지 않은 일, 기록이 되지 않음으로써 마치 없었던 일로 간주되는 행위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이러한 기록된 역사와 기록되지 않은 개인사의 교차와 대비를 통해 이야기 그 너머의 진실에 대한 암시를 하고 있다. 삶이란 단순히 인과관계에 의해 선택되고, 언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여자친구가 투신한 후 그는 아홉 달 동안이나 소설 쓰는 일에만 몰두한다. 하고 많은 일 중에 그는 왜 ‘소설’을 택했을까. 소설은 언어와 삶이 맞닿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단순히 언어라고만 할 수도, 단순히 삶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치열하게 혼재된 거기가 바로 소설이 탄생하는 곳이다.

 

 

그리고 김연수의 이 소설 안에서는 그것을 증명하듯이 유난히 혼재된 것들이 많이 나열되고 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한자와 영어와 한글이 혼재되어 있으며, 원문과 주석이 혼재되어 있고, 일인칭 화자인 ‘나’와 삼인칭 화자인 ‘그’가 혼재 되어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와 현재가 혼재 되어 있다. 대체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삶의 속성이다. 언어로 차마 다 담아낼 수 없는 크기의 진실과 불분명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를 통해 논리적 인과관계를 성립하려고 애쓴다. 바로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다.

 

 

“부모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용기가 없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야만의 시대에 더 이상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회는 없어.” 이 유서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없었습니다”라는 존칭에서 “후회는 없어”라는 비칭 사이의 거대한 틈 때문이었다.

 

 

“없었습니다”와 “후회는 없어”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틈은 바로 그들이 살았던, 살고 있는 ‘삶’, 더듬어 볼 수 있는 ‘기억’ 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가 해답을 찾는 행위는 명백히 보자면 여자친구를 이해하기 위한 행위라기보다는, 여자친구의 죽음을 납득하기 위한 행위이다. 그러니 그의 내면에서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존칭 언어와 비칭 언어 사이의 틈은 그에게 소설적 해석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설을 쓰면 쓸수록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갔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것이 우리가 문학을 하고자 하는 보통의 이유와는 다소 다른 지점이란 것이다. 이해와 소통이 전제되어 있는 문학이 아니라, 소통이 불가하고 존재 자체에 회의를 품게 되는 것이 문학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진실들을 표현하는 행위가 언어로만 가능하다는 인정이 그가 처해 있는 총체적인 상황이다.

 

 

때문에 소설을 다 쓰고 난 그가 히말라야로 향하는 이유 또한 소설을 썼던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즉, 히말라야로 향하는 것은 소설을 쓰는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가 결국 깨닫게 된 것은, 아무리 해도,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총동원해도’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이 삶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H는 이렇게 주석을 달아놓았다. ‘동서남북의 모든 나라들이 소발률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겼다. 소발률에서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와 아랍과 인도와 중국과 티베트의 문화가 혼재했다.’ 모든 나라에게 소발률 너머는 이방의 땅이었다. 거기가 바로 지금 내가 가는 곳이다. 모든 게 혼재하는 곳, 수령과 백성을 버려두고 왕 혼자서 도망간 곳.

 

그는 언제나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곳에 매료됐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써나갈 때 그는 가닿을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 이르렀다. 그 지점에서 그의 문장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꿈은, 문장이 끊어진 자리에서 시작했다.

 

 

그가 히말라야로 가져가려고 하는, 소설에 쓰지 않은 나머지 일들은 그에게 곧 단지 기록되지 않은 진실이다. 문장이 끊어진, 자리. 그제야 대면할 수 있는 진실을 찾기 위해 그는 히말라야로 가는 것이다. 과연 거기엔 무엇이 있을까. 소설의 도입부분에서 인용되고 있는 헤르만 불의 말에 대한 인용은 그런 맥락에서 암시적인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이 대설산의 정상에 오른 사람은 독일의 헤르만 불이었다. 불은 이렇게 말했다. “며칠 후 나는 이 산기슭에 설치된 베이스캠프에서 텐트 앞에 누워 아픈 발을 돌보며 사천 미터보다 더 높은 쌍두봉을 몇 번이나 쳐다봤다.…중략…나는 그 고지대의 만년설 상부를 나의 심안(心眼)으로 몇시간 동안 살펴봤다. 그것은 내게 하나의 꿈처럼, 다른 사람들은 경험할 수 없는 꿈처럼 보였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인 꿈처럼 다가왔다.”

