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사랑과 그리움으로 직조된 수평선의 시학

-홍오선 단시조론

 

이정환

 

또 한 권의 단시조집이 출간되었다. 홍오선 시인의날마다 e-mail이다. 그의 단시조들은 미묘한 정서를 밀도 높게 육화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숙련공의 솜씨다. 어떻게 해야 시조의 정형미학을 잘 표출할 수 있는 지에 대한 철저한 궁구 끝에 생산된 작품들이어서 읽는 맛을 더하고 있다. 특별히 주목되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어쩌면 바둑의 무궁무진한 수를 3612음보 안에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는 점이 시조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한 비결이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명지바람

천리 밖에

 

뉘 오시는

발자국 소리

 

가슴 한켠

빈 자리를

애써 찾아

드시느라

 

눈시울

촉촉이 적시며

마른 잠을

깨운다

-새벽 비전문

 

새벽 비의 간결한 시적 체계는 단시조의 한 모델이 될 만하다. 섬세한 감성으로 정감어린 시 세계를 펼치고 있다. 보드랍고 화창한 바람이 명지바람이다. 그 바람이 일어나는 곳은 무려 천리 밖이다. 아주 먼 데다. 그곳으로부터 뉘 오시는/ 발자국 소리를 화자는 듣는다. 그 소리는가슴 한켠/ 빈 자리애써 찾아든다. 그리고는눈시울/ 촉촉이 적시며/ 마른 잠을/ 우고 있다. 정조가 참 애틋하다. 촉촉이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비는 물론 새벽 비. 새벽에 일찍 잠에서 깨어나 그리운 이를 그리워한다. 그리움의 실체는 오지 않고 대신 비가 와서 다함없는 연모의 정을 다독이고 있다.

 

서늘한 솟대 위로

멀미하는 뭉게구름

 

기다림도 하마 길어

하늘도 기우뚱하다

 

사랑도

말 못할 사랑은

꽃무릇을 피운다

-꽃무릇전문

 

꽃무릇은 수선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서 신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꽃빛깔이 황홀경이므로 보는 이들마다 찬탄한다. 꽃무릇서늘한 솟대 위로/ 멀미하는 뭉게구름이라는 이채로운 상황을 설정하면서 솟대와 뭉게구름과의 관계가 너와 나로 귀결된다. 솟대는 서늘하고 뭉게구름은 멀미를 한다. 그리하여 기다림도 하마 길어/ 하늘도 기우뚱하다는 표현이 중장에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시의 화자는 이러한 시적 정황을 제시하면서 결국 말 못할 사랑을 말한다. 그 사랑은 끝내꽃무릇을 피울 수밖에 딴 도리가 없노라고. 아름다운 꽃으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통 두드려 봐도 제 속내는 꼭 감추지 칼날을 받고서야 아낌없이 열어 주는

 

사랑도 그런 사랑을 여름 내내 익혔어요

-수박전문

 

우리, 서로를 탐해 엮여본 적 있던가요

 

간절히 늘어뜨린 목덜미에 닿는 숨결

 

그 누가

 

연보라 등을

 

밝혀 들고 섰나요

-등꽃전문

 

