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2650713

분수대] 리버테리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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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아카데미의 주인공은 5전6기 끝에 감독상을 받은 마틴 스코세이지다. 할리우드에선 거의 유일한 작가주의 감독에 대한 아카데미의 뒤늦은 경배다.

이번 감독상에서 강력한 적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 두 사람은 2005년에도 같은 상을 놓고 경쟁했다. 당시 승자는 이스트우드. 묘한 라이벌이 됐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지지자다. 1988년 스코세이지가 '예수의 마지막 유혹'으로 교계와 일전을 벌일 때 이스트우드는 그를 적극 옹호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강력한 믿음 때문이었다.

배우 출신 감독인 이스트우드는 '미국영화의 기적'이라 불리기도 한다. 젊은 날 마초 이미지의 흥행 배우에서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감독이 됐으니 말이다. 배우로서 출세작은 60~80년대 마카로니 웨스턴 '무법자'와 형사물 '더티 해리'시리즈다. 감독으로서는 서부극의 관습을 비튼 '용서받지 못한 자'(1993)와 안락사를 소재로 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5)가 대표작이다. 각각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일찍 재능을 소진하는 다른 감독들과 달리 나이 들어갈수록 작품이 깊어진다. 게다가 팔순을 앞둔 지금까지 현역이다.

작가적 행보에 비해 그의 정치 성향은 종종 논란이 됐다. '더티 해리'는 대표적인 우익 파시스트 영화로 맹공받았다. 평생 공화당원이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과 가깝다는 것도 도마에 올랐다.

이스트우드 본인은 이에 대해 스스로를 '리버테리언(libertarian.자유의지론자)'이라고 규정한다. 프랑스의 영화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50년대 군 복무 시절부터 공화당에 표를 던지긴 했지만 나는 어느 정파에도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차라리 리버테리언에 가깝다"고 말했다.

리버테리언은 미국 보수파의 한 지류로 꼽히지만 모호한 측면이 있다. 토종 카우보이 정신에 근거해 미국식 자유주의의 근간이 되는 한편 좌파와도 어울린다. 미국 좌파의 정신적 지주인 촘스키는 스스로를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자'라 부른다.

미국의 주요 싱크탱크인 케이토연구소는 지난해 경제적 이슈에선 보수지만 개인적 자유에는 진보 성향을 보이는 리버테리언 유권자들이 10~20%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종래의 진보.보수에 묶이지 않는 개념이다. 좌우를 망라해 절대적 자유주의자, 고집 센 개인주의자들이다. 이념 분화 속에 경제적으로는 우, 문화적으로는 좌 편향이 확산돼 가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개념이다.

양성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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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2651785

[분수대] 고노 담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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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8월 발표된 '고노 담화'는 종군 위안부의 존재를 시인하고 사죄를 표명한 일본 정부의 공식 문서다. 당시 관방장관인 고노 요헤이(河野洋平.현 중의원 의장)의 명의로 발표된 담화는 1년8개월간의 조사 끝에 결론을 내렸다. "위안소의 설치는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한 것이며, (중략)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행했지만 감언.강압에 의한 사례가 많았고, 나아가 관헌이 직접 가담한 일도 있었다."

고노 담화가 나오게 된 것은 위안부 강제 모집 사실을 폭로한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증언이 기폭제가 됐다. 요시다는 "태평양전쟁 때 '국민 총동원령'을 집행하는 노무보국회의 야마구치현 동원부장으로 있으면서 조선인 6000명을 강제 연행했고 그 가운데 위안부 여성도 많았다"고 밝혔다. 그의 증언은 91년 아사히 신문에 집중 보도되면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고 한국에서는 위안부 출신 할머니의 공개 증언이 잇따라 나왔다.

하지만 요시다는 이후 많은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저명 역사학자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제주도 현지 조사를 거쳐 "요시다의 말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증거나 증언이 나오지 않았다"며 요시다를 '직업적 작화사(作話師)'로 공격했다. 궁지에 몰린 요시다는 "일부 사례의 시간.장소에는 창작이 가미됐다"고 털어놨다.

이를 계기로 고노 담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일본에서 상당히 퍼지게 됐다. 정계에서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대표적이다. 그는 총리 취임 전인 2005년 4월의 한 강연회에서 "위안부는 요시다가 꾸며낸 이야기이며 아사히 신문이 이를 보도해 독주했다. 일본 언론이 만들어 낸 이야기가 외국으로 번져나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요시다가 강제 동원 사실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다. 그는 자비를 들여 한국 천안에 '사죄의 비'를 세우기도 했다.