 

 

그가 가고자 하는 설산은 매우 현실적이나,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같은 곳이라고 서술되고 있다. 소설 안에서 그러한 속성을 지닌 것이 또 하나 있다면 작중 화자인 ‘나’의 집이다. 그는 언젠가 ‘나’의 집 축대에 기어올라가 축대 ‘너머’의 세계에 대해 바라본 적이 있다. 어떤 벽이어도 넘을 수 있는 크랙과 홀드만 있다면 축대는 그 자체로 매우 현실적이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나’의 남편과 아이들과 일상이 있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같은 곳. 이 등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품 말미에 드러난 그의 편지에선 그가 축대 위에서 다만 한참 있다가 다시 내려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그가 히말라야로 향한 이유가 설명된다. 그는 다른 원정 대원들처럼 그곳을 ‘정복’하러 가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설산 너머에서 만나게 될 진실은 결코 ‘정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얘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산악인은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게 설사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히말라야의 고봉을 등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의 지대를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의지만으로 죽음의 지대를 지날 수는 없다. 죽음의 지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지나갈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는 ‘나’의 축대에 기어올라 축대 ‘너머’를 한참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히말라야 또한 다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작중 그의 소설과 작가의 소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방향인 셈이다.

 

 

이 소설은 많은 것이 혼재되어 있는 와중에 그것들이 취하고 있는 구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끊임없이 힌트를 주고 있다. 그것을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은 앞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나와 그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나를 통해 서사가 진술되도록, 또 그를 통해 서사가 진행되도록 하는 구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나를 쫓아가다가, 그를 쫓아가다가 둘을 쫓아가다가 서로의 반대 방향에 서보기도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썼다. “122행의 앞 세 글자는 빠져 있다. …중략…蔗자 앞에는 희미하게 지워진 글자가 있는데, 남아 있는 형태로 봐서 이 글자는 감(甘)자가 확실하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죄다 수첩에 기록했다. 몇몇 사소한 고민거리들, 문득 떠오른 일들과 좀체 가라앉지 않는 의문들,…중략…지금 그가 선 자리의 경도와 위도와 고도 등 안팎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그는 짧은 단어와 다양한 기호로 이뤄진 불완전한 문장으로 남겼다.

 

가 눈을 뜨니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한사람은 그에게 편지를 보낸 편집장이었고 한사람은 편집장에게 그의 공책을 건네준 였다.

  

가만히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다가 그는 누군가 괜찮아, 라고 묻는 소리를 들었다. 그건 목소리였다.

 

 

여기서 ‘나’는 왕오천축국전의 축약본에 주석을 다는 번역가이며, 동시에 그의 행동에도 주석을 다는 해석자, 즉 화자이다. 그는 어떤가. 그는 ‘나’에게 해석을 당하는 객체이며 동시에 여자친구의 죽음을 해석하는 주체이다. 이는 존재적인 차원에서 둘의 모호한 관계를 증명하는 부분이다. 과연 ‘나’는 ‘나’이기만 하는가, 또 ‘그’는 ‘그’이기만 한가 말이다.

 

 

여자친구의 죽음에 주석을 다는 행위인 소설을 쓰는 작업에서 그는 논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문장의 탈락여부를 결정하고, 나는 많은 해석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해석을 채택하는 일을 한다. 그들은 결국 같은 맥락에 있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셈이다.

