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어떻게 기계가 되었나
장피에르 뒤피 지음, 배문정 옮김 / 지식공작소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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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람이 이리 똑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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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극한의 상황에 놓아둔다면 어떨까?

예를 들어, 사적 언어 논변의 반박을 위한 로빈슨 크루소 논변과,

크립켄슈타인,

"토끼-오리 그림에서 아무리 보아도 토끼 그림만을 보고 오리 그림을 보지 못하는, '의미맹'인 상황",

"축 명제가 너무도 달라서 설득으로 전환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상황".

이런 상황을 비트겐슈타인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2.

이영철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서 이것과 가장 가까운 사례에 대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한 괴상한 상황이 있다 하고, 부인하지는 않았어.

"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라 불리는 LFM에 어떤 기이한 셈법을 예로 들었어.


LFM은 "수학의 기초에 관한 강의"이고 RFM이란게 있어서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이란 게 또 있음.

RFM은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담아둔 뭉치이고 LFM은 거기서 따와서 요약해서 강의를 한 것.

LFM 21강에 기이한 셈법이 적혀 있고, 그 기이한 셈법은 RFM에도 있는데 다음과 같아.







LFM에선 정말로 이것을 논리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란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음.

하지만 이것은 공약불가능성을 긍정하는 듯 한데, 이 공약불가능성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형이상학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점이 있음.

하지만 RFM에서는 조금 더 자세하고 애매한 표현을 쓰고 있고,

이것을 중심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설명해볼까 해.



3.

하지만 그 이전에 이 비트겐슈타인의 LFM과 RFM, 수학철학을 보자.

저 셈법이 나오기 전에는 물렁물렁한 자를 대며 길이를 재는 사람을 예로 들고, 저 기이한 셈법이 나오더니, 나중엔 장작을 무게 대신 대충 대충 쌓은 뒤 넓이로 가격을 매기는 사람을 이야기함. (이 책이 왜 수학자에게도 철학자에게도 인기가 없는지 알 거 같음.)


그리고는 이렇게 말해. "아마도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 단지 그들은... 우리가 의미하는 것과 동일한 것을 의미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는 전혀 상이한 지불 체계를 가지고 있다." 1부 149.

여기서 "단지 그들은 이럴 뿐이다" 식의 말은 2부 74에서 똑같이 나옴.

"(정상적인 셈법에 대해) 나는 이렇게 믿는데 여기에서 위험한 것은 정당화라는 것이 전혀 없고, 그래서 '단지 우리는 그렇게 한다'라고 말해야 하는 우리의 과정에 대해서 어떤 정당화를 부여하는 것이다."



4.

내가 보기엔, 이것은 수학에서의 크랙팟을 이야기하는 것임.

미안하지만 난 크랙팟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능력이 없어. 그래서 여기가 좀 지리멸렬할 거임.

일단 0.999...=1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논하는 사람이 어떤 이미지인지 알면 뭔 말인지 알 거.


"0.999...는 1이 아니라 1에 가까워지는 것이다"는 크랙팟의 한 예임.

수학자들은 먼저 무시하고, 상황이 심각해질 때에서야 엡실론 델타의 정의를 가져와서 제발 이러지 말라고 하지.


하지만 나도 좀 진짜 제대로 알고 싶은 게 있음.

예를 들어, 0.999...와 함께 크랙팟이 가장 좋아하는 주제, 진리표 TFTT.

여기서 뒤의 TT 부분, vacuous truth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이건 수학을 하는 사람들도 넌지시만 암. 그들은 논리학이 아닌 수학을 하는거고, 그들은 논리학자가 아니거든.

하지만 이것은 내가 보기엔 0.999...가 뭔가에 도달한다는 크랙팟같은 말보다, "정당화된 크랙팟", 진짜 진정한 의문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

하지만 수학과로 가는 사람들은 공부하지도, 누가 가르치지도 않음.

이런 말이 있음. "수학을 어느 정도 공부하지 않고 수리논리학이나 수학철학으로 들어가려는 생각은 추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고.



나는 디시인사이드에서 키배를 본 적이 있고, 이게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을 잘 요약하는 거 같아.

한 명은 일본까지 가서 기호논리학 석사 준비중인 사람이었고,

다른 한 명은 아무래도 야갤러였던 거 같아. (앞으로 "정당화된 크랙팟"을 야갤러라고 하겠어. 이 글에선 그게 더 정확한 말인 것 같아.)


둘은 이 vacuous truth에 대해서 논변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 논리학 석사생이 지금까지 우리가 진리표를 공리처럼 보고 써서 문제가 생긴 거다며, 이 디시에서 vacuous truth가 왜 truth인지 오늘 완전히 보여주겠다며 나섰어.

무슨 겐첸? 이라는 사람의 자연 연역? 이라고 하면서 무슨 분수처럼 표기하는 기법을 썼어.

그 석사생이 계속 뭔가를 계속 말하다가 어떤 파트에서 "여기선 이걸 쓰지 않는다. 이것을 쓰는 논리를 paraconsistent logic라고 하는데, 이것을 지지하는 사람은 비주류이다." 라고 했습니다.

야갤러가 그걸 딱 집어서 "어? 왜 paraconsistent logic을 쓰면 안됨? 왜 비주류임? 그거를 쓰면 안되는 이유를 증명해봐"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진리표가 문제라면서 진리표랑 똑같이 말하는 다른 논리를 가져왔는데 이거는 왜 문제삼으면 안됨?"이라고도 했고.


결국 그 논쟁에서 야갤러가 이겼어.



나도 이 야갤러와 비슷하다. 이 vacuous truth에 대해서 이 야갤러같은 결론을 얻었다.


vacuous truth가 있는 이 진리표가 논리학의 기준점이 된 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초기 비트겐슈타인임.

하지만 그의 논고는 서문의 말대로 "나 이전에 이미 다른 사람이 생각했는지는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함.

그래서 더 앞으로 가봤더니, 수학 원리를 쓴 화이트헤드와 러셀이 진리표를 만든 주범이 되는데,

정작 그들은 이것을 그저 "not A then B"라고 아주 소박하게 생각했다고 함...

나도 그런 야갤러들을 상대했는데, 나도 그 때 진리표는 그저 not A then B일 뿐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말야.

(그리고 수학자들 중 그 누구도 자기들의 진리가 그냥 if then일 뿐이라고 믿지 않을 거야.)



5.

여기서 "야갤러 가설"을 세워볼까 함.

"A에서 B를 증명한 어떤 수학자가 있다고 하자. 이때 야갤러는 A에서 어떻게 B가 되는지를 자세하게 알려주라고 말한다. 이것은 정당하다. 수학자는 A에서 C를 증명하고 C에서 B를 증명한다. 이때 야갤러는 A에서 어떻게 C가 되는지를 자세하게 알려주라고 말한다. 이것은 정당하다. 수학자는 A에서 D를 증명하고 D에서 C를 증명한다. 이때 야갤러는 A에서 어떻게 D가 되는지를 자세하게 알려주라고 말한다...