수박등꽃은 사랑 시편이다. 수박통통 두드려 봐도 제 속내는 꼭 감추고 있는 한 대상을 은유하면서 칼날을 받고 난 뒤 아낌없이 열어 주는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한 사랑을 여름 내내 익히면서 기다렸던 것인데 기실 수박에게칼날은 끔찍한 위해의 도구다. 그렇지만칼날은 사랑을 위하여 필요한 소도구다. 상처를 안긴다기보다 사랑의 완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사용된 역동적인 고백의 표상이라고 봄이 더 옳을 것이다. 반면에등꽃에서 드러나는 사랑의 정조는 격정적이고 격렬하다. ‘탐하다라는 시어를 초장에서 쓰고 있는데 그 말이엮여본이라는 말과 접맥되면서 강렬한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다. 너와 나 곧 우리사이에 쌍방통행의 탐함으로 말미암아엮여본 적 있던가요라고 묻는다. 이 물음을 듣는 순간 등꽃을 피워 올린 등나무의 독특한 형태가 클로즈업되어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엮는 일일진대등꽃에서 초장은 그러한 정황을 극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을 아연 긴장케 한다. 중장간절히 늘어뜨린 목덜미에 닿는 숨결이라는 숨 가쁠 정도로 에로틱한 구절로 말미암아 이 시편은 높은 미학적 성취를 이룬다. 등꽃의 양태를 이렇듯 아름답게 묘사함으로써 몸의 사랑도 얼마든지 고결할 수 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 끝으로 다시 화자는 묻는다. ‘그 누가// 연보라 등을// 밝혀 들고 섰나요라고. 그 누구는 바로 너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을 것이다.등꽃은 이렇듯 절절하다. 소월의 사랑 시편 못지않은 절창이다.

사랑에 관한 작품으로 소재는 앞의 두 작품과는 다르지만 몹시 애절한 시적 정황을 보여주는 작품으로돌탑이 있다.

 

하나

잡은 손이

하늘만한

원을 그린다

가물가물 네 얼굴이

바르르 떨리다가

내 가슴 맨 꼭대기에

오롯하게 앉는다

-돌탑전문

 

돌탑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소원을 빌면서 한두 개 씩 쌓아 올리다보면 하나의 완성된 탑이 된다. 그 바람은하늘만한/ 원을 그릴 때가 있다. 중장에서 한 사람의 얼굴 즉네 얼굴이 등장하는데 내게는가물가물한 존재다. 그런데도 그 얼굴을 그리는 동안바르르 떨리기까지 한다. 하여 그 얼굴과 나는 예사로운 사이가 아님에 틀림없다. 종장에서 내 가슴 맨 꼭대기에/ 오롯하게 앉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시의 화자가 자신의 가슴 위에 혹은 가슴 안에 돌탑을 쌓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맨 꼭대기에 오롯하게 앉아 있는 대상은 항시 그리던 네 얼굴이기 때문이다. 이 시조는 직정적인 감정 토로나 열정적인 사랑의 언사를 전혀 쓰지 않고도 매우 간절한 사랑 시편이 되고 있다. 그 점을 우리는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무기교의 기교를 구사하고 있는 셈이다. 범수가 할 수 없는 시작 방법이다.

 

사방이 무명인데 무얼 움켜쥐느냐고 기어이 가려는 너 발목 잡아 앉혔더니

 

더운 피 삭이지 못해 솟구치며 안달이다

-새벽 물안개전문

 

아주 찬찬하게

지난 날 음미하며

 

선덕여왕 치맛자락 뉘 몰래 불을 품던

 

그 사내

자귀의 기일

천 년이 오고 간다

-흠하다전문

 

앞의 두 편은 소재가 전혀 다르지만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자세히 살펴 읽으면새벽 물안개는 애절하게 다가온다. 매우 구체적인 정황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벽에 피어오르는 물안개는 또 다른 정취를 안겨준다. 움켜쥐려고 하여도 캄캄한 사위다. 무언가를 움켜쥐고기어이 가려는 너발목 잡아 앉히고 나니더운 피 삭이지 못해 솟구치며 안달을 한다. ‘새벽 물안개를 보고 이만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미적 질서를 보여주는 일은 쉽지 않다.

흠하다는 우리가 잘 아는 선덕여왕과 지귀 이야기인데 다른 각도로 읽고 있다. 이미 이들의 사랑은 고전으로 남아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대상이다. 중장 선덕여왕 치맛자락 뉘 몰래 불을 품던이라는 구절에서 지귀가 꿈꾸던 사랑이 온전히 함축되어 있다. 선덕여왕도 가고 지귀도 갔지만, 지귀의 기일은 천 년이 자나도 계속된다. 감히 여왕을 사모하다니 하고 힐난을 퍼부을 수도 있겠지만 어디 사랑이 국경이나 신분, 나이 등에 얽매이던가. 그 사내 지귀가 여왕을 사모하는 일은 온전히 그 자신의 자유의지다. 그의 눈에 꺼지지 않는 불길이 일어난 것을 볼 때 숙명이었을 것이다. 선덕여왕 또한 극진하다. 극한 벌을 내려도 마땅할 터인데 잠자는 지귀의 가슴에 금팔찌를 뽑아 놓고 갔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참으로 흠모할 만한 불후의 사랑이다.