 

 

그러나 그가 히말라야로 간 순간, ‘나’와 ‘그’는 분리된다. ‘그’는 일상화되지 않은 ‘나’의 일면이며 일상화될 수 없는 ‘나’의 일면이다. ‘나’는 결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얘기를 주석에 달 수 없다. 수령과 백성을 버리고 소발률로 떠나 거기에 주저앉은 소린타일의 아들이 고통 받았을 것이란 무리가 없는 예상은 ‘나’의 입장에서 채택할 수 있는 최적의 주석이지만, 혹시 행복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 건 오직 ‘그’의 입장에서 가능한 상상일 뿐이다.

 

 

비단 이러한 분리된 존재의 동일성과 양면성은 나와 그의 관계에서 말고도 발견된다.

 

 

낭가파르바트는 산스크리트어로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이다. 문자는 인도와 대체로 같으며 언어는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는 현장의 말 그대로 다른 지역과 달리 시나어를 쓰는 디아모로이 계곡의 주민들은 이 산을 ‘디아미르’라고 부른다. 이는 ‘산중의 제왕’이라는 뜻이다.

 

 

요약하자면 낭가파르바트는 ‘벌거벗은 산’인 동시에 ‘산중의 제왕’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서로 다른 언어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그 산의 양면성을 직시하기에 좋은 예가 된다. 낭가파르바트는 벌거벗은 산인 동시에 수많은 패배와 수많은 절망과 좌절을 체험하고 목격함으로써 ‘산중의 제왕’이 된 것이다.

 

 

작품 말미에서 ‘나’의 상상으로 그것은 더욱 가시화되고 있다.

 

 

하얗게 얼룩이 진 검은 봉우리는 그 모든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고스란히 받은 채 벌거벗고 있다. 바람이 불어오면 눈물처럼 하얀 눈송이들이 바위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벌거벗은 봉우리의 고통과 슬픔과 절망 속으로 걸어간다. 눈물은 그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따뜻하게 감싼다. …중략…그리고 벌거벗은 산으로 붉은 꽃과 푸른 풀과 하얀 샘이 생겨난다.

 

 

즉, 작가는 상반된 존재의 거리감을 극복하면서 거기서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진실과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얼추 비슷한 것 같아서 미묘한 차이를 쉽게 간과해버리는 일이 많다. 그러나 소설 안에서 선택된 단어는 그 미묘한 차이를 십분 활용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 소설 안에서는 유난히 빈번하게 쓰이고 있는 ‘이해’와 ‘인정’이란 단어의 쓰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모두 당나라의 경계 안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히 아는 곳이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문장에서 나는 ‘실(悉)’자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아놓았다. “‘悉’자는 고대 한어에서 ‘알다’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그런데 이 글자의 의미에는 다할 ‘진(盡)’자가 숨어 있다. ‘悉 ’자에는 알아낼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다 알게 됐다는,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게 됐다는 뜻이 담겼다. 혜초의 여행이 실질적으로 끝나게 된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그렇다. ‘나’의 주석에 따르면 혜초는 ‘알아낼 수 있는’ 모든 부분은 다 알게 됐다. 그것을 이해했다고 표현한다. 이해의 사전적 정의는 깨달아 알다.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왜 이러한 표현이 쓰였는가는 점층적으로 이 표현이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여자친구는 당신을 아주아주 많이 사랑했어요.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렇게 기나긴 소설을 썼지만 말이에요.

 

 

이는 ‘나’가 그를 향해 하는 대사이다. 여기서 ‘소설’은 그가 여자친구의 죽음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기 위해 쓰여졌다. 소설의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문장들이 탈락했다는 것은 무엇을 배제한 이해인가를 살펴보아야한다. 그는 여자친구가 본인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서술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정이란 무엇인가. 확실히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다. 깨달음이나 인지의 차원을 넘어선 있는 그대로의 받아들임이다. 이해가 배제된 인정은 일어날 수 있지만, 인정이 배제된 이해는 성립이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서 알지 못해도 받아들일 순 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알기만 하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이해와 인정의 대립은 또 다른 맥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은 그게 고소 증세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구토 증세 때문에 물도 들이켜지 못하는 사람이나 밤낮없이 텐트 속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이 고소 증세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고소 증세라는 걸 이해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공포와 대면하지 않는 것이다. 인정하는 즉시, 자신을 덮쳐 올 불편함과 불안함으로부터 도망치는 행위이다. 이해는 가능하고 인정이 불가한 이런 인물들이 소설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그는 그 돌무더기 위에 작은 돌 하나를 얹었다. 그 행위는 등정을 앞둔 산악인에게는 자신의 자일 한쪽 끝에 죽음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후회는 없어”는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뿐이었다. 결국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친구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생각했거나, 혹은 죽는 순간에도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없었다.

