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이극로 평전
박용규 지음 / 차송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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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컴퓨터를 통해 세계 정보강국과 문화 강국이 된 동력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한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었으나, 연산군이 탄압한 뒤 400년 간 방치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의 침략세력은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자 했기에 한민족의 정체성인 한글을 쓰지 못하게 탄압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침략세력에 맞서 한글을 보급하는 조직으로 조선어학회가 등장하였다. 이 학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간 인물이 이극로 선생이었다. 그의 고향은 산수가 빼어난 경남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였다. 그는 해방이 된지 60년이 되는 오늘날까지 묻혀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왜 잊어진 인물이 되었는가?  그것은 분단의 장벽 때문이었다. 남한에서는 북한에 올라간 사람에 대해 연구를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일제시기 그의 행적은 묻혀있었다.

 사실 그는 우리민족을 해방시키려고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독립군이 되어 일제와 싸우고 상해에서도 신채호, 김원봉, 이범석, 김동삼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넓히고자 그는 독일로 유학을 갔다. 학업을 하면서도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이미륵과 3.1운동에 가담했던 김법린, 나중에 독립운동가를 변호했던 허헌 선생과 함께 그는 세계약소민족대회에 참여하여 일제의 총독정치을 즉각 중지하라고 절규하였다.

 독일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와 일제가 한글을 완전히 없애 한민족을 말살할 것으로 판단하여 그의 호인 '물불'처럼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한글을 연구하고 보급하는데 동지들과 헌신하였다.  그의 주도로 한글사전 편찬, 맞춤법 통일, 표준어 확정, 외래어 표기법이  통일되었다.

 이러한 민족운동을 하자 일제는 이극로를 포함하여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체포하여 함흥감옥에 투옥하였다. 그는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형을 살다가 해방된 뒤 출옥하였다.  해방이후 우리나라의 형편이 좋지 않아 한글사전(조선말 큰사전)을  출판사 어느 곳에서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극로 선생이 을유문화사를 찾아가 " 그래 한글 원고를 가지고 일본놈들을 찾아가 사정을 해야 옳겠소"라고 울분을 참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극로 선생의 호소에 감동을 받아 을유문화사 정진숙 사장이 '한글 큰 사전'을 출판하기로 결정을 하여 세상에 나왔다. 이 사전은 뒷날 남북한 국어사전의 모범이 되었다.

 이극로 선생이 남한에서 한글보급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을 하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통일운동가들을 탄압하였다. 그래서 그는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북한에 머물렀다. 그래서 해방60년간 남한에서는 잊혀진 존재가 되어 있었다. 이 책은 이극로의 파란만장한 삶이 잘 나타나 있다.  한글을 지독히 사랑한 사람이 이극로 선생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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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니엘라 2012-06-14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분이계시지 안해서면 어떻게 우리민족의자랑스러운한글 있고 이렇게 정보기술이
발달할수 이었을까요 고맙습니다 고루 이극로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