 

달동네 변두리에 서면 서러운 게 목숨이지

 

팔십 년 골이 깊던 내 어머니 그 허리띠

 

이윽히 벗어놓고 간 이승 자락 둘레길

-달무리전문

 

내 살 다 받아먹고

어여어여 자라거라

 

손톱만큼 남았어도

둥실둥실, 그리 커라

 

내 새끼

다 빨리고서

빈 젖꼭지 걸어둔 밤

-그믐달전문

 

꽃길 열리면서 날아드는 흰 나비 떼

 

어머니 살내음은 해마다 오시는데

 

버선발 채 딛기도 전 되가실까 두려워라

-찔레꽃전문

 

세 편 모두 비근한 소재들이면서도 간절하다. 형상화 과정에서 그만의 시안으로 노래하고 있다. 달무리달동네 변두리를 제시하면서 그곳에 서게 되면 서러운 게 목숨임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 팔십 년 골이 깊던 내 어머니 그 허리띠라는 탁월한 비유로 달무리를 선명히 독자들의 뇌리에 각인시킨다. 골 깊던 어머니 허리띠는 인종의 일생을 명징하게 표상하고 있는데 이제는 하늘에 떠서 더없이 아름다운 달무리가 된 것이다. 이는 어머니가 이승을 떠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종장에서 또 한 번 실감실정의 비유를 본다. 이윽히 벗어놓고 간 이승 자락 둘레길이다. 둘레길을 어머니는 묵묵히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그믐달에서도 어머니가 등장한다. ‘내 살 다 받아먹고무럭무럭 자라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손톱만큼 남았을지라도 둥실둥실그렇게 크기를 소원한다. 그런데 종장은 정서적 극치를 보인다. 내 새끼/ 다 빨리고서/ 빈 젖꼭지 걸어둔 밤이라는 표현이 커다란 울림을 안기면서 강렬하게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다. 또한 그믐달의 이미지와빈 젖꼭지는 그럴 수 없이 잘 맞아 떨어짐으로써 애절하기까지 하다. 다 내어놓은 뜨거운 헌신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찔레꽃의 어머니 역시 돌아가신 어머니다. 흰 나비 떼가 꽃길을 좇아 날아오르고 어머니의 살내음은 찾아와서 그리움을 더하고 있다. 해마다 오시는 어머니의 살내음이어서 버선발 채 딛기도 전 되가실까 두려워하면서 찔레꽃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장면을 여실히 그리고 있다.

앞의 세 작품들과 연계지어서 다음 작품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소재가 특이하다.

 

그대로 언제까지

함께할 줄 알았더니

 

홀연

세상 밖에

외톨이로 나앉았네

 

당신과 이어진 탯줄

찾을 길 막막한 날

-단추전문

 

 

그대로 언제까지/ 함께할 줄 알았던 존재를 어머니로 가정해 보았을 때홀연/ 세상 밖에/ 외톨이로 나앉은 나는 몹시도 막막할 수밖에 없을 터다. 이미 혼자가 되어버렸고 다시 그때를 돌이키거나 되돌아갈 수도 없다. 분화된 지금 미분화의 때로 돌아간다는 것은 퇴행일 뿐이다. ‘당신과 이어진 탯줄/ 찾을 길 막막한 날에서 보듯 오래 전 단절을 경험한 것이다. ‘단추는 이제 스스로 살아갈 길만이 남아 있다. 골똘히 생각하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그 길만이 진정 살길인 것이다. 상실이 성숙의 길을 가게 하는 동인인 셈이다. 단추가 주는 탯줄의 이미지로 말미암아 이 시편은 더욱 놓은 완성도를 보인다.