 

 

그는 비로소 이해하려는 일을 그만둔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알 수 없는 일마저도 그대로 인정하는 일인 것이다. 그제야 그는 꿈을 향해 나아갈 수가 있다.

때문에 비로소 이 작품을 여러 번 읽도록 걸리는 한 부분을 해결해 낼 수 있다. 그의 여자친구가 죽기 전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그 부분.

 

 

“풍속이 지극히 고약해서 혼인을 막 뒤섞어서 하는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 …중략…공동으로 한명의 아내를 취하며, 각자가 부인을 얻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투신하기 전에 줄친 문장치고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이 문장은 어떻게 해석되어야만 하는가. 이것은 혜초가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유일한 문장이다. 즉, 이것은 그가 낭가파르바트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문장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그 이후의 세계, 여자친구의 유서에서 그대로 남겨두기로 한 ‘틈’, 여기가 아닌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어야 만날 수 있는 ‘진실’일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삶이란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인과관계로 나열해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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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 - 이수명 시론집
이수명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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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시는 건너가고, 다시 건너오고 있다

―이수명 시론집, 『횡단』

 

 

 

 

 

 

 

시론집을 읽는 동안 여러 장의 사진, 여러 장의 그림, 그리고 음악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늘에서 모자를 쓴 남자들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마그리트나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춤을 추던 이병헌과 이은주를 잔잔하게 이끌던 쇼스타코비치의 두 번째 왈츠가 자꾸만 왔다갔다했다.

 

 

시론집. 너무 무겁고 어려운 첫 페이지였다. 그것이 무겁고 어려웠던 이유는 단지 저 세 글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책의 첫 페이지인 표지를 지나야 어떤 식으로든 말랑한 알맹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이 책은 표지와 친해지는데도 꽤 오래 걸렸다. 때문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문득 은행나무 아래서 횡단을 펼쳤다. 내가 앉은 벤치 근처 인공폭포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물은 꽤 격렬한 속도로 쏟아지고 있었는데 격렬하게 굽이치다 점점 느슨해지더니 공원 입구에 다다라서는 녹조류와 함께 멈춰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온도는 봄, 때는 가을인 날이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약하게 바람이 불었고, 은행잎이 떨어져 내 재킷 안쪽으로 들어왔다. 건너편에서는 계속 드럼스틱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여자애 두 명이서 합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았는데, 드럼은 아니고, 작은 북 같은 걸 연습하는 모양이었다. 잠깐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말하자면, 옛날 어머니들이 다리미 돌에 방망이를 두드리는 소리와도 비슷했는데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악기는 없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악기가 되었다.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마저도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감상적이었다. 그리고 감상에 충분히 젖은 나는 첫 장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말한다는 것, 그리고 쓴다는 것, 발바닥을 들여다본다.

 

 

발바닥에 난 홈들을 생각했다. 나는 늦둥이 막내동생의 발바닥을 기억한다. 엄마의 육아카드에 분홍색 인주를 묻혀 찍어낸 발바닥. 갓 태어난 아이의 발바닥이 보송보송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식물의 뿌리처럼 자잘하게 퍼져 있던 발바닥의 홈을 기억한다.

