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사면 유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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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제럴드 포드 38대 미국 대통령은 한번도 선거를 치르지 않고 부통령과 대통령이 됐다. 뇌물 사건으로 물러난 스피로 애그뉴 대신 부통령에 임명된 지 10개월 만인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리처드 닉슨의 뒤를 이어 백악관에 입성했다.

하지만 더 이상 행운의 여신은 포드에게 미소 짓지 않았다. 행운은커녕 취임 한 달 만에 닉슨을 사면해 화를 자초했다. 그는 "나의 양심은 미국의 악몽을 그만 끝내야 할 때라고 말한다"고 호소했지만 국민은 대통령 자리와 사면을 맞바꾼 거래라고 의심했다. 그 여파로 재임기간 내내 휘청거리다 민주당에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미국에서도 사면권은 대통령에게 주어진 헌법적 권한이지만 국민이 납득하지 않는 사면은 대통령에게 큰 타격을 준다. 빌 클린턴은 98년 푸에르토리코의 테러범 12명을 사면했다가 사면권 남용을 의심하는 의회의 진상조사 대상이 됐다. 미국 대통령의 사면 인심이 후한 것도 아니다. 8년씩 재임한 로널드 레이건은 403명, 클린턴은 460명을 사면하는 데 그쳤다.

천황제를 유지하고 있는 일본은 사면 대신 '은사(恩赦)'란 용어를 쓴다. 일본의 은사법은 한국의 사면법 조문과 유사하지만 운용은 천양지차다. 범죄의 종류를 지정해 일괄적으로 형을 면제해 주는 일반 사면이 실시된 것은 45년부터 지금까지 단 12차례에 불과하다. 유엔 가입,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오키나와 환수 등 국가 대사나 왕실의 경사가 있을 때만 이뤄졌다.

사면이 남용되면 안 되는 이유는 자명하다. 삼권분립이란 민주주의 이념에도 부합하지 않거니와 무엇보다 법의 권위를 해치게 된다. 힘들게 붙잡아 심판한 범죄자를 이런저런 명목으로 풀어 준다면 그만큼 법의 권위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사면권 제한을 공약했던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4주년을 앞두고 '또' 사면을 단행했다. 취임 후 일곱 번째, 노태우(8회).김영삼(9회).김대중(7회) 등 전임자들과 큰 차이가 없다. 이처럼 잦은 사면은 왕조시대의 군왕이 말 한마디로 벌을 내리고 면해 주는 것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그런 성은(聖恩)에 망극해할 사람은 혜택을 본 당사자 이외에는 없을 듯하다. "걸핏하면 대량 사면을 통해 국민의 인기에 영합하려 하거나 정치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통치의 도구로 삼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번 사면을 발표한 법무부 장관이 4년 전 학위 논문에 쓴 말이다.

예영준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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