 

먼저 간 아우 생각에 서녘 하늘 그렁그렁

 

으능나무 참매미가 저녁 한때 우는 것은

 

이렇게 다시 왔다는 네 목소리, 맞구나

-참매미

 

참매미도 가족 이야기다. 회상조의 시로서 은행나무의 참매미가 저녁 한 때 울 적마다 먼저 간 아우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하늘 그렁그렁이라는 구절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해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참매미가 곧 아우로 표상되면서 아우에 대한 그리움이 진솔하게 형상화되고 있다. 그리고 네 목소리, 맞구나라는 결구가 애잔함을 더한다.

 

왱왱거려 귀찮다는 손사래 거두세요

 

오늘이 전부입니다

하루가 한생입니다

 

백 년도 부럽지 않을 이 순간의 날갯짓!

-하루살이

 

하루살이는 그야말로 하루만 살다 간다. 우리는 하루살이 떼를 보면 견디지 못해 하면서 내쫓거나 손을 들어 잡으려고 한다. 시의 화자는 그 일을 막고자 한다. 그들에게는 오늘이 전부이고, ‘하루가 한생이기 때문이다. 다소 과장이 심하기는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대목이 종장 백 년도 부럽지 않을 이 순간의 날갯짓!’이다. 그 날갯짓이 무어 그리 화려하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하루살이에게는 눈부실 수가 있다. 불과 하루를 살다 가기에.

끝으로 이 글의 제목을 사랑과 그리움으로 직조된 수평선의 시학이라고 붙이게 한 다음 작품을 보자.

 

너를 받쳐 물이 된 나

나를 안아 허공 된 너

 

오늘토록 멍이 들어 바장이는 눈시울에

 

잡힐 듯

잡지 못한 손이

아득히 닿아 있다

-수평선전문

 

수평선은 균형과 절제의 표상과도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평화의 모습이기 하다. ‘너를 받쳐 물이 된 나/ 나를 안아 허공 된 너라는 대비가 선명하다. 물과 허공, 허공과 물이 혼연일체가 되고 있다. 흡사 사랑의 완성처럼.

중장오늘토록 멍이 들어 바장이는 눈시울에는 사랑의 상흔이 잡힌다. 예사로운 아픔이 아니다. 종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즉 사랑이라는 것은 잡힐 듯/ 잡지 못한 손이/ 아득히 닿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지금까지 홍오선 시인의 단시조들을 살폈다. 그의 작품들을 읽고 있노라면 시조 3장이 줄곧 수평선의 이미지로 팽팽히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시조 가락을 잘 탄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의 단시조 세계의 기저에는 사랑과 그리움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이러한 정서는 독자들의 삶의 품격을 높이는데 일조하고 남음이 있다.

심미적 정서 함양에 넉넉한 정신적 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홍오선 시인의 단시조집날마다 e-mail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음 2015-06-0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시조의 묘미가 잘 살아나는 작품집입니다
 
날마다 e-mail을 한국의 단시조 5
홍오선 지음 / 책만드는집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참 좋은 단시조집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의 얼굴
예병태 지음 / 만인사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책의 시적 승화와 미적 변주

이정환

 

1.

예병태 시인은 특히 삶에 철저하다. 이 땅에 사는 그 누구인들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않는 이가, 충실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삶에 대하여 늘 좌정하는 모습을 견지하는 철두철미한 생활인이요, 교육자요, 시인이다. 그의 시집 전편을 면밀히 읽어가면서 시종일관 느낀 것은 그는 참 모범 답안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시인으로서 한 편 한 편의 시조를 매만질 때마다 성심을 다하고 있는 것을 산견한다. 물론 이 점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러나 이만큼 진지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고유의 우리말에 대한 식견은 놀랍다.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낱말들을 적재적소에 앉혀서 끈질기게 체현해 보이고 있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그의 이번 시집바람의 얼굴은 다소 고전적인 분위기를 품고 있지만 여러 작품들에서 참신한 발상과 형상화를 통해 시의 한 정점에 이르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보인다. 그런 점이 적지 않은 연치에 비해 신선하게 읽힌다.

