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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물정의 사회학 - 세속을 산다는 것에 대하여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3년 12월
평점 :
어리숙하거나 순진해 보이는 사람더러
흔히, 세상물정 모른다고 한다.
그럼, 이런 사람말곤 세상물정에 밝은 건가?
1990년쯤엔가 나온 베스트셀러 중에
<내가 정말 알아야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란
꽤 긴 제목의 책이 있었더랬다.
이젠 세월이 지나, 세세한 내용까진 기억나지 않지만.
유치원 때부터 어른들과 교과서에서 배웠던
상식과 원칙, 도덕이란 거.
어른이 되고나서도 어릴 때 배운대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고지식하단 소릴 듣기 십상이다.
인적이 드문 한밤중에 홀로 횡단보도에 서서
파란불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어른들의 세상에선
‘어른아이’ 같은 피터팬신드롬 환자가 된다.
한쪽에선, 대단한 ‘바른생활맨’ 나셨어! 소릴 듣기도 하고
또 한쪽에선, 참 잘했어요! ‘양심냉장고’까지 주기도 한다.
세상에 이런 어른도 다 있네, 무슨 천연기념물 취급하면서.
이십대 때 처음, 내가 벌어모은 돈으로 얻은 집.
열 세대가 넘게 사는 빌라 주인은 70대 노부부였다.
계약기간이 끝나갈 쯤, 다른 데로 이사 가게 됐으니
그때까지 보증금 돌려달란 말에 이 할머니,
다음 세입자 들어오면 그 돈 받아서 나가란다.
아님, 이사 먼저 가고 나중에 받아가던지.
젊은 혈기에 순간 빡돌았지만, 그래도 나이든 할머닌데.
최대한 자제하려해도, 격해지는 감정을 숨길 순 없었다.
“뭐라구요! 아니, 그런 게 어딨어요?
계약날짜 끝났으면 당연히 돈 돌려줘야죠.”
그랬더니, 이 할머니 딱하단 표정으로
“총각이 사회생활 오래 안 해봐서, 아직 세상물정을 잘 모르나본데,
원래 다 그래, 누가 날짜 됐다고 집주인이 돈 해줘?”
세상물정. 그래, 그렇구나.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은 이 할머니 눈엔
난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르는,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일 뿐이다.
어릴 때부터 배워온 내 상식의 세상에서 보증금이란,
세입자에겐 당연히 상환을 요구해 돌려받아야할 권리고
집주인에겐 마땅히 돌려줘야할 의무이자, 세입자한테 빌린 ‘빚’이다.
하지만 집주인 같은 어른들의 세상에선
집 가진 자만이 맛보는 보너스와도 같은 것.
집주인에게 보증금이란, 임대업을 그만두지 않는 한
자기가 갚지 않아도 되는 ‘꽁돈’ 내지 ‘종잣돈’ 인 셈이다.
내 보증금은 다음 세입자가 내게 갚아야하는 빚.
카드 돌려막기처럼 빚으로 빚을 돌려막지만
돈을 쓴 집주인이 아니라, 세입자들끼리 서로 돌려막아준다.
열 가구 넘는 세입자가 빌려준 보증금은 꽤 큰 목돈.
할머닌 이 돈으로 은행빚을 갚거나, 돈을 굴리는 지렛대로 쓰시겠지.
그리고 세상물정에 어두운 난, 앞으로 살아가면서 만나게 될
주인집 할머니 같은 세상물정의 고수, ‘인생스승’들을 통해
세상물정을 학습해갈 테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난 내 마음속 세상 밖으로 나와
리얼한 쌩얼, 세상물정 속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갔고
그렇게 조금씩 세상물정에 눈을 떠가고 있었다.
세상물정의 고수들이 가르쳐주는 인생비법(?)을 전수받으면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혼자 유난떨지 말고 남들 사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껏 요령껏 약삭빠르게 살라는.
세상물정 모르던 애송이가 어느 덧,
늘어나는 흰 머리가 자꾸 신경 쓰이는 나이가 됐다.
이제는 제법 세상물정에 밝다고 믿으며 살아왔건만,
이런 내 믿음이 왠지 못 미더운 듯,
저자 노명우는 내 옆구릴 콕콕 찔러댄다.
“그래, 그럼 어디 그런지 한번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