시간이 지나 수학자는 1+1이 2이기 때문에 1+6이 7이라고 말한다. 이때 야갤러는 1+1이 왜 2인지를 자세하게 알려주라고 말한다."


다른 수학철학자들이 뭐라 말할지는 저는 모르겠지만, 비트겐슈타인만큼은 여기서 아주 좋은 논변을 하나 낸 것임.

"애초에 수학자들에게 '최종적인 정당화'는 없다. '단지 우리는 그렇게 한다'".


바로 이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정당화에 대해 왜 그렇게 논했는지가 드러남.

물렁물렁한 자, 기이한 셈법, 장작을 대충 값매기는 사람만큼이나 우리가 계산과 증명에 있어 정당화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이 야갤러가 0.999...와 vacuous truth만큼이나 좋아하는 주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ZFC임.

나는 너무나 많은 야갤러가 이상한 데로 끌려들어가서 "수학자들의 ZFC는 정당화가 될 수 없다! 나는 새로운 공리계인 ZFCB를 제창한다! 추가된 공리는 1=2라는 것이다! 나는 리만 가설을 증명했다!" 따위의 말을 하는 것을 봤어...


기존의 괴델과 같은 플라톤주의자나 fictionalism인 경우 이런 야갤러를 전혀 대처하지 못함.

그때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은 이렇게 말할 수 있어. "어디 그걸로 수학 한번 해봐. 될까?"



6.

나는 이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이란 책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이 "최종적인 정당화" 부분만큼은 이해가 감.

그 부분은 다음과 같음. 1부 113-151, 2부 1-19(아님 31?)와 74, 5부 1-13.


그리고 사실, 이 부분만 안다면 철학적 탐구에서 쓰인 수학철학은 다 볼 수 있음.


레이 몽크의 평전을 보면 철학적 탐구는 1-188까지 확실히 써진 상태에서 189에서 잠시 나오는 수학철학의 문제 때문에 10여년간 거의 미뤄져 있었다고 함. 그 10여년 뒤가 되어서야 수학철학을 거의 포기하는 대신 규칙 따르기를 쓰는 방향으로 써졌다고 하지.

RFM에서 122-130은 철학적 탐구 191-197과 대응됨. 저는 여기서 RFM 124, 탐구 192에 주목하고 싶음.

여기서 사람들이 어떤 초-표현을 사용하도록 유혹받는다고 하고, 탐구에서 이것을 철학적 최상급이라 부른 뒤 이것이 잘못된 길일 것이라 넌지시 말합니다. 이것은 흔히 크립켄슈타인이라 부르는 탐구 201과 아주 큰 관계가 있는 거 같아.


비트겐슈타인과 수학철학의 관계는 정말로 미묘함.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시작한 이유는 러셀의 수학의 논리주의 때문이었고,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다시 시작한 때 브라우어가 수학의 직관주의를 주창했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가장 벽에 막힌 이유가 수학철학 때문이었고,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의 맨 마지막은 수학철학을 말하기 직전이지.



7.

다른 철학자들을 비판할 때임.


이 야갤러 가설을 생각한다면, 아마 인류 역사상 가장 역대급으로 야갤러의 떡밥에 물려 낚여버린 사람들을 알 거야.

화이트헤드와 러셀이 바로 그 사람들이지.

사실 1+1=2의 증명이라는 수학 원리의 300여쪽 뒤에 나오는 54.43은 1+1=2의 증명이 아님. (그건 서수고 기수는 나중에, 200여쪽 더 뒤에 있는 110.643이 1+1=2의 증명임)


(비록 환원 가능성 공리 등으로 논고에서도 같은 취급이었지만) RFM에서 비트겐슈타인은 2부 1-19에서 그것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말해.

수학 원리는 잘 모르지만, 페아노 공리계를 예로 들어봄. 0을 첫 자연수라 하자. 페아노 공리계는 0'을 0 다음 수, 0''을 0 다음 다음 수... 처럼 정의하고 자연수를 정의함. 그 뒤 1+1=2를 증명함. 비트겐슈타인은 페아노 공리계는 이미 다 아는 걸 다시 보여주는 것 뿐이라 말함. 예를 들어 5+7은 0'''''+0'''''''일텐데, 그저 우리가 기존에 했던 '를 세는 거와 다른 게 뭐가 있냐고, 순환논리라고 말하는 거지. "최종적인 정당화"는 없다.


크립키도 좋은 사례임.


여기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사람의 말을 들었는데, 나는 그 이유가 정확히 수학 때문이라고 생각함.

위에서 말한 저 초-표현이 없다는 말이, 언어 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그럴듯하나, 수학 쪽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겐 전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임.

아직 파리 미터원기가 1m의 기준일때 탐구 50은 잘못되었다, 고 크립키는 생각했던 거야. 그 뒤 바로 기존 철학자들의 선험성으로 들어가지.

탐구 201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무슨 엄청나게 강력한 회의주의다 뭐다 하는데, 그저 초-논리가 없다는 말에 불과하지만, 이것마저도 크립키를 포함한 모든 이과생들을 곤두세울 수 있을 거야.



8. 튜링, 슈펭글러, 수학과 정당화, 문화전달


비트겐슈타인이 살아있는 시절에도 야갤러가 있던 것 같음.

비트겐슈타인이 본 야갤러 중에서 최악의 야갤러는 바로 프레이저였음.


비트겐슈타인은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에 관한 소견들"에서 프레이저를 말그대로 "극혐"함.


예를 들어서 이런 게 있음.

고대 시기의 불가리아에서는 여성이 어린아이를 입양할 때 그 아이를 치마 속에 넣고는 그 뒤론 그들의 전 재산을 상속받았다고 해.

프레이저는 이 일을 주술의 일부로 봤어.

비트겐슈타인은 프레이저가 이것을 주술로 본 것은 이것을 오류의 일부라 생각했단 거고, 오류라 생각했다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해.


또 다른 예로, 아프리카의 한 부족에선 비의 왕이 있다고 해.

그 부족이 사는 지역은 3월 말쯤에 우기가 온다고 하고, 3월 말이 될 때마다 그에게 빈다고 해.

프레이저는 이걸 의식이라고 보고, 그들은 신앙이 비가 오게끔 한다고 믿는다고 봤어.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이렇게 물어. 그들이 왜 하필이면 우기에 빌겠냐고, 진짜 그렇게 믿는다면 건기에 빌지 않겠냐고.


이것으로 우리는 행위와 다른 행위의 유사성만이 확인이 가능하고, 유사성 이상의 것을 확인할 수 없다고 해.

그들이 말하는 주술과 의식의 의미는 우리가 하는 키스가 가진 의미나 다를 바 없다고 말해.

프레이저는 이것을 모르고 그저 이론을 가져다 일반화하고 수학화해서 설명해댔으니 "미개인들보다 훨씬 더 미개하다"고 말함.


비트겐슈타인은 마치 "유사성 근본주의자"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고,

이것으로 현대의 한 근본 경향을 비판하려 해. 그것이 바로 수학인 거야.