 

 

나이테나, 나이가 하나씩 늘어나는 것과는 달리 발바닥의 홈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깊어진다는 생각을 한다. 주름이 중력의 방향으로 서서히 추락해 가는 것이라면, 발바닥의 홈은 마치 풍화작용 같다.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시간을 지탱해 나가면서 안으로 조금씩 수렴해 나가는 것. 얼마만큼 걸어왔는지, 견뎌왔는지를 들여다본다. 발바닥을 들여다본다.

 

 

말이 부서져 있다. 통째로 부서져 있다. 너는 말을 일으키는 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 말 속에는 흰 머리카락이 있다. 여기 그리고 저기. 그것을 쓴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 염색을 자주하는 엄마의 머리카락은 이제 거의 절반이 흰 머리카락이다. 염색을 하지 않고 견디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이 될 것 같은데,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씩 뿌리염색을 한다. 흰 머리카락.

 

 

흰 머리카락은 계속 자란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흰 머리카락은 선명하다. 시인은 그것을 쓴다. 멜라닌이 빠져나가 알비노 상태가 된 녀석을 쓴다. 하얗게 불태웠어 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흰 머리카락을 쓴다. 그것은 결백하고 괴로운 시간을 견뎌온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결국 뽑혀 나간다. 뽑기 위해 찾고, 뽑아내기 위해서 쓸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유일함이라거나 희소하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닐 것이다. 검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흰 머리카락을 써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쓰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만드는 것으로 이해의 길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너는 너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관련을 만드는데 너 자신을 남용하고 있다.

 

 

언젠가 글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한 적이 있었다. 김경주의 외계에 나오는 외팔 화가처럼 절벽 위에 올라가 입을 벌리고 있어 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만든 절벽에 나를 올려놓는데에도 한참이 걸렸는데 입을 벌리는 것은 더 오래 걸렸다.

 

 

포기하고 결국 컴퓨터 앞에 앉아선 울먹인 적이 있다. 깨끗한 백지 위에서 일정하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커서를 보니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애석하게도 이것은 아직도 유효하다― 왜 쓰는 것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아팠을까.

 

 

나 자신과 관련도 없는 곳에 나를 남용하고 있다는 뼈아픈 말보다 왜 기다리다 망가뜨리는 것이 슬퍼지는 걸까. 그러나 결국 요는 여기에 있다. 이해의 길에서 멀어지는 것. 자꾸 엉클어진 퍼즐 조각을 제대로 맞추겠다는 마음으로 커서에 뛰어든 내게 없었던 ‘이해’다. 이해에서 멀어져야 직관에 더 가까워진다.

 

 

“매혹적인, 우리는 그 새에 경탄하고 그 새를 죽인다”

 

 

마그리트의 그림 속 소녀가 새를 뜯어 먹는다.

 

 

산 채로 인간에게 뜯어 먹힘으로서 존재의 형식이 무너지는 새, 혹은 그 존재의 형식을 무너뜨리는 소녀 중에서 쾌락은 어느 편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형식의 붕괴라는, 형식의 변화 자체가 쾌락일까? 새가 잔인하게 잡아먹히고 있는데도 이 나무에는 많은 새가 날아오고 있다.

 

 

새는 수많은 형식을 거쳐 우리에게 왔고 온다. 크기, 생김새, 색, 식성이 다른 많은 새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는 많은 새를 잡거나, 보거나, 가두거나, 먹었다. 시는 다양한 새 중에 한 마리를 골라 그 새를 처리 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렇게 살아 있었던 새는, 그러나 결국 시인의 눈, 혹은 손끝에서 죽는다. 시인이 처리한 방법 그대로, 박제되어 말이다.

 

 

이미지는 묶여있고, 말은 풀려있다. 이미지는 사로잡으려 하고, 말은 해방되려 한다. 시인이 사물들에 충분히 매혹되어 있을수록 사물들은 압도적이면서도 모호하고, 순간적이면서도 다면적인 면모를 지니게 된다.

 

 

무엇을 쓰겠다. 그 무엇을 발견한 순간부터 나는 그와 관련한 온갖 지식을 무의식중에 동원하게 된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과이므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에게로 조금씩 무너진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 무엇인가에게 굴복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해서는 안 된다.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가장 마지막에 치러할 단계. 내 앞에 있는 그것은 너무 강하다.