고노 담화 폐기 또는 수정론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논리가 있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입증해 주는 정부 공식 문서가 한 건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안의 성격상 강제 동원 사례를 공문서에 기록할 수 있었을 지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에 앞서 살아 있는 피해자들의 증언에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렵다. 강제 연행을 증언하는 위안부 여성은 한국.필리핀.대만.중국 등 아시아는 물론이고 네덜란드까지 수백 명에 이르는 데도 말이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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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마루 2007-03-25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거 방금 퀴즈가 좋다 나와쓰요 ㅎㅅㅎ
 

출처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2652962

[분수대] 선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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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좋은 의도에서 한 일이 뜻하지 않게 나쁜 결과를 빚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환자의 심적 고통을 덜어준다며 병의 상태를 제대로 알리지 않으면 적절한 치료에 대한 판단을 그르칠 수 있다. 고통을 덜어주려는 좋은 의도가 오히려 환자의 고통을 늘리고, 자칫하면 치료 시기를 놓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선의(善意)는 말 그대로 '좋은 뜻'이다. 남을 배려하고 도와주려는 착한 마음이다. 그러나 선의만으로는 의도한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 실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베푸는 맹목적인 선의는 효과도 없을 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 선의가 잘못된 수단과 결합하면 차라리 애초부터 선의가 없느니만 못하다. 특히 선의가 정부나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선심성 정책으로 표출되면 최악의 역효과를 빚는다.

저임 근로자를 보호하자는 취지로 만든 최저임금제는 막상 보호하려는 최하층 미숙련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줄이는 효과를 낳는다. 임금을 올려주려다 일자리 자체를 빼앗는 것이다. 영세상인을 보호하기 위해 도입한 상가임대차보호법은 임대기간 5년을 보장하고 임대료 인상률을 12%로 묶었다. 결과는 5년치 임대료가 한꺼번에 올라 영세상인들의 부담이 가중됐고, 이를 감당하지 못한 상인들은 거리로 나앉은 것이다. 재도입이 추진되고 있는 이자제한법도 마찬가지다. 서민들에게 고금리 부담을 덜어주자는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현실경제를 도외시한 채 이자율 상한을 정할 경우 최하층 서민들은 급전 구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제도권 금융회사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금융의 기회마저 막는 처사다.

저임 근로자를 쓰는 고용주나 영세상인에게 임대한 건물주, 서민들에게 고리채를 놓는 사채업자들이 선의를 베풀면 문제가 쉽게 풀릴 것 같지만 이를 법으로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정부나 정치인들이 모자라는 임금.임대료.이자를 대신 내줄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선의를 앞세워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위선이다.

법률 용어로 '선의'는 도덕적 평가와 관계없이 단지 '어떤 사실을 몰랐다'는 뜻으로 쓰인다. '선의의 피해자'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피해를 본 사람이다. '몰랐기 때문에' 법적으로 보호받는다. 그러나 정책을 다루는 정치인이나 관료가 선의를 내세워 결과를 몰랐다고 강변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선의의 가해자'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김종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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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2654325

[분수대] 혈압과 행복 [중앙일보]

사람의 혈관 길이는 장장 10만㎞. 한 줄로 편다면 지구를 두 바퀴 반 감을 수 있다. 하지만 심장에서 분출된 피가 온몸을 돌아 심장으로 되돌아오는 데 1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물론 수축.확장기 혈압이 80~120mmHg인 정상인의 경우다.

비정상적인 혈압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전후 처리 과정의 일화. 1945년 4월 뇌출혈로 급서(急逝)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10년 넘게 고혈압으로 고생했다. 사거(死去) 두 달 전 영국.소련의 정상과 머리를 맞댄 얄타 회담에서 그의 쇠진한 모습은 역력했다. 비만과 고혈압에 시달리던 처칠 영국 총리도 여독을 풀지 못해 회담 내내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열강의 힘겨루기는 스탈린의 소련 쪽으로 승부가 기울었다는 게 사가(史家)들의 평가다.

하지만 얄타에서 미소 지은 스탈린 자신도 고혈압의 굴레를 떨치지 못했다. 8년 뒤 73세 나이에 그 합병증인 뇌혈전으로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다. '말 없는 살인자' 고혈압은 지위고하와 빈부를 가리지 않는다. 서른 살 이상 한국인 넷 중 한 사람꼴로 고혈압 환자다. 고혈압 관련 질환은 장.노년층 사망 원인의 으뜸을 다툰다. 자각 증상조차 느끼지 못하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을 시나브로 찾아와 거꾸러뜨리는 자객 같은 존재다.

의학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꼽히는 '혈액 순환론'은 '증기기관의 발명' 못지않게 영국이 뽐내는 혁명적 발견이다. 17세기 초반 윌리엄 하비라는 의사의 공로다. '피는 간에서 생성돼 심장을 통해 온몸에 퍼져 소멸한다'는 고대 의성(醫聖) 갈레노스의 학설을 1400년 만에 뒤엎었다.