지금도 만연한데 비트겐슈타인이 수학철학을 쓸 때는 얼마나 수학철학자들이 오해가 많았을까. 수학에서 흔히 더 엄밀하게 증명한다고 하는 해석학이라 한들, 역사적인 관정으로 본다면 이것은 그저 더 엄밀한 정당화에 불과했어(a radical approach to real analysis 참조). 20세기 러셀 이후로, 다시 초-표현, 철학적 최상급인 집합론, 괴델의 플라톤주의가 나와서 라이프니츠가 말한 보편기호학, 더 넓게 잡아 움베르토 에코가 "완벽한 언어", 아니면 단적으로 말해 신성시했던 그때 그대로 그 잘못된 길로 가고 있으니 당연히 막고 싶어 했겠지.



9.

그가 대안으로 삼은 자는 슈펭글러임.

분명 "프레이저의 '황금 가지'에 관한 소견들"이나 "Big Typescript"에선 슈펭글러를 언급했는데,

이것이 "조망가능성(혹은 일목요연한 묘사)"과 "세계관"이란 개념으로 남아 있어.

철학적 탐구에는 오직 122에 있지만, RFM에서 얼마나 다양한 곳에 "조망가능성"이란 말을 썼는지를 보면 일단 아주 노력을 한 듯해.


"세계관". 세계관이란 단어가 있어. 슈펭글러가 원조인 이 단어가 비트겐슈타인에게 어떻게 쓰이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철학을 알 수 있어.


이 슈펭글러에 대해서는 말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서 3가지 조각글로 대체해야겠음.


A -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에서 르네상스 시기, 고전 시기, 계몽주의 시기로 나눠서 르네상스 시기에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다 유사성으로 생각했다는 말이 나옴. 거기서 벨트안샤웅이라는 말이라든지, 르네상스를 넘어서 탁시노미아 유니버살리스를 제창한 사람이 린네라는 점, 괴테의 형태학이 린네를 부정하기 위해 나왔고 슈펭글러가 그 괴테를 따른 점... 을 볼 때 말과 사물의 2장이 비트겐슈타인을 읽는 데 큰 도움이 될 거 같다고 생각해.


그 "유사성 근본주의자"로서 슈펭글러는 어떤 글을 썼는가.

B - 슈펭글러가 그의 주저 "서구의 몰락"을 쓸 때 가장 처음 한 일이 문명 간에 "수학"이라는 개념이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다르다는 것이었고, 이것에서부터 문명 각각에서의 논리와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전개해.


그 "수학"이 비트겐슈타인에겐 "논리학"과 거의 같음을 생각하면 이 글은 인상깊다.

C - Big Typescript에서의 한 조각글. "어떤 사람이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발견했다고 믿고, 이제 모든 것은 아주 쉽다고 자신에게 말하고자 한다면, 그는 단지 다음과 같은 점을 기억하기만 하면 자신이 반박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해결'이 발견되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는 것; 그러나 그 시대에도 사람들은 살 수 있었음이 틀림없고, 그 시대에 비추어 보면 그 발견된 해결은 우연처럼 보인다는 것 말이다. 그리고 이는 논리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약 논리적(철학적) 문제들에 대한 하나의 '전대미문의 해결'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단지 다음과 같이 훈계해야 할 것이다. 즉 그것들은 실로 한때 해결되어 있지 않았다고 (그리고 또한 그때도 사람들은 살고 사유할 수 있었음이 틀림없다고) 말이다."


"How much indeed I am influenced by Spengler in my thinking." (Wittgenstein Nachlass에서 125 31v 1 Apr, 1942)

(이 파트가 너무 지리멸렬하지만 도저히 바꾸기가 힘들다!)



우리는 너무나 야갤러적인데,

수학과 이론은 미개함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개함의 "가장 새롭고 가장 고귀한 형식 자체"인 거임.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야갤러 가설"과 같은 수학의 확실성에 대한 문제임.

비트겐슈타인이 가장 마지막에 썼던 글인 "확실성에 관하여"가 바로 그것.

이것에 대해 말하기엔 너무 길어진 거 같다.


("슈펭글러는 너무나 형이상학적이고 반증 불가능한 이론을 말한 사람이다. 왜 이 사람의 말을 따라야 하는가?" 라 한다면, 이 뒤에 글을 쓰겠지만, 이렇게 말해야겠음. 몇몇 부분에서 너무 긴박하다고.)



10.

그래서 공약불가능성은 어떻게 될 것인가?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에서 나온 글들 중에서, 공약불가능성을 가리키는 듯한 이 글이 눈에 띄였어.


"(위에 나온 1부 149 바로 뒤) 150.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사회는 아마도 우리에게 동화 속의 "현자들"을 상기시켜 줄 것이다.)"


나는 이 글이 뭔가 알아챘음의 표식이라고 봐. 비트겐슈타인은 공약불가능성이 전혀 새로운 형태의 형이상학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점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여기서 현자들이라는 말을 씀으로써 그것에 대해 그 이상한 사람들이 더욱 멀어지지 않게 전략을 취했다고 봐.

(그리고 이것이 오히려 현실적이겠지. 촘스키의 보편문법을 거부하는 피다한 족.)


비트겐슈타인이 또 공약불가능성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적어도 두 개 있고, 굉장히 이상한 부분에 있음.

문화와 가치 MS 138 32b.


"사람들이 유머에 대해 같은 감각을 갖고 있지 않다면 도대체 어찌 될까? 그들은 서로에게 올바로 반응하지 않는다. 그건 마치 어떤 사람들 가운데에는 남에게 공을 던져 보내고 또 그 사람은 그 공을 잡아 되던져야 하는 풍속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 공을 되던지지 않고 주머니 속에 쑤셔 넣는 것과 같다.

또는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취미를 전혀 헤아릴 줄 모른다면 어찌될까?"


유머에서 공약불가능성이 있다고 본 거야.



내가 보기엔, 비트겐슈타인은 공약불가능성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 듯해.

"공약불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국소적인, "문화적인" 공약불가능성은 아주 가까이에 있다."

유머란 것은, 프레이저라는 그 최악의 야갤러가 "주술"이라 칭한 것과 가깝고,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키스와 같은 것이지.

그리고 슈펭글러의 용어였던 세계관과 함께 생각해본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이 명언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어.


"유머는 분위기가 아니라 세계관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치 독일에서는 유머가 말살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면, 이는 사람들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그런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깊고 중요한 어떤 것을 뜻한다."







0.

(요약 아닌 요약)


"문화와 가치"에 있는 이 말은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길지만 인용하겠다.



"나는 예수를 "주님"이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심판하러 온다는 것을 나는 믿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말해 주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전혀 다른 삶을 살 경우에만 나에게 뭔가를 말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 같은 사람마저도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기울어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말하자면 생각을 굴려 본다. 그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는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덤에서 소멸하였다. 그는 죽었고 소멸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다른 모든 선생과 마찬가지로 일개 선생이고, 더는 도와줄 수 없다. 우리는 또다시 고아가 되고 홀로 된다. 그리고 우리는 지혜와 사변으로 만족할 수 있다. 우리는 말하자면 단지 꿈만 꿀 수 있는, 그리고 말하자면 덮개 같은 것에 의해서 천국으로부터 차단된, 지옥에 있다.