 

 

우리는 꿰뚫어보면서도 관통할 수 없다는 것에 놀란다! 꿰뚫어 본다는 것은, 즉 우리가 어떤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존재가 우리에게 들어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존재들을 가볍게 스쳐 지나칠 뿐이다.

 

 

정면을 피해 돌아 가보면 그제야 녀석의 뒤통수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싸워 볼 마음이 새로 생긴다. 이리 붙어보고, 저리 핥아보면서 나는 무엇에 미친 듯이 몰입한다. 어떻게 이것을 무너뜨릴까 하고. 그런데 무엇은 알듯 모르겠고, 좋은 듯 복잡하다.

 

 

시는 동질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질감을 위해서 존재한다.

 

 

한 대 때려본다. 무엇은 반항이 없다. 한 대 더 때려본다. 뒤집어 본다. 잘라본다. 들여다본다. 간지럽혀 본다. 무엇이 좋아하는 것을 데려와 본다. 무엇을 좋아하는 것을 데려와 본다. 아무리 해도 무엇을 무너뜨릴 방법이 솟아나지 않는다. 포기할까 하고 돌아선다. 그제야 슬며시 일어난 무엇이 내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친다. 뒤통수를 쓸면서 나는 생각한다. 아, 이제 커서를 채우러 가야겠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피상적인 소통이 아니라, 소통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오히려 소통의 어려움을, 그 한계를 일깨우는 것이다. 언어가 지고 있는 의미 전달과 교류의 짐을 내려놓을 때, 언어는 본래의 파동을 되찾을 수 있다.

시는 언어이면서 언어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래, 오로지 언어로만 접근했기 때문이다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언어로 나와야 할 지언정 과정마저 언어일 필요는 없었는데 라는 후회를 얻어맞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다. 언어이기를 포기한 것.

 

 

언어라는 것은 무척 딱딱한 호두알 같다. 어찌나 외형이 단단한지, 단단해서 쪼개버리고 싶고, 쪼갠 뒤에 잔뜩 부숴 놓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부숴 놓고 나면 겉껍질과는 반대로 꽤 고소하고 달달한 속살을 드러낸다. 고통스러운 작업이 반복되는 건 이 이유 때문일까. 그리고 내 힘만으론 절대 이 호두를 부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시는 형태이고 형식이고 스타일이다 40년 넘게 시를 써온 나는 그 동안 시를 쓴 게 아니라 형태와 싸운 거야 등단시절엔 연 구분 있는 시를 쓰고 싫증이 나 그 후 산문 형태를 시도 하고 산문 형태도 지겨워 이른바 단련 형태를 시도했지 물론 이 형태도 지겨워 달련 형태이면서 시행이 가늘고 긴 형태에도 시도하고 이런 형태도 다시 지겹고 그래서 이번엔 변형된 산문 형태를 시도하고 도모하고 기획하고 기도하고 무릎 꿇고 아멘! 하고 비 오는 저녁 의자에서 일어나 방황하고 떠돌고 그러다 또 지치면 이젠 정사각형 형태다 정사각형은 죽음을 상징하지 다음엔 직사각형 형태 그것도 지치면 산문 속에 정사각형을 넣어도 보고 토막 글을 넣어도 보고 그러면서 40년이 간 거야 내 친구들은 언제나 같은 형태의 시를 쓰지만 나는 왜 이렇게 형태 앞에서 형태를 보면서 형태 속에서 형태와 싸우며 형태를 끌어안고 뒹굴고 헤매야 하는가? 결국 그 동안 난 시를 쓴 게 아니라 형태를 찾아 헤맸지「나를 쳐라」부분

 

 

호두를 부수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다. 시인이 40년 간 해왔던 시도처럼 공구함을 계속해서 뒤져야 한다. 내 언어가 호두 수준이라면 이 시인의 언어는 사람 키 만한 바윗돌 정도가 되겠다. 여러 가지 연장으로 자꾸만 깎아 내야 하는 바윗돌.