영국의 한 대학에서 혈압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또 나왔다. 유럽 16개국 1만500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행복은 부유함보다 혈압 수치와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행복도를 혈압으로 재 보면? 언뜻 대량 실업, 빈부 격차, 경제 양극화, 국정 마비, 무한 경쟁처럼 '혈압 올라가는' 말들이 떠오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자살률 최고라니 긴 설명이 필요 없겠다. 그뿐인가. 맵고 짠 음식에, 세계 2위 술 소비국인 데다, 비만.노령 인구는 늘어만 가니 혈압 수치 떨어지기란 더욱 난망. '사회적 고혈압'이 치명적인 합병증으로 도지기 전에 하비 같은 명의(名醫)가 등장해 용한 처방이라도 내려 주길 바라야 할까.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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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ctg=20&Total_ID=2655515

[분수대] 우일촌 [중앙일보]

남송(南宋)의 육유(陸游)는 애국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여러 시 속에는 금나라에 치여 남쪽으로 쫓겨 간 왕조에 대한 충정이 강하게 묻어 있다. 격렬한 항전을 주장하던 그는 42세 되던 1166년 관직에서 쫓겨난다. 타협을 앞세우던 남송 조정 내의 주화파에 의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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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심사를 감출 수 없었던 그는 고향 근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시작(詩作)에 몰두한다. 이듬해 4월 무렵 육유는 집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으로 원행을 나간다. 지팡이 하나를 짚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을 올랐다. 어느덧 산행의 재미에 깊게 빠져들었던 그는 가파른 산등성이를 기어오른다. 이윽고 그가 당도한 곳은 길이 없어져 더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곳.

'유산서촌(遊山西村)'이라는 제목의 시는 그의 절창 중 하나다. 발을 옮기기조차 어려운 곳에서 그가 읊은 대목이다.

'산이 다하고 물길이 끊어진 곳에 길이 없는가 했더니/ 버드나무 어두운 곳, 밝게 피어 있는 꽃 너머로 또 마을 하나(山窮水盡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

이 대목은 중국에서 아주 많은 사람에 의해 애창되는 절구다. 보통 '버드나무 어두운 곳, 밝게 피어 있는 꽃(柳暗花明)'이란 성어로, 혹은 '또 마을 하나(又一村)'라는 명구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시를 뜯어 보면 사람이 더 나아갈 수 없는 경계에 대한 묘사가 빼어나다. 산이 다하고[窮], 물길도 끊어진[盡] 데서 느끼는 막막함이 대단하다. 길이 없는가 의심하다가 눈을 돌렸더니 마주친 곳은 버드나무 우거진 어두운 그늘이다. 시선은 다시 그늘을 떠나 화사하게 피어난 꽃 무더기로 옮겨진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는 곳은 꽃 무더기 너머의 마을이다. 답답함의 경계에서 툭 터진 곳으로 나아가는 시선의 옮겨짐이 분명하다. 읽는 이로 하여금 적잖은 기쁨을 주는 시임에 분명하다.

북핵 문제가 길 막혀 답답한 곳에 이르렀는가 싶더니 버드나무 우거진 그늘로 옮겨졌다. 이제 다시 꽃이 화사한 경계로 옮겨질 가능성이 점쳐진다. 시쳇말로 급물살을 타는 셈이다. 막힌 곳이 갑자기 뚫릴 상황이니 한반도 해빙을 위한 기대가 자연스레 높아진다. 버드나무와 꽃을 넘어 안락한 마을로 옮겨질까 가슴도 설렌다.

그래도 우려는 여전하다. 한국이 빠진 채 북한과 미국이 진행한 협상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미 개발된 핵 문제는 해법이 오리무중이다. 그 위협을 이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손뼉만 치고 있기에는 뭔가 크게 허전하다.

유광종 국제부문 차장


◆알려드립니다◆

남송(南宋) 육유의 시 '산궁수진(山窮水盡)…'에 관한 독자의 문의가 있었습니다. '산중수복(山重水複)…'의 잘못된 표기가 아니냐는 내용이었습니다. 판본에 따라 이 구절은 표현이 다릅니다. 본 칼럼에서는 전자가 성어(成語)로 굳어져 중국 사회에 더욱 잘 알려진 데다 한국에서는 고 양주동(梁柱東) 선생의 '가시리 평설'에 쓰이면서 널리 알려졌기에 그대로 따랐습니다. 아울러 다음 구절 '유암화명(柳暗花明)…' 중 '유암'이 '유음(柳陰)'의 오기 아니냐는 지적이 있습니다. 역시 판본에 따른 차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버드나무 그늘(陰)은 명사로서, 다음 '화명(花明)' 중의 형용사 '명(明)'과 대칭이 맞지 않습니다. 또 '유암화명'은 이미 성어로 굳어진 말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선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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