그러나 내가 실제로 구원받으려면, 나는 지혜, 꿈, 사변이 아니라, 확실성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확실성이 신앙이다. 그리고 신앙이란, 나의 사변적 지성이 아니라, 나의 가슴, 나의 영혼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나의 추상적 정신이 아니라 나의 영혼이, 그 열정과 더불어, 말하자면 그 육체와 피와 더불어, 구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사랑만이 부활을 믿을 수 있다. 또는: 부활을 믿는 것은 사랑이다. 우리들은 말할 수 있으리라: 구원하는 사랑은 부활조차도 믿는다: 부활에조차 꽉 매달린다. 의심에 맞서 싸우는 것은 말하자면 구원이다.


그때 모든 것은 달라지며, 또 당신이 지금 할 수 없는 것을 그때 할 수 있다 해도 '하등 놀랄 일이 아니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요약한다.

그는 정말로 확실성을 서술하고 싶어했다.


첫째로, 그는 프레이저에 대해 정말 격노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가 그 당시 러셀로 대표되는 그 당시의 방식으로 고대 문화를 이론화하여 설명하려 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에게 그 "미개인"들의 문화는 우리의 문화와 같았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우리가 왜 키스를 하는지 이론화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두번째로, 비트겐슈타인은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확실성인 수학의 원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그는 이 수학철학을 "철학적 탐구"에 넣으려고 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을 본다면 정말 극도로 이 문제를 풀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원하던 것은 바로 이것이다. "수학의 확실성이 정말로 그렇게 확실한가? 수학의 확실성은 왕의 대관식만큼이나 확실하거나 확실하지 않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암으로 죽게 될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가장 말하고 싶어한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확실성에 관하여"이다. 이것은 분석철학에서 다루는 "축-명제 혹은 힌지-명제"나 "hinge epistemology" 같은 것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확실성 뿐만이 아니라 문화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키스는 우리가 이론화하려고 하질 않는다. 이것은 그저 문화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기쁨을 얻을 정도로 완전히 "내장되어" 있다. 확실성과 "힌지"가 바로 이런 것이다. "확실성에 관하여"에선 아예 "힌지"를 "1+1=2"와 연결짓는다.

"철학적 탐구"의 첫머리부터 무엇인가를 말하려 한다 - "진보란 대체로 그 실제보다 훨씬 위대해 보이는 법이다."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처럼, 우리는 수학으로 발전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슈펭글러는 문명 간에 "수학"이 다르다는 것을 이론의 첫머리로 삼았다. 문화는 언제나 그들만의 수학을 가지고 있다.

우리 문명은 수학이 세상의 모든 것에 빛을 비추고 다른 문명의 환영들을 부숴버리는 존재로 생각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것이 절대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의 세번째 논문과 같이, 이 수학은 미개함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개함의 가장 새롭고 가장 고귀한 형식 자체이고, "진리에의 의지"를 믿는 종교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명의 가장 강력한 확실성인 수학에 시험삼아서라도 한 번 의문을 취해야 한다.

힐러리 퍼트남의 "rethinking mathematical necessity"를 참조했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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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글을 잘 쓰던 블로거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며칠마다 한 번씩 감명깊은 글을 쓰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후로는 글을 쓰는 기간이 많이 길어진 때였습니다.

어느날 그 블로거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계속되는 고통에 둘러싸여 더 이상 걸을 수 없고

해결 방법이 더 멀어져 더 이상 볼 수 없으면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든다."


처음에 이 글을 봤을 때는 왜 행시에 합격했는데 이렇게까지 썼을까 하는 거리감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글은 이 문구에 대한 하나의 주석입니다.









그림 형제의 우화 중 "어부와 그의 아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부는 낚시를 하다가 넙치를 하나 잡았습니다.

그 넙치는 말을 할 수 있었고, 소원을 들어줄 테니 나를 풀어주라고 말했습니다.

어부는 넙치를 풀어줬습니다.

어부는 이 이야기를 그의 아내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지저분하고 누추한 집에서 살고 있는 그의 아내는 이 집을 바꿨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어부는 넙치에게 그 소원을 말해주었고, 넙치는 그 소원을 들어줬습니다.

근사한 집이 생긴 그의 아내는, 그러나 집이 더 컸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어부는 넙치에게 그 소원을 말해주었고, 넙치는 그 소원을 들어줬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근사한 성이 생겼음에도 불행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자기가 여왕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어부는 넙치에게 그 소원을 말해주었고, 넙치는 그 소원을 들어줬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여전히 불행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끝내는 해와 달이 뜨는 광경을 견딜 수 없다며, 나의 허락 없이 해와 달을 뜨고 지게 할 수 없다면 도무지 행복할 것 같지 않다고 말합니다.

넙치는 소원을 들어주는 것을 포기하고 어부와 그의 아내는 다시 누추한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어부의 아내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계의 어떤 것이 어떻게 있느냐가 그의 아내를 불행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세계 자체가 있다는 것이 그의 아내를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어부의 아내처럼 욕심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어부의 아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던 적은 있습니다.

우리들은 한번쯤 순전히 세상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가장 혼란스럽고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대체 무슨 가치가 있냐는 생각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리는 질문 하나를 합니다. "대체 삶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는 사실의 영역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의 영역인 세계의 한계에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바꾼다면, 그것은 단지 세계의 한계들을 바꿀 수 있을 뿐이지, 사실들을 바꿀 수는 없다. 즉 언어에 의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바꿀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서, 그렇다면 세계는 선악의 의지를 통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세계는 전체로서 이지러지거나 차야 한다.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에게 세계는 다르게 주어집니다.

행복한 사람에게는 세계가 이지러집니다.

즉 세계의 한계가 소멸하고 투명해짐으로서 세계를 세계 그 자체로 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계를 세계 그 자체로 봄으로서 일어난 일을 오직 일어난 일로 보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따릅니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세계가 차오릅니다.

불행한 사람은 세계에 일어나는 일에 부딪힙니다.

불행한 자는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가치로, 삶의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세계의 한계들만을 맞닥뜨립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가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이것은 받아들이기에 너무 버거운 논변이지만, 이 문구로부터 어떤 작지만 무시할 수 없는 윤리적 속성이 강조되었습니다.

세계가 나의 의지로부터 독립적이라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로부터 행복해질 지 불행해질 지,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지 부딪힐 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게 됩니다.

어떤 특정한 윤리적인 문제는 세계 자체에 대한 관점, 세계관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특정한 윤리적 문제는 삶의 의미를 묻는 행위와 큰 관련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서 5장에 나오는 문장 “그분께서는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를 생각해봅시다.

행복한 사람은 비가 내리는 것을 비가 내리는 것으로,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단지 일어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에 반해, 불행한 사람은 비가 왔을 때 이를 삶의 의미와 연관짓습니다. "내가 왜 이런 수난을 받아야 하지?"라고,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같은 이유로 해가 내리쬐는 때에도 불행할 것입니다. 어부의 아내처럼 불행할 것입니다.




예전에 글을 잘 쓰던 블로거가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며칠마다 한 번씩 감명깊은 글을 쓰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행정고시에 합격한 이후로는 글을 쓰는 기간이 많이 길어진 때였습니다.

