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가부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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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란 뜻으로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 '18번'은 그 어원이 일본의 전통극 가부키(歌舞伎)에 있다. 1832년 당대의 인기 배우였던 7대 이치가와 단주로(市川團十郞)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레퍼토리 18종을 선정한 데서 비롯된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동리(桐里) 신재효는 판소리를 여섯 마당으로 정리했다. 하지만 판소리는 여섯 마당이 지금 남아 있는 것의 전부인데 비해 가부키의 레퍼토리는 수백 종류다.

가부키에도 한 차례 결정적인 위기가 있었다. 1945년 8월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일본에 진주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의 '점령 정책'때문이었다. 주군에 대한 무한 충성과 복수, 할복 자살 등 봉건 시대의 도덕률을 찬양하는 내용이 많은 가부키는 일본을 민주국가로 거듭나게 하려는 정책에 맞지 않는다며 대부분의 공연을 금지시킨 것이다.

가부키를 되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맥아더의 부관 포비언 바워스 소령이었다. 열렬한 가부키 애호가였던 그는 상관에 대한 설득 노력은 물론, 부관직을 그만두고 공연 검열관으로 변신한 끝에 2년 만에 모든 금지를 해제했다. 그는 "만약 독일이 2차대전에서 이겨 런던을 점령한 뒤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중단시켰다면 영국 국민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라며 "가부키는 셰익스피어 못잖은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평가했다.

바워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은 그 이후의 역사가 입증해 준다. 일본을 대표하는 전통예술로 입지를 굳힌 가부키가 지난 23일부터는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극장에 진출했다는 소식이다. 오페라극장의 130년 역사상 초유의 가부키 공연에 관객들의 커튼 콜과 기립박수가 쏟아졌다고 한다. 프랑스 문인 장 콕토가 1936년 일본 여행을 한 뒤 "가부키를 본 것만으로도 나의 여행은 값어치가 있었다"고 했던 호평도 언론에서 재연되고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가부키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은 일본인 관객들이다. 도쿄의 노른자위 땅인 긴자에 있는 전용극장 가부키좌는 연중 만원 사례다. 대대로 가업을 잇는 가부키 배우들은 TV 드라마에도 자주 출연해 인기 스타 대접을 받는다. 도쿄.오사카.교토 등 전국 주요 도시에는 어김없이 전용극장이 있다.

자국에서 대접 못 받는 전통예술이 세계 무대에서 제대로 평가받을 리 만무하다. 올해로 소리 인생 50년째인 안숙선 명창이 며칠 전 인터뷰에서 제대로 된 판소리 전용극장 하나 갖추지 못한 현실을 질타한 사실이 새삼 떠오른다.

예영준 도쿄특파원

*** 바로잡습니다

3월 26일자 35면 '분수대' 본문 중 '동리(桐里) 신채호'는 '동리(桐里) 신재효'의 오기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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