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 창비시선 529
김용만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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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인을 만나다

언젠가부터 시가 눈에 들어서 시집을 읽고 인터넷을 뒤져 시를 마구 훔쳤다. 그리고 무례하게도 무단 복사한 남의 시를 내 페이스북 게시판과 밴드와 카카오톡으로 마구 옮겼다. 내가 훔친 죄에 대한 죗값을 치르라고 한다면 사형은 아니라도 상당한 징역형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시 퍼뜨린 공로에 대한 상을 준다고 하면 장려상쯤은 받을지도 모른다.

어쩌다 보니 인터넷에서 알게 되어 시집으로 만난 시인의 얼굴을 보는 행운도 얻게 되었다. 물론 내 주변에 있어서 평소 알고 있는 시인 몇 분은 말고서다. 하지만 깊은 이야기를 나눌 만큼의 진정한 만남을 가져본 적은 없다. 대중 모임에 청중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가 인사를 드리고 악수를 한 이들 몇이 있을 뿐이다. 마음으로는 꼭 만나보고 싶은 시인들 여럿이 있다.

그런데 지난 6월, 자녀들이 시골 펜션에 휴가를 가기로 하여 함께 갔는데, 마침 존경하는 시인이 귀촌하여 아기자기하게 살고 계신 시골집에 가까운 산골 마을이다. 그래서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주소를 여쭙고 방문 일정을 알려 허락을 얻었다.

2. 김용만 시인

대부분의 페이스북 친구가 그렇지만 그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언제인지 모르지만 페이스북에서 그이의 글을 읽게 되고, 그 글에 마음이 끌려 그의 시집과 산문집을 읽게 되었을 것이고, 가까운 벗들에게도 추천하여 함께 읽고 함께 좋아하게 된 것으로 어렴풋이 짐작된다. 그이가 임실에서 태어나 자라고 도시에서 일을 하다가 은퇴하여 완주군 위봉산 부근 어느 산골에 들어와 살고 계시다는 정도를 알고 있었다.

현충일 오후에 그이의 시골집을 찾아갔다. 오랜 벗처럼 반갑게 맞아주셨다. 옛집의 골조를 둔 채 생활 공간만 다듬어 살고 있는 소박한 집이다. 페이스북 게시물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돌짝밭을 일궈 낸 돌로 쌓은 담은 자갈밭에서 자란 내가 보기엔 만리장성보다 정겹다.

그이의 정성으로 가꾸는 채송화와 여러 가지 나무와 마당과 뒤꼍까지 세세히 돌아보고 시원하고 맑은 저녁 공기를 함께 마셨다. 다음 날 날이 샐 무렵 다시 찾아가 새소리 바람소리 들으면서 위봉산 언저리의 임도를 함께 걸었다. 길지 않은, 그러나 나에게는 가장 귀한 시인과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3. 김용만 시인의 새 시집이 나왔다.

며칠 전 새 책의 표지를 페이스북에 소개하셨다. 그이의 삶의 자리를 둘러보고 그이의 전작(前作)을 읽어보고 그이의 삶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기에 많이 기다렸다. 나와는 연배도 비슷하고 출생과 성장기의 삶의 터전이 비슷하여 나로서는 100% 공감하고 쾌재를 부르고 무릎을 치며, 손뼉을 치면서 읽고 또 읽는다. 누구누구에게 나눠주려고 함께 샀다. 주고 나니 또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겨 또 주문한다. 누구나 이런 시들을 읽는다면 가슴 한 자락 깨끗해지고 머리 한구석 맑아질 것이다.

『기역은 가시 히읗은 황토』(창비, 2025. 12. 20.). 제목부터 재미있고, 표지의 그림이 황토색, 아니 향토색(鄕土色)이다. 아래 붙임 책 소개를 읽어보시라. 그러기에 앞서 맛보기로 읽으시라고 몇 편을 소개한다.



움켜쥔 주먹을
폈을 때

핀다

​묵정밭 1

​밭두둑 만들어
강낭콩 심었더니
강낭콩 나고
서리태 심었더니
서리태 나고
안 심은 자리 안 나고
풀이 나더라

​원래 밭 주인은 풀이었더라

못난 시인

​내 아내는 맨날 뭐라 한다
사십이 넘어도
시집 한권 내지 못하고
남의 글이나 읽고 산다고

​시인들아
우리 집에 책 보내지 마라
부부 쌈 난다

똥이 힘이다

오늘 두시 대장 내시경이다
특수 검사라 삼일 전부터 속을 비웠다
사람이 먹는 재미가 얼마나 큰 일인지
먹는 일 없으니 하루 할 일도 없다
먹을 것 없던 시절
배고픈 설움은 오죽했을까
종일 먹는 생각뿐이다
그래도 시무룩한 소양이가 안쓰러워
뒷산 오르다가 어지러워 도중 내려왔다
사람은 똥 없으면 못 걷는다
똥이 힘이다
삼일 굶으니 참 먹고 싶은 것도 많다

이제 나는 뱃속에 똥 하나도 없다

배고파봐야 안다
똥 없으면 못 걷는다
똥 없으면 죽는다

대설

산중의 밤은 일찍 온다
산그늘 따라 금세
어둠이 빈 마을에 내린다
오늘 중부지방에 눈 내리고
내일은 호남지방까지 눈 내린다니
목욕을 하였다
산중 가난한 내 집
자욱이 내릴
흰 눈송이
그 설렘과 고요를 위해



새해 작은 꿈 하나 있다
새벽에 일어나 마당에 나서는 일이다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별들은 언제 잠들고 언제 일어나는지
그 짙은 어둠은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누가 훔쳐 갔는지
꽃씨들은 눈 속에 살아 있기나 한지
산그늘은 왜 마을을 들러 가는지
가난은 어째서 평화로운지
잠시 마당을 서성이는 일이다

오늘 밤은 별이 참 많네,
들어와 책상에 앉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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