어느날 그 블로거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계속되는 고통에 둘러싸여 더 이상 걸을 수 없고

해결 방법이 더 멀어져 더 이상 볼 수 없으면

사람은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든다."


처음에 이 글을 봤을 때는 왜 행시에 합격했는데 이렇게까지 썼을까 하는 거리감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확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 동어반복입니다.

불행한 자라는 것은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그 어떤 답도 얻지 못한 채 그 문제들에 부딪힙니다.

행복한 자는 보통 인생의 의미를 찾지 않습니다. 세계에 그의 의지가 부딪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찾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부의 아내처럼 소원을 빌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질문을 하려고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기대하려고 합니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가치 있는 삶을 어떻게 사는가, 더 잘 사는 법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합니다.

여기서 답변을 받으려는 욕구는 어부의 아내가 소원을 이루려는 욕구보다 더 강할지도 모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우리는 어부의 아내처럼 불행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대체 삶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되어 있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런 물음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

삶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의 소멸에서 발견된다.

(이것이, 오랫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이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이에 더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회의주의는, 만일 그것이 물음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의심하고자 한다면, 반박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이란 오직 물음이 존립하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고, 물음이란 대답이 존립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또 이 대답이란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그 수많은 문구들을 통해서 보이고자 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물음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물음을 던지는 것은 오직 무의미하다는 점 말입니다.

그의 목표는 물을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자기 스스로 경계지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물을 수 있는 질문은 자연과학적인 질문 뿐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같은 물음은 대답되어 있지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듯이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되어도 삶의 문제는 전혀 건드려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로 대답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삶의 문제의 해결이라고 말입니다.

삶의 문제에 있어 어떤 해결 방법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삶이 문제를 준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음으로서 해결됩니다.

그럼으로서 달이 이지러지듯이 삶의 문제는 소멸합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고, 더 이상 볼 수 없어도 삶은 이지러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물음(혹은, 비종교적으로 말해, 삶의 진정 가치있는 물음)과 그 답변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좋은 지적이라 볼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질문과 답변은 “현문우답”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현명한 질문에 어리석은 대답이 나오는 것, 이것은 종교적인 물음을 생각해봤다면 한번쯤 부딪혀본 것입니다.

개도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이나, 아이에게도 원죄가 있느냐라는 진정 날카로운 질문 앞에서, 답변은 절대 그 질문보다 명료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현문우답과 가장 비슷한 사례는 선불교의 어록들일 것입니다.


“한 중이 조주 스님에게 ‘갓난애에게도 육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고 물었다. 조주 스님은 ‘급한 물살 위에 공을 던지게’하고 대답했다. 그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 중은 투자 스님에게 다시 물었다. ‘급한 물살 위에 공을 던지라니 무슨 뜻입니까?’ 곧 투자 스님은 ‘염마다 조금도 멈추지 않고 도도히 흘러간다네’ 하고 대답했다.”


"한 스님이 '어떤 것이 불법의 큰 뜻입니까?'라고 묻자, 임제스님이 곧장 '할!' 하고 고함을 벽력같이 질렀다. 그 스님은 절을 하였다. 임제스님이 말했다. '이 스님과는 그래도 말을 나눌 만하구나.'"


(삶의 의미에 대해 물어본 사람이라면 자주 경험했던 것처럼)

진정으로 가치 있는 물음에 대한 답변은 정말 이상할 것이라고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휘파람을 부는 것과 같이, “급한 물살 위에 공을 던지게”와 같은 이상한 말과 같이, 말이 아닌, 말과 전혀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 다시 말해 그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한 문제는 언어적인, 경험적인 것과 관계가 없는 것 같다는 점을 주목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여기서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언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모든 사람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던 사람은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부딪히는 것이었고, 이러한 정신을 깊이 존경하지만, 절대적으로 희망 없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진짜 중요한 것 앞에, 침묵으로 일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행복한 사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피합니다. 그는 삶에 대한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eschew)”습니다. 그리고 오직 자연과학적인 질문만을 질문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불행한 자라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그 어떤 답도 얻지 못한 채 그 문제들에 부딪칩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처음부터 그런 삶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았던 사람이나, 이것이 대답될 수 없는 질문임을 깨닫고 그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은 사람을 뜻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저는 “유한주의자”라고 하겠습니다.

이론의 유한성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인간의 유한성을 다룬 사람이었습니다.

세계 앞에서 던지는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세계에 부딪혀서 외치는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질문 대신

세계의 모든 것을 세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나의 의지를 세계와 일치시킨다면,

세계 앞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인다면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한 질문에 대해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음으로서

불행한 삶에서 행복한 삶으로 거듭나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는 모든 분께 이 글이 도움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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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쓰는 데 도움을 준 논문은 다음과 같아.

Stephen Mulhall 교수의 Words, Waxing and Waning: Ethics in/and/of the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이영철 교수의 언어의 한계와 그 너머,

이영철 교수의 종교적 믿음과 언어,

김영건 교수의 과학과 형이상학 -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중심으로.


그 중에서도 Stephen Mulhall 교수의 Words, Waxing and Waning: Ethics in/and/of the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은 아주 큰 역할을 했고, 원래는 이것의 번역을 생각했지만 내가 너무 부족했어.


https://blog.naver.com/sellars/100030651718

이곳에서 6.4-6.54에 있는 문구에 대한 좀 더 자연스러운, 더 평문적인 번역을 볼 수 있어.

읽는 데 이것이 더 좋을 수도 있으므로 추천해.


논리철학논고를 안 읽은 사람에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쓰려고 노력해봤지만 이 글은 이미 선을 한참 넘은 거 같아...

책을 펼쳐서 1-2시간정도 앉아서 본문과 같이 읽는 게 이 글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 같아.

내가 부족해서 미안해.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로 논리철학 논고를 마친다.

그는 그 문구를 쓰기 직전 윤리에 대한 내용을 제시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서문에 이 문장을 포함하려 했으나, 편집자가 제거했다.

그러나, 이 부분이야말로 논리철학논고의 목표를 가장 잘 보여준다.

‘나의 작업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 한 부분이며, 내가 써 놓지 않은 모든 것을 거기에 더하면 된다. 그리고 중요한 부분은 바로 그 둘째 부분이다. 내 책은 윤리적인 것의 영역에 대하여, 말하자면 그 내부로부터 한계를 긋는 것이며, 나는 이것이 그런 한계를 긋는 단 하나의 엄격한 방법이라고 확신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윤리학의 정의는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나온다.

“이제 ‘윤리학은 좋은 것에 관한 탐구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저는 윤리학은 가치 있는 것에 대한 탐구, 또는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윤리학은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 또는 삶을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한 탐구, 또는 올바른 삶의 방식에 대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윤리학은 곧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를 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6.4 모든 명제들은 가치가 같다.


이 뜻은 6.53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6.41 세계의 뜻은 세계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나는 그대로 일어난다; 세계 속에는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 그리고 만일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도 지니지 않을 것이다.