 

토막 나고 켜지고 쪼개진 생의 편린을

수직으로 수평으로 빗살로 엮은 평생

수없이 교차하면서 촘촘한 인연 쌓았다

-나무의 꿈중에서

 

인연’, ‘평생과 같은 말이 녹아 있지 않지만, 문살을 보며 나무의 꿈을 떠올리면서 촘촘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징하게 말하고 있다. 삶에 대한 그의 자세가 여실히 읽힌다. 수직과 수평의 원활한 교직 혹은 교감으로 주어진 생을 넉넉하게 살아가야 함을 은연중 환기하는 작품이다.

갈대숲에 가면 그저 갈대가 되는 거야

눈물처럼 스며오는 싸한 안개에 젖어

바람의 감궂은 짓도 몸 흔들어 재우고

-갈대숲에 가면중에서

 

그렇다. 갈대숲에 가면 갈대가 되고, 버드나무숲에 들면 버들이 되고, 억새밭에 서면 억새가 되어야 한다. 싸한 안개가 눈물처럼 스며오는 것을 굳이 밀쳐낼 일이 아니다.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바람의 감궂은 짓도 몸 흔들어 재울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은 그러한 생각을, 철학을갈대숲에 가면에서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자연스러움과 세계와의 불화가 아닌 조화는 그의 삶의 지향 향방을 넌지시 일러주는 것이다.

 

끌탕으로 점철된 여정旅程의 지층

높이만 쌓아올려 미진에도 흔들리고

아무리 비끄러매도 엇나가고 깨진다

 

마음결 넓게 잡아 헤식은 층 다지고

낮지만 튼튼한 나만의 자리매김

무녀리 올무를 벗고자 뼈지게 다짐한다

-결뉴結紐전문

 

제목이 특이하다. ‘결누끈을 맴 또는 얽어 맺음, 서약을 함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이다.결뉴結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경영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의지를 육화하고 있다. ‘미진에도 흔들리고/아무리 비끄러매도 엇나가고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한 부단한 노정 속에 높이만이 전부가 아니라 낮더라도 튼튼한 나만의 지층을 쌓아올리겠다는 것이다. ‘다짐한다는 진술이 아쉽긴 하지만 끌탕, 비끄러매도, 헤식은, 무녀리와 같은 어휘들이 적절하게 놓인 점이 눈길을 끈다. 결뉴結紐에서 보인 시각은계영배에서 몸속에 은장도처럼 날 세우고 있기에!’라는 대목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수천 개의 섬들이 남·서해에 터 잡을 때

유독 나는 울릉도 곁 동해에 자리 잡아

아아峨峨히 버티고 서서

문지기를 자처했다

 

살점 뜯는 격랑도 갓밝이의 추위도

등뼈를 곧추세우고 지르보며 참았지만

왜인들 물개 절멸은

죽기보다 괴로웠다

 

침탈의 입살이 파도 따라 밀려와도

호국의 정신은 해미처럼 피어나서

뼈지게 으레 지키겠다

어둑발도 뚫으며

-독도전문

 

독도는 독도가 시의 화자가 되어 결의를 다지는 발언을 한다. 한반도의 문지기를 자처한 섬이다. ‘살점 뜯는 격랑도 갓밝이의 추위도 등뼈를 곧추세우고 지르보며 참아온 섬 독도는 그러나 왜인들 물개 절멸은/죽기보다 괴로웠던 것이다. 셋째 수에서는 결의를 다진다. 해미처럼 피어나는 호국의 정신으로 어둑발도 뚫으며 뼈지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요즘도 여전히 침탈의 입살이 파도 따라 밀려오고 있는 중이다. 현재진행형의 사안이다. 입을 다물어야 마땅한 쪽에서 종내 그 입을 다물지 못하고 더욱 소란을 떠니 어찌할 방도가 없다. 최근 독도에 간 일본 역사학자와 승려 세 사람이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외친 적이 있다. 이들은 시민단체 회원들로서 그 중 구보이 교수는 독도는 일본이 러일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강점한 것이라면서 일본에 가서 올바른 역사 부교재를 만드는 등 독도가 한국 땅임을 알리는데 앞장서겠다.”고 말하고 있다.

