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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여자
리지 스튜어트 지음, 하얀콩 옮김 / 숨쉬는책공장 / 2022년 1월
평점 :

책을 받고서 책 표지를 한참을 만져 보았다
표지에 한지를 붙여 놓은 듯 종이의 결이 보인다
붓을 살짝만 대도 종이가 먹물을 빨아들일 것처럼, 책표지의 그림과 글씨가 그렇다
읽기를 시작하기 전 책을 휙 넘겨보니 글보다는 작가의 그림이 많이 실려있다
도톰한 종이에 무채색만 사용해서 무심하게 그린 그림들이 수묵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책은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다
작가 리지 스튜어트를 검색해 보니 동화책을 낸 런던에 사는 일러스트레이터란다
깃을 세운 코트에 목도리를 두르고 주먹을 가볍게 쥔 여자의 시선은 자신의 발걸음보다 한 발짝 앞서가 있다
거리를 걷고 있지만 그 주변의 것들에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생각으로 머리를 꽉 채운 채 갈 길을 간다

난 도시의 걷는 여성들이 등장하는 영화 속 장면을 좋아한다. 특히 198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걷는 장면을 좋아한다. 난 그들이 입은 품이 큰 외투와 패브릭 가방을 좋아한다. 느슨하게 걸쳐 입는 1980년대의 오버사이즈 옷들은 그들의 걸음에 무게를 더한다. ···나는 도시에서 홀로 지내며 삶을 온전히 살아 내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뛴다. ···나는 도시에서 홀로 지내며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 내는 그녀의 모습에 가슴이 뛴다.
"나도, 나도"
한 번도 내가 걷는 여성의 모습을 좋아한다고 표현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부분을 읽고 나도 동감한 것을 보니 나도 그런 여성이 나오는 영화의 장면을 좋아했다
이런 장면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영화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 해서웨이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서 테이크아웃 트레이에 담아 한 손으로는 그것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받으며 바쁜 걸음을 걷는 그 장면
우리나라 영화보다는 주로 뉴욕이나 런던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빅 백을 한 손에 걸치고 무심하게 입은 코트를 휘날리며 열심히 자신의 목적지로 걷는 여성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무기력한 '나'를 뭐라도 해야지 하는 의욕을 갖게 만들어 준다

나는 걸으면서 내 시간에 대해 찬찬히 돌아보고 보내야 했던 이메일을 보내지 않았거나 마감일을 놓친 제출 서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나는 이러한 생각들을 실내에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오로지 실외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실외에서도 곧 흥미로운 어떤 것을 발견하고 정신이 팔리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 부분 또한 동감한다
집에서는 아무리 시간을 들여 엉덩이를 붙이고 의자에 앉아 있어도 조금도 진전되지 않는 일들이 잠깐 나가서 걷고 오거나 그 일거리들을 싸 들고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을 때 집에서와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집보다 더 시끄러운 소음들과 다른 사람들까지 신경 쓰이기도 하지만 왜 일단 집을 나서면 일의 능률이 오르는 건지...
집이 주는 안락함은 일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 나를 약간은 긴장시켜야 일 처리에 속도가 붙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당당하게 나만의 보폭으로 걷다 보면 꼬였던 실타래 같던 머릿속이 조금씩은 풀리는 것을 간혹 경험한다
'걷는다'라는 간단한 행위만으로 무거운 상황을 경쾌한 가벼움으로 바꿔 오늘도 활기차게 보낼 힘을 얻는 건 어떨까?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