가치를 지니는 어떤 가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모든 사건과 이러저러하게-있음 밖에 놓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모든 사건과 이러저러하게-있음은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비우연적으로 만드는 것은 세계 속에 놓여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다시 우연적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 밖에 놓여 있어야 한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이라고 보는 게 좋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는 우발적이고, 가치는 비우발적이므로 가치가 세계에 속할 수 없다고 논증한다.

그는 논고의 이전 부분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사태가 우연적인 것이라고 말해왔다.


지금 이 곳에 의자가 있느냐 없느냐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가치에 대한 질문에 대해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그는 사실과 가치는 전혀 관련이 없음을 말하려고 했다.

가치가 세계 속에 있다면, 가치는 사태들이 있을 때와 없을 때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가치는 세계 속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가치가 세계 속에 있지 않다는 논증은 또 다른 중요한 점을 가지고 있다.

가치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 예를 들어 어떤 것이 가치를 가지는지 가지고 있지 않은지, 혹은 세계 전체가 가치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지 않냐는 등의 의문에 대해서 막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것이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어떤 것이 가치를 갖지 않을 수 있다”는 우연적인 질문을 내포하게 되는데, 그것은 가치가 비-우연적인 것과 모순될 것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러한 질문을 막아내고, 가치의 세부적인 속성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고 논증한다.




6.42 그렇기 때문에 윤리학의 명제들도 존재할 수 없다.

명제들은 더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없다.

6.421 윤리가 언표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윤리는 초월적이다.

(윤리와 미학은 하나이다.)


“초월적”이라는 단어는 칸트가 썼던 transcendental을 의미한다.

논고에서는 이 이전에 6.13에서 쓰여진 적이 있다.

(6.13 논리학은 교설이 아니라, 세계의 거울상이다. 논리학은 선험적이다.)


사실 이 표현은 많이 이상한 것인데, 윤리학의 명제와 논리학의 명제는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명제가 더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짜 명제가 아니며, 따라서 무의미할 것이지만, 논리학은 그렇지 않다.

윤리학의 명제들이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은 논리학에서의 말해짐/보여짐 구분을 전혀 불가능하게 만든다.


우선 논리학과 윤리학을 연결하면서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하고자 하는 점은 이것이다.

기존의 논리학에서 사용한 표현을 통해 윤리학이 세계의 한계에 위치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이 뜻에 대해서는 6.423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마지막에 쓰여진 "윤리학과 미학은 하나이다."라는 문구는 논고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구절 중 하나로 꼽힌다.

윤리학과 미학이 하나인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가 쓴 "전쟁일기"에서의 언급에서 일부분 볼 수 있다.

“예술 작품은 영원의 관점에서 본 대상이다. 그리고 좋은 삶은 영원의 관점에서 본 세계이다. 이것이 예술과 윤리의 연관이다.”

윤리학과 미학은 진실로 하나이기보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많은 주석가들은 해석한다.

(Diane Collinson에 의하면, 미학은 영원의 관점으로서 보는 방식인 것이고, 윤리학은 영원의 관점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임으로서 관련이 되어 있다고 말한다.)




6.422 “당신은 ...해야 한다”라는 형식의 윤리 법칙이 세워졌을 때 드는 최초의 생각은,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윤리가 통상적인 뜻에서의 상벌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행위의 결과들에 관한 이러한 물음은 중요성이 없어야 한다. 최소한 이 결과들이 사건들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쨌든 그 문제 제기에는 무엇인가 올바른 것이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일종의 윤리적 상벌이 존재하기는 해야 하지만, 이 상벌은 행위 자체에 놓여 있어야한다.

(그리고 상은 유쾌한 어떤 것이어야 하고, 벌은 불쾌한 어떤것이어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의 법칙들이 논리학과는 별개로 절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마라”라는 법칙이 있다고 할 때, "거짓말을 한다면 어떻게 되지?"라는 생각이 가능하고, 그것이 적어도 인식 가능할 수는 있다.

칸트가 법칙으로 제창한 정언 명령과 같은 사례에 대해서도 똑같은 의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윤리학이 세계의 한계 부분에 있다는 것을 자각함으로써, 이러한 질문 자체를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리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가장 해석하기 곤란한 문장은 마지막에 있는 상과 벌에 대한 동어반복이다.

상은 유쾌한 것이고, 벌은 불쾌한 것이 맞는데 왜 이것을 언급했을까?

여기서 나올 수 있는 첫 번째 해석은 이것이 동어반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적절하게 그 한계를 인지하면서 윤리적인 한계를 준수하며 살아가는 것이 상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Stephen Mulhall은 여기에서 급진적인 두 번째 해석이 더 올바른 해석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번째 해석에 대해서는 6.43에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6.423 우리는 윤리적인 것의 소지자로서의 의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

그리고 현상으로서의 의지는 단지 심리학의 관심사일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윤리를 사태들로 이루어진 세계보다 그 세계의 한계에 주목한다.

윤리적 평가의 대상은 삶에서 무엇인가를 한 것이 아니라 삶의 태도와 지향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윤리적인 의지와 현상으로서의 의지를 구분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의지를 사태로 바라본다면 윤리학과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삶의 태도와 지향으로서의 의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6.42에 나온 명제가 더 높은 것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을 따랐다.

이를 통해 "의지"라는 단어에 대한 윤리적인 사용을 막았다.


지금까지 보이겠지만, 윤리학은 세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비트겐슈타인은 계속 주장하고 있다. 6.421에 대한 문구는 논리학이 세계의 한계를 비춰주는 것처럼 윤리학도 그렇게 세계의 한계를 비춰주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말하면 윤리학과 논리학은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것은, 세계와 그 한계를 비추는 삶을 사는 것이므로, 이것이 논리적인 것과 뗄 수 없는 삶이라는 표현도 된다는 것이다.




6.43 선하거나 악한 의지가 세계를 바꾼다면, 그것은 단지 세계의 한계들을 바꿀 수 있을 뿐이지, 사실들을 바꿀 수는 없다. 즉, 언어에 의해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을 바꿀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서, 그렇다면 세계는 선악의 의지를 통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세계는 전체로서 이지러지거나 차야 한다.

행복한 자의 세계는 불행한 자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계는 전체로서 이지러지거나 차야 한다."는 문구이다.

이 글은 이전에는 보다 보편적인 용어로서 "세계는 전체로서 감소하거나 증가해야 한다."는 라는 문구로 번역되었다. 그 뒤 수정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여기서 증가와 감소가 아닌 그 반대로 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이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각각 연관짓기 위해서였다.

독일어 원어로는 감소와 증가를 abnehmen과 zunehmen라고 했는데, 이 용어는 달의 이지러짐과 참을 의미할 때 쓰인다.


달의 비유는 비춰진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달의 이지러짐과 참이 오직 달이 아닌 햇빛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같이, 선하거나 악한 의지도 세계가 아닌 세계의 한계가 바뀐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의 감소와 증가를 행복한 자의 세계와 불행한 자의 세계와 연관지었다.

행복한 사람은 세계가 이지러지는, 즉 세계의 한계가 사라지고 투명하게 봄으로서 세계를 세계 그 자체로 보는 사람을 뜻한다.

