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안나 - 단편
배수아 원작, 변병준 글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을 볼 때면 생겨나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한 장 한 장 책을 넘길 때마다 자꾸 내 손을 쳐다보게 되는 버릇이다. 혹시라도 연필심이 묻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초등학교 시절 미술시간에 4B연필로 새까맣게 칠한 스케치북 가운데를 지우개로 그었던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한 줄로 길게 난 하얀 선은 금방 다시 검어졌다...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다룬 이 이야기와 이 그림은 너무나 잘 어우러진다. 만약 이 이야기를 이 그림이 아닌 다른 그림으로 표현했더라도 이와 같은 느낌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 한참을 그림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시선을 돌린 이야기에서 나는 또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했다. 안나, 노아, 핑크, 그리고 사람들... 모두들 어떤 생각을 갖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 삶을 지켜보면서 많은 생각이 머리 속을 드나들었고 난 한없이 우울해졌다. 어둠이 계속되면 빛이 나와야 하는데, 이 건 점점 어둠 속으로, 영원한 심연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이 때, 한참을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만나게 되는 빛은 핑크이다. 그러나 밤이고 전쟁이며 노아의 쿠바인, 언니와 소라를 우울해서 해방시켜준다고 안나가 믿는 핑크는 모두의 구세주, 희망 같지만, 결코 진정한 빛은 아닌 것 같다. 왜 내 눈엔 핑크가 형광등처럼 보여질까. 마지막 나레이션 '오래지 않아 잊혀질 이런 날들을, 살아간다'는 담담하면서도 한줄기 희망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오래지 않아 잊혀질 날들일까? 나는 아직도 믿어야 할지 말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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