 

 

미켈란젤로는 돌 속에 작품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 윤곽이 보인다고 말했다. 윤곽을 따라 계속 잘라나가면 마침내 그 작품이 나온다고 했다. 시인도 그렇게 그 돌덩어리에서 형태들을 보았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형태가 아닌, 시인에게만 떠올랐던 형태였을 것이다. 시인만이 알고 있고, 그래서 시인의 연장만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그런 형태였을 것이다.

 

 

나는 이 시론집에서 이 시가 왠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문득 내가 아는 형태가 생각났다.

 

 

올해 마흔 두 살. 10년 동안 사법고시 준비를 하다 그만 두고

현재는 공무원 학원에서 시간 강사를 하고 있는 형태씨.

법대를 나와서, 군에서 장교를 하다가 그만 두고 사법고시 준비를 한 형태씨.

학교 선배의 소개로 특수학교 교사인 부인을 만나 열네 살 아들을 하나 두고,

처음에는 공부를,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공부와 육아를,

아이가 자라면서는 공부와 육아와 살림을 한 형태씨.

 

 

그래서 둘째는 낳을 수 없었던 형태씨.

큰조카가 첫 생리를 한 팬티를 찝찝한 부적으로 가지고,

자신은 팬티가 반들반들해져 구멍이 나 바람이 통할 때까지 공부 했던 형태씨.

결국 사법고시 1차만 내리 붙고,

인생의 마지막 사법고시를 치른 뒤 부인에게 무능한 남편,

아들에게 심심한 아빠가 되고 만 형태씨.

 

 

장손을 낳았다는 핑계로 재산을 어떻게 물려주실 거냐고

묻는 부인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게 된 형태씨.

추석날 하루만 더 자고 가라고 해도 부인이,

오늘 가기로 했어요,

하는 말 한 마디에 바지를 꿰어 입는 형태씨.

진 초록색 구형 중고승용차를 몰고 시골길을 내려가면서

형태를 찾고 싶어 형태를 갖추고 싶었던 형태 속의 형태.

 

 

형태가 되고 싶은 형태들이 자꾸만 떠오른 건 말장난도 말장난이지만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시의 형태를 고민하기 전에, 시에 얼마만큼의 참신한 진실을 담을 것인가가 나 같은 아마추어에게는 더욱 필요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왠지 자꾸만 어떻게 만들어 볼까, 어떻게 형태를 바꿔볼까 하는 고민들이 썩 달갑게 느껴지는 것만은 아니라서 맘이 묵직하다.

 

 

보르헤스의 도서관은 책 A를 찾기 위해서 A의 위치를 지적해 주는 책 B를 참고하고, B를 찾기 위해서 책 C를 참조하고 하며 무한히 이런 방식을 계속해야 한다. 인터넷도 이와 유사하지 않은가? 클릭을 해보라. 우리는 멈출 수가 없다. 우리는 영원히 미끄러진다.

A를 위해서 B를, B를 위해서 C를 찾아다녀야 하는 그의 도서관에서 보르헤스는 어느 서가엔가 이러한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좋을 총체적인 ‘한 권의 책’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물론 그는 이 한권의 책을 찾지 못했다. 분명 우리 중의 누구도 이 책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책이 읽혀지는 순간, 우주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찾지 못했고, 읽지 못했다.

 

 

시인이 말한다. 우리는 영원히 미끄러진다. 어딘가에 정착할 수 없다. 뿌리를 내리를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홈이 깊어지고 우리는 자꾸만 걸어 나갈 수밖에 없고 지구는 그래서 끊임없는 궤도를 돌고 있다. 세상에 총체적인 것이 있다면, 우주는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시인이 얘기한다.