불행한 사람은 세계가 차는, 세계의 한계들만을 맞닥뜨리는 사람임을 뜻한다.

세계의 한계는 곧 윤리학을 의미한다. 불행한 자라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과 같다. 그는 그 어떤 답도 얻지 못한 채 그 문제들에 부딪힌다.


의지에 의해 세계가 이지러지거나 차오른다는 것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따르는지, 부딪히는지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를 따름으로서 세계에 좌우되는 것이 감소하는 사람일수록 윤리적인 것을 상관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선하며 행복해진다.

그에 반해, 세계에 부딪히는 자는 윤리적인 것에 부딪힌다. 그는 악하다. 또한 불행하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나는 세계와 일치해야 한다"는 "전쟁일기"의 말을 참고할 수 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앞에서 비가 내리는 상황을 생각해본다.

행복한 사람은 비가 내리는 것을 비가 내리는 것으로,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을 단지 일어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우발적인 세계에 윤리적 상벌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는 사람이다.

그에 반해, 불행한 사람은 비가 내리는 것에서 세계의 한계와 부딪힌다. 다시 말해, 불행한 사람은 이를 윤리와 연관짓는다. "내가 왜 이런 수난을 받아야 하지?"라고 생각한다. 그는 같은 이유로 해가 내리쬐는 때에도 불행할 것이다.


이제 여기서 6.422에 있었던 Stephen Mulhall의 급진적인 두 번째 해석을 언급할 것인데, 그는 상과 벌이라는 용어가 용어의 일반적 사용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한다.

윤리적인 것의 한계는 절대적이고, 비조건적이다. 다른 대안책은 윤리적이지 않다는 점을 안다면, 상과 벌이라는 용어가 특별한 개념을 가진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상이라는 것은 윤리가 그 어떤 강요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상이라는 것은 "세계의 의지"를 따르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에 따르면, 윤리학이 어떤 것의 자제라고도 생각하면 안된다. "거짓말을 하지 마라"라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무언가에 대한 자제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어떤 강요라는 것을 극복해야 한다. 세계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세계와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윤리학은 "어떤 것으로부터" 자제를 한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할 것이라고 Stephen Mulhall은 말한다.


상과 벌이라는 것의 윤리적인 사용을 막은 점을 여기서 언급해야 한다. 행복을 추구한다면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 의해서도 선악의 관점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의 결과가 상과 벌이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위가 상과 벌이라는 생각조차 버려야만 한다.




6.431 죽으면 세계는 바뀌는 것이 아니라 끝나는 것일지라도.

6.4311 죽음은 삶의 사건이 아니다. 죽음은 체험되지 않는다.

영원이 무한한 시간 지속이 아니라 무시간성으로 이해된다면, 현재에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시야가 한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끝이 없다.

6.4312 인간 영혼의 시간적 불멸성, 즉 죽음 이후에도 인간 영혼이 영원한 삶을 계속한다는 가정은 어떤 방식으로도 보증되어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 가정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늘 그런 가정으로 달성하고자 한 것을 전혀 성취하지 못한다. 내가 영원히 산다는 것에 의해 도대체 수수께끼가 풀리는가? 도대체 이 영원한 삶이란 현재의 삶과 똑같이 수수께끼 같지 않은가? 공간과 시간 속에 있는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공간과 시간 밖에 놓여 있다.

(해결되어야 하는 것은 실로 자연 과학의 문제들이 아니다.)


죽음 이후로 더 사는 것이 어떤 것의 해결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사람들과 철학자들에 대한 반론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죽음 이후에 더 산다는 것은 전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곳에서 윤리적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문제를 자연과학이 문제를 푸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었다. 시간성이 주는 문제에 어떤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성이 문제를 준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음으로서 해결했다. 이것을 solve, 해결 과정이라기보다 dissolve, 해소 과정이라고 볼 수 있고, 비트겐슈타인은 모든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 이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암시한다.


본문에는 "공간과 시간 밖에 놓여 있다"는 문장에 대해서 '밖에' 부분이 이탤릭체로 강조되었다. 이것은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이 말그대로 공간과 시간 밖에 있다고 생각하기 전에, 이미 그 문제가 공간과 시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으라는 비트겐슈타인의 표현이다.




6.432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는 더 높은 것에게는 완전히 아무래도 좋은일이다. 신은 자신을 세계 속에서 드러내지 않는다.

6.4321 사실들은 모두 단지 과제에 속할 뿐, 해결에는 속하지 않는다.


여기서, 사실은 윤리적 과제의 수행에 있어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보여준다.

세상이 어떻게 있냐는 것이 윤리적인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신"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신의 의미는 범신론적인 것에 가깝다(혹은 가깝다고 뉴턴 가버는 말한다).

"전쟁일기"에서 나온 이 언급은 중요하다. "삶의 의미, 즉 세계의 의미, 이것을 우리는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같은 곳에서의 이 언급 또한 주목할 수 있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세계의 사실들이 문제의 끝이 아님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세계의 의미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고, 세계의 의미는 모든 가치가 그렇듯이 세계 속에 있지 않다. 신을 믿는다는 것은 세계에는 사실뿐만 아니라 가치, 즉 세계의 한계에 있는 윤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혼란스럽게도 "아버지로서의 신이란 비유를 결합시킬 수 있다"고 기독교적인 신의 결합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신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신과 다른데, 비트겐슈타인의 신은 세계 창조와 관련이 없다. 6.44에 자세한 내용이 나와 있다.




6.44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신은 창세기에 나온 창조자의 신과 다르다 -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이전의 5.552의 내용을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명제가 말할 수 있는 것이 경험뿐이라면, 경험에 앞서는 논리에 대해서는 무슨 전제가 필요한지에 대해, "경험이 아닌 모든 경험에 앞선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비스러운 것"에 해당한다.


이 문구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언급을 다룬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도 다뤄졌음을 알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절대적 가치를 알리는 최선의 방법이 "나는 세계의 존재에 대해 경탄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와 동시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지, 이 세계에 대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지를 언급하면서 이 문장이 가장 잘 표현해준다고 말하고는, 바로 그 뒤에 이 문장은 언어를 오용하고 있으며 이 표현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이 절대적 가치에 대한 표현은 세계를 과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기적적으로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신비스러운 것"이라고 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이 내용은 6.54에서 자세히 언급하는 내용에 도움이 될 것이다.




6.45 세계를 영원의 관점에서 직관하는 것은 세계를 전체 - 한계 지어진 전체 - 로서 직관하는 것이다.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느낌은 신비스러운 느낌이다.


그 전까지 말했던 행복한 사람이 세계의 한계가 사라지고 투명하게 보는 사람이라는 관점을 깨트려야만 한다. 영원의 관점에서 직관하는 것이 한계 지어진 전체라고 했기 때문이다.

영원의 관점이 무엇인지는 그가 쓴 "전쟁일기"에서의 언급에서 일부분 볼 수 있다.

"통상적 고찰 방식은 대상들을 말하자면 그것들의 한가운데에서 보고, 세계를 영원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바깥에서, 대상들이 전체 세계를 배경으로 가지도록 본다.”