예병태 시인의독도는 우리 역사의 위의를 세우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생각이 복잡할 땐

따스한 자갈을 잡아 봐

굴신하기 싫으면

모래사장에 누워 하늘을 봐

흰소리 하고 싶거든

물소리에

귀 기울여 봐

-동창천 4전문

비좁은 바위틈을 가파르게 올라가서

암벽 끝 목마타고 지나온 길 굽어보니

가슴이 너무 좁아서 저 초록 못다 담겠다

-등산중에서

 

때로는 몽우리였으면, 조붓한 바위틈의

꿈꾸었던 세상을 촘촘히 채워 넣어

살며시 꽃숭어리를 소담스레 피우는

 

한번쯤 미물이라면, 찌든 허물을 벗는

야린 피부를 가다듬고 구겨진 근육 펴서

드넓은 세상을 향해 새롭게 날개짓 하는

 

때때로 나무였으면, 교목은 아니어도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이드거니 머금고

제자리 지켜가면서 나이테를 새겨가는

-때로는전문

 

시인은 자연친화적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묘미를 알고 있다. 위의 세 편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자연을 거스르는 삶을 원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 부대끼다 보면 진종일 하늘 한번 우러러 보지 못하고 보낼 때가 적잖다. 위의 시편들은 모두 우리에게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것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동창천 4에서 자갈과 모래사장 그리고 물소리와 어울릴 것을 권한다. 철근과 시멘트로 뒤덮인 도심지를 떠나 동창천으로 오라는 것이다. 와 보면 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다.

등산에서 시인은 자연 앞에 겸손함을 보인다. 가슴이 너무 좁아서 저 초록 못다 담겠다는 것이다. 무한량의 초록물결로 뒤덮인 산을 바라보면서 삶의 활력을 만끽하는 중에 자신의 존재가 미미하여 저 엄청난 초록을 자신의 가슴 속에 다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는 경이의 탄복을 한다. 능히 그럴 일이다.

때로는은 각 수의 종장 끝마디를 미완으로 마무리하는 시도를 보인다. 이러한 작은 실험은 그가 처음 시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다. ‘몽우리, 미물, 나무가 되고자 하는 염원을 자연스럽게 풀어가고 있다. 꽃숭어리를 피우고, 새로운 날갯짓을 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나이테를 새겨가는 소담스러운 삶을 구가하고자 하는 바람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어느 때나 불쑥불쑥 찾아오는 이방인

부드럽게 다가와서 힘껏 밀치기도 했지

이따금 살을 에는 듯한 아픔마저 주었지

 

불현듯 내 등 뒤를 쫓아다니는 미행자

해미 속의 갑판, 벼랑 끝 바위까지

너 몰래 더 이상 숨을 곳 찾을 수 없었지

 

그러나 너는 머물지 않는 방랑자

무람없는 몸짓조차 구순하고 편해질 때

소맷귀 잡을 새 없이 표표히 사라졌지

-바람의 얼굴전문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바람을 노래한 바 있다. 삶의 중심에서 더불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람을 활용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고 바람 때문에 울고 바람 때문에 웃으면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바람은 시의 주된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바람의 모습은 대체 어떤 것인가 하고 생각한 끝에바람의 얼굴을 쓴 것으로 보인다. 바람의 얼굴을 스케치하는 일은 상식선을 뛰어넘기가 어렵다. 이 작품도 그런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둘째 수에서 해미 속의 갑판, 벼랑 끝 바위까지라는 독특한 장면 제시로 말미암아 이 작품의 무게감이 달라지고 참신성이 가미되면서 의미가 증폭된다. 거기에다가 무람없는, 구순하고라는 낱말이 셋째 수에 놓여 의미를 확장하고 있는 것도 이 시편의 평이성을 극복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바람의 얼굴은 자신에게 불어 닥치는 바람을 잘 제어하고 이겨내거나 화목을 이룰 때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은연중 일깨우는 점에서 예병태 시조시학의 한 축이 될 작품이다.