 

 

초등학교 때 쓰던 전과가 떠오른다. 지금도 여전히 있는진 모르겠지만 동아전과, 표준전과가 양대 산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은 없을 것 같다. 정답을 요구당하며 사는 어린 시절이 지금은 좀 바뀌었으리라는 기대 같은 것으로 가늠해 보건데 말이다. 답을 보지 않으면, 그 절대적인 답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지 않으면 힘들어 하던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힘들어 하는 아이들을 견디지 못하는 부모들 때문에 전과는 만들어졌다.

 

 

이 절대적인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아이들을 더욱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이들은 계산하거나 생각하지 않았고, 답을 적어오거나, 전과를 학교까지 들고 와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을 연습했다. 말하자면 착실한 필사였던 것이다. 수학숙제도 자연숙제도 전과가 대신 해주었고 아이들의 성적은 당연히 처참했다.

 

 

우스운 예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한 권의 책에 관한 비유에 그리 모자랄 것이 없다고 여겨진다. 절대적인 한 권의 책이 있어 철학, 인문학, 과학, 예술 등 학문의 전반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한 권의 책만 섭렵하면 된다. 더는 책을 가득 채워 놓은 곳에 불과한 낭비되는 공간인 도서관이 사라져도 좋다는 것이다. 어떻게 될까.

 

 

세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소모하지 않을 것이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멈추고, 당연했던 진리들의 소통마저 사라지고, 곧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에너지가 사라진다. 우주가 멈춘다. 우주가 사라진다.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책에 공간을 할애하고, 인터넷이 발전해도 책을 읽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모레티의 말처럼 모더니티는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에 불과해서 요즘 유행가는 2주면 수명을 다한다고 한다. 이제 모든 것들은 소모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끈질긴 고민은 사라지고, 고뇌의 시간도 자취를 감춘다. 인간보다 더 긴 수명을 가진 것이 없는 시대에서도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만들고, 읽고, 쓴다.

 

 

어떤 시가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일까? 기법이나 형식에 있어서 시적 인식의 방향에 있어서 가장 멀리 나아간 경우가 그렇다. 이후 그를 따르는 후대의 시들이 그를 발판삼아 나아가려 해도 더 이상 거기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세계를 개화시킨 시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현대시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는 발전이 아니라 모방을 낳는 시다.

 

 

그리고 현대시는 쓰여 진다. 현대의 사람들에 의해. 가치가 타락하고, 소모가 당연히 되는 이 와중에서도 창조는 이루어지고, 영속은 일어난다. 그래서 커서의 깜빡임에도 눈물을 흘리는 나약한 나조차도 여전히 이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가 끈덕지게 이 위대한 파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들을 때 언제나 이 근본적인 파괴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들으며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쇼스타코비치를 좋아한다. 물론 대중적인 왈츠곡이나 겨우 바이올린 협주곡 정도를 즐겨 듣는 게 다이긴 하지만 말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시인처럼 파괴라는 파격적인 단어까지 가진 못했지만, 이것은 대단한 변주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전의 왈츠 곡이 따뜻한 오렌지빛의 불이 밝혀진 실내에서 여러명이서 군무를 추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곡은 ―그가 러시아인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조용하게 눈이 내리는 고요한 숲의 한 가운데에서 남녀 한 커플이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좋아서 여전히 쇼스타코비치를 즐겨듣는데, 변주건 파괴건 마음에 와 닿는 것들은 형태를 거스르지 않는 변화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변주, 음표를 한 칸씩 내려 그려 보는 것, 이길 수 없었던 녀석을 간지럽혀 쓰러뜨려 보는 것, 대단히 꽉 차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쏟아버리는 것, 폐허가 된 자리에 나팔꽃 씨를 심는 것, 몸에 있는 홈들을 찾아보는 것, 모나리자의 코 위에 수염을 그려 넣고 그녀의 엉덩이가 뜨겁다고 쓰는 것, 응큼하게 가슴 위로 떨어진 은행잎을 책 사이에 끼워 보는 것.

 

 

시가 건너가고, 다시 건너오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시가 되는 방법이라는 것을 느끼게끔 해 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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