이 영원의 관점에서의 느낌은 신비스러운 느낌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6.44의 세계가 있다는 것의 신비스러움과 연관되며, 또한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세계의 존재라는 기적에 대해 올바른 언어 표현은 언어 내의 어떠한 명제에 있는 것이 아닌 언어 자체의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이 내용은 6.54에서 자세히 언급하는 내용에 도움이 될 것이다.




6.5 언표될 수 없는 대답에 대해서는 물음도 언표될 수 없다.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릇 어떤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면, 그 물음은 또한 대답될 수도 있다.

6.51 회의주의는, 만일 그것이 물음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의심하고자 한다면, 반박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명백히 무의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의심이란 오직 물음이 존립하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있고, 물음이란 대답이 존립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또 이 대답이란 어떤 것이 말해질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6.52 설령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들이 대답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들이 여전히 조금도 건드려지지 않은 채로 있다고 느낀다. 물론 그렇다면 과연 아무런 물음도 더는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답이다.

6.521 삶의 문제의 해결은 이 문제의 소멸에서 인지된다.

(이것이, 오랫동안의 회의 끝에 삶의 뜻을 분명하게 깨달은 사람들이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 없었던 이유가 아닐까?)

6.522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스스로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여기서 6.52와 6.521에서 답한 내용은 중요하다.

다른 모든 가능한 물음들이 대답되어 있다 하더라도, 삶의 문제들이 전혀 건드려지지 않았고, 물음은 대답이 존립할 수 있는 곳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므로 삶의 문제는 문제가 소멸하면서 해결된다.

또한 "이 문제의 소멸"에서 나온 소멸이라는 단어는 6.43의 달의 비유에서 이지러지는 달과 짝지어진다.

6.51에 나온 문구는 많은 주석가들이 말했듯 세계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목적했지만, 이것은 또한 윤리학적인 질문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가?"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도 해당하는 문구이다.


이것에 따르면, 행복한 사람은 존재에 대한 대답될 수 없는 남아 있는 문제에 대해 질문하려고 하지 않고 그 경향을 극복하려고 한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은 이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다. (왜 나는 저것이 아닌 이것을 해야 하는가? 나는 왜 존재하며, 왜 나는 계속 더 존재해야만 하는가? 왜 이것이 아닌 저것인가? 왜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기보다, 무엇이 있는가?)


행복한 사람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피한다. 그는 윤리적인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는다"(eschew). 그리고 오직 자연과학적인 질문만을 질문으로 받아들인다.

영원의 관점에서의 한계 지어진 전체에 있어 "한계 지어진"이라는 내용이 바로 이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6.43에서 논의한 행복한 자와 불행한 자의 논의를 이에 따라 다시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불행한 자라는 것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과 같다. 그는 그 어떤 답도 얻지 못한 채 그 문제들에 부딪힌다. 행복한 사람이란 처음부터 그런 삶의 의미를 탐구하지 않았던 사람이나, 이것이 대답될 수 없는 질문임을 깨닫고 그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은 사람을 뜻한다.




6.53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자연 과학의 명제들 — 그러므로 철학과는 아무 상관없는 어떤 것 -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형이상학적인 어떤 것을 말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그의 명제들에 있는 모종의 기호들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았음을 알려 주는 것, - 이것이 본래 철학의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이 방법은 그 다른 사람에게는 불만족스럽겠지만 - 그는 우리가 그에게 철학을 가르쳐 주었다는 느낌을 갖지 않겠지만 - 이 방법이 유일하게 엄격히 올바른 방법이다.



이 유일하게 올바른 철학의 방법은 기존의 논고 해석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해석 또한 가능하다.

6.521에서 보인 것과 같이, 윤리적 문제의 해결은 윤리적 문제의 소멸에 있고, 윤리적인 질문에 있어서 그 질문을 일부러 내려놓는 것이 행복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다. 6.53이 보인 철학의 방법은 윤리적인 문제 대신 대답될 수 있는 자연과학의 문제만을 문제로 삼음으로서 윤리적인 질문을 표현하는 행위를 피하고, 그를 통해 윤리적 문제의 소멸과 행복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6.4에서 나왔던 수수께끼같은 문구와도 관련된다. “모든 명제들은 가치가 같다.”

문제가 철학적이건, 과학적이건, 역사적이건, 수학적이건, 미학적이건간에 6.53에 있는 기준을 지킴으로서 같은 윤리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6.54 나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은 점으로 인해 뜻풀이이다: 즉,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만일 그가 나의 명제들을 통해 - 나의 명제들을 딛고서 - 나의 명제들을 넘어 올라간다면, 그는 결국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그는 말하자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한다.)

그는 이 명제들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면 그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 


철학의 명제와 윤리학의 명제는 자연과학의 명제들과 같은 의미가 있는 명제가 아니고, 비의미적이지도 않다. 논리학의 명제들이지도 않고, 수학의 명제이지도 않고, 자연과학의 법칙이지도 않으면서, 필연적이어야만 한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논리철학논고에서 철학의 명제의 무의미함은 윤리학의 명제가 무의미함과 굉장히 비슷한 면이 있다.

철학의 명제의 무의미함이 윤리학의 명제의 무의미함과 같은 성질의 것이라고 한다면 이 굉장히 이해하기 힘든 구절에 대해 (전통적 해석에 동의하는) 하나의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절대적 가치를 알리는 최선의 방법이 "나는 세계의 존재에 대해 경탄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와 동시에 이 문장이 언어를 오용하고 있으며 이 표현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6.45에서 다뤘던 영원의 관점에서의 느낌은 신비스러운 느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세계의 존재라는 기적, 즉 신비스러움에 대해 올바른 언어 표현은 언어 내의 어떠한 명제에 있는 것이 아닌 언어 자체의 존재라고 언급한 것과 연관되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표현이 언어에 의한 표현이라기보다 언어의 존재에 의한 표현이다고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그 표현하기를 원하는 것을 표현할 수 없으며 그런 것에 대해 우리가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윤리학에 관한 강의"에서 이 특정한 무의미한 표현을 일상적인 무의미한 표현과 다르게 취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언어의 존재에 의해 표현되는 것은 세계와 관련되어 언어와 논리 그리고 윤리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말을 할 때 그 배경적 지평을 이루고 있을 뿐, 결코 언어로 표현될 수 있게끔 드러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한 무의미한 표현이 "아직 올바른 표현들을 발견하지 못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의 무의미성이 바로 그것들의 본질이었기 때문에 무의미했다"고 한 비트겐슈타인의 말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한다.


윤리학을 명제로서 표현하려고 한 행위들은 그의 말대로라면, "언어의 한계들에로 달려가 부딪치는 것이었"다. 우리의 새장 벽에로 이렇게 달려가 부딪치는 것은 완전히, 절대적으로 희망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희망 없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논고의 명제들과 같은 사이비 명제가 있어서, 그것들을 사다리처럼 딛고서 넘어 올라갈 때에 비로소 올바르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논고에 있는 사이비 명제들은 논리적이기엔 너무 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모든 것은, 우리가 반드시 침묵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열정적으로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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