 

너무나 미워해서 원망으로 남았을

너무나 집착해서 몸서리가 쳐졌을

죽어서 받을 벌들을 당겨서 받고 있다

-불면중에서

 

누구나 불면의 밤을 겪게 마련이다. 시인은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잠 못 이루는 밤 혼자 깊은 생각에 빠져 자신을 한없이 자책한다. 자책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삶의 노정이 자책의 연속임을 아는 이는 다 안다. 죽어서 받을 벌을 미리 받고 있다는 진술도 공감이 간다. 극심한 불면은 보통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망과 몸서리쳐짐은 그런 점에서 불면의 무서운 선물(?)이다. 이겨내고 난 후 그 후유증은 크다. 자고 싶다 자고 싶다 외칠수록 더욱 초롱초롱해지는 의식으로 말미암아 하얗게 어둠을 갈아 끝도 없이 마시는 일을 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삶이 우리에게 안기는 말 못할 아픔들이 화인처럼 눈앞에 떠오른다.

빛바랜 사진 속에 아버지가 웃고 있다

포연 사이 짬을 내어 말끔한 군복 입고

생사의 길목에서도 늠름하고 힘차다

-아버지의 사진중에서

 

아버지는 전쟁이 한창 중에 한 장의 사진을 찍는다. 사진은 남고 자신이 혹 떠나게 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른다. 생사의 길목에서도 말끔한 군복을 차려입은 늠름하고 힘찬 모습이다. 포연이 가시지 않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사진을 남긴다는 것은 비장함이 함께 하는 일이다.

모처럼 차려 입은

옷이 젖어 속상하다

직접 당해보니

이름 한번 잘 지었다

뒤통수

치고 나서는

시치미를 뚝 떼는

-여우비전문

 

기실 여우와 비는 서로 상관성이 없다. 햇빛 나는 데 오는 비 때문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여우가 끌려 나와서 여우비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므로 여우로서는 가당찮은 일이다. 여우의 속성으로 인한 것이기에 여우비라는 말은 울림이 남다르다. 시의 화자는 뒤통수 맞고 나서야 누가 지은 지 모를 여우비라는 말을 실감한다. 시인은 모름지기 사물과 세상 그리고 삶에 대해 부단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고 볼 때 최초로 여우비라는 합성어를 만들어낸 사람도 시인이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다. 가볍게 읽히는 시편이다.

석양이 가까워져 그림자가 길어지니

혐오하고 회피했던 어두운 장면들이

아무리 밀쳐내어도

자꾸만 다가설 뿐

 

검은 리본 장식한 액자 속의 얼굴들

내 배려와 나눔이 부족했음을 자책해도

적멸의 공간 속에서

묵언으로 응시할 뿐

액자 속의 내가 마주선 내게 귀띔한다

대금처럼 속을 비워야 청아한 음이 나지.”

올 때에 이슬이었으면

갈 때는 바람일 뿐.”

-이별 준비전문

 

이별 준비는 돌연 숙연하게 한다. ‘석양이 가까워져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내면의 갈등이 표출된다. ‘어두운 장면들을 아무리 밀쳐내어도 자꾸만 다가서는 것을 막지 못한다. ‘검은 리본 장식한 액자 속의 얼굴들을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적멸의 공간 속에서 묵언으로 응시할 뿐임이 분명하다. 유한의 생을 살다가는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편의 특이한 상황 설정 방식은 액자 속의 내가 마주선 내게 귀띔하고 있는 그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관한 연습은 삶의 성찰에는 더 없이 좋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대금의 속성을 떠올린다. 청아한 음의 비결은 속을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올 때의 이슬과 갈 때의 바람으로 끝맺으면서 현존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환기하게 한다.

