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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깝고도 먼 이름에게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2년 4월
평점 :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장에 꽂혀 있는 책 중에서 한 권의 책을 손가락으로 꺼내기까지의 과정에서 제일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책 기둥의 씌어 있는 책의 제목과 그 제목을 쓴 글씨체이다(서점에서 베스트셀러들은 책의 앞표지도 볼 수 있게 누워있으니 그곳에서는 앞표지와 책 제목이 동시에 영향을 준다)
소설보다는 에세이나 산문을 훨씬 좋아하는 나로서는 책 제목이 일단 내 마음을 두드려야 할 테고 그 제목의 글씨체도 제목에 걸맞은 느낌이어야 한다
이 책이 딱 그랬다
'가깝고도 먼 이름에게'
작은방에 반쪽만 열려 있는 창문 사진의 표지
책을 읽으면서 저자와 내가 비슷한 감정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을 때 그 책이 더 좋아진다
저자 마음 속의 우울이 한가득 담겨 있을 것 같은 이 책의 제목도 표지도 마음에 들었다
책을 덮고 났을 때의 느낌도 같았다
나와 비슷한 사람이구나
p28,29
무심하고 무던하게 환절기를 건너오는 사람들이 늘 부러웠어요. 작은 변화에도 민감한 저는 창밖의 풍경이 달라지기도 전에 퉁퉁 부은 눈과 함께 마른 기침을 뱉기 바쁜 사람이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간이 무겁고 축축하기만 한 건 아니에요. 명료하지 않은 감정과 생각은 제게 글을 쓰게 하거든요.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모조리 쏟아내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흘려보내기에 이 정체불명의 감정은 너무나 커요. 전화기를 드는 대신 하얀 창을 켜요. 키보드를 두드리며 목과 가슴에 걸려 있는 덩어리를 잘게 조각내는 시간은 이 환절기에서만 누릴 수 있는 하나의 축복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던하게'라는 말을 나에게 심고 싶다
무엇을 하던 큰 어려움 없이 몸과 마음이 힘들지 않게 일을 마무리하는 사람을 동경한다
나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얼 하든 시작 전부터 마무리까지 다른 사람보다 마음 에너지를 몇 배를 써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참 부러운 단어이다
작은 변화를 그냥 '작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새로운 것에 대한 두드러기를 겪고 지나가야 하는 나
어떤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는 끝났구나 하는 후련함보다는 그 일을 처리하는 도중 내가 무엇을 실수한 것은 없을까라며 일을 하며 스쳐갔던 '사람'에 대한 고민을 한 번 더 하며 마음을 써야 하는 나
그럴 때면 나도 다이어리를 편다
내 머리와 가슴에 콕 박힌 무언가를 글씨로 쏟아내고 나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p35
나는 늘 무리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어. 좁은 골목을 나란히 걷고 한 그릇의 음식을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지만, 분명 그들과 난 함께는 아니었던 것 같아. 시끄럽게 떠드는 그들 사이에서 나는 늘 조금 더 일찍 웃음기 가신 얼굴로 다른 생각을 했거든.
이 부분을 읽으며 생각난 요즘 나의 최애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주인공인 김지원은 회사 생활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른 사람과 별다를 게 없다
점심시간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적당한 수다, 탕비실에서도 머그잔에 커피를 타면서도 적당한 수다
하지만 그건 그냥 보통 사람들처럼 보이려는 가면이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깔깔거리며 웃고 있지만 그게 진짜 웃음은 아니라는 것
그냥 나도 그들과 달라 보이지 않기 위한 억지 웃음이라는 것
p4 호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문제들이 있어. 하얀 머리카락을 까맣게 칠한다고 해서 하얗게 자라나는 뿌리를 막을 수는 없어. 아무리 애를 써도 제자리를 찾아오는 문제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가만히 멈춰 서서 시간을 두고 바라보는 일이야.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을 때까지.
나는 기다리는 것을 잘 못하고 괴로워한다
결혼 전 기간제 교사 생활을 할 때는 2월은 공고가 난 학교에 서류를 넣고 기다리는 한 달이었다
그 시간이 그렇게 힘들고 괴로웠다
요즘은 건강검진 후 기다리는 시간이 나를 힘들게 한다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문제가 있고 또 그 시간이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하는데 그 시간에 왜 그렇게 힘든 걸까
p115
커피 맛도 잘 모르는 제가 아메리카노보다 천 원, 라테보다 오백 원 더 비싼 플랫 화이트를 척척 주문하게 된 것은 순전히 이름 탓이었어요. 이름으로 마시는 커피도 있냐고 핀잔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플랫 화이트는 마시기도 전에 그 이름을 발음해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을 근사하게 만들어주는 오래된 선호예요.
많은 직장인들이 식사를 마치고 정해진 루틴처럼 카페에 들러 길어서 외우기도 힘든 커피 이름을 대며 주문을 한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돈 낭비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루틴이, 그 외우기 힘든 커피가 우리에게 주는 힘이 분명히 있다
특별히 아주 맛있지 않아도 내가 늘 먹던 커피를 마시며 각자의 일상성을 유지할 수 있기도 하고 커피향이 가득한 카페에서의 잠깐은 우리의 기분을 근사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몇 천 원으로 나의 기분을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충분히 소비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얇지만 책 안에 담긴 내용은 앝지 않다
비 오는 날 읽으면 제일 좋겠다
커피향이 넘쳐 흐르는 카페에서도 좋겠다
작가의 우울이 나에게도 전염됐지만 그 기분이 싫지 않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