 

봉정사 초입에 울창한 참나무숲

딱딱딱굵은 줄기를 쪼아대는 딱따구리

점들은 공명이 되어 풀잎에 튀고 파닥인다

 

몇 번이나 쪼아야 한 세상이 열릴까

점과 점 간극에는 명암이 교차하고

잊었던 삶의 애환들도 보이다 스러진다

 

빼고 싶은 점들이 흔들어도 붙어 있다

아직도 살아 있으니 찾아야할 봄날들

목련이 하늘을 열 듯 그 환희의 점 하나

-점을 찍으며전문

 

점을 찍으며는 구체성 즉 리얼리티가 있는 시조다. 사유의 깊이가 실제적인 장면과 원활하게 접목되어 미묘한 파장과 울림을 안긴다. ‘봉정사 초입 울창한 참나무숲에서 굵은 줄기를 쪼아대는 딱따구리가 만들어내는 점들이 공명을 이루면서 풀잎에 튀고 파닥이고 있다. 퍽 세밀한 관찰이다. 둘째 수에서는 점과 점 간극에 얼비치는 명암을 보고 잊었던 삶의 애환들도 눈여겨본다. 그리고 빼고 싶은 점들이 흔들어도 붙어 있는 것을 자각하면서 아직도 살아 있으니 찾아야할 봄날들에 대한 희구를 드러내 보인다. 그것은 뒤이어서 목련이 하늘을 열 듯 그 환희의 점 하나로 귀결되면서 시종 잔잔한 톤의 이 작품의 기운이 긴 여운을 안긴다.

 

내 마음 비웠지만 이 말 만은 해야겠다

녹음 짙은 고향에서 무참히 베어져서

갖가지 심문을 해도 내일 위해 참았음을

 

컵으로 변신한 나를 감싸 쥐고

살며시 입 맞추며 커피를 마실 때도

하얗게 변한 얼굴을 원망하지 않았음을

 

단 한번 사랑받고 버려지는 신세이고

누런 액이 묻은 채 내팽개쳐져 있을 때도

구겨진 자존심보다는 재생을 꿈꿨음을

 

악취 나는 매립장에 묻혀서 신음할 때도

밀알처럼 희생하여 많은 열매 꿈꿨는데

몇 백 년 썩지도 않는 몸뚱이가 괴로웠음을

-일회용 컵의 강변전문

 

종이는 나무에게서 나온 것이다.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종이컵도 나무를 깎아서 만든 그릇에 커피나 음료수를 담아 마신다고 볼 수 있다.일회용 컵의 강변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종이컵은 단 한번 사랑받고 버려지는 신세. 하지만 악취 나는 매립장에 묻혀서 신음하면서도 재생을 꿈꾸는데, ‘몇 백 년 썩지도 않는 몸뚱이임을 알고 비통해 한다. 생태학적 시각으로 다룬 작품이다. 온전히 썩어야 흙이나 거름이 되어 재생의 길을 향할 수 있음에도 오랫동안 썩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순환 길을 가지 못하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공의 과정을 거친 한 사물로서 종이컵이 겪어야 하는 아픔이다.

이상으로 예병태 시인의 시 세계를 조망해 보았다. 그는 현재 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 중이고, 오랫동안 시조 연구를 해왔으며 시조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말의 맛깔스러움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다양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시 세계를 다채롭게 넓히고 있는 것을 이번 시집바람의 얼굴은 잘 말해주고 있다. 그의 철학과 시정신은 자연친화적이면서 성찰의 깊이를 부단히 보여준다.

이 글의 제목을 자책의 시적 승화와 미적 변주라고 붙인 것은 그가 여러 곳에서 자책의 편린들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자책은 말하자면 자기 파멸의 길이 아니라 자기완성을 향한 진정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인생에 대한 성찰에 그 무게를 두는 것이 되겠다. 시인으로서 일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이번 시집에서 읽게 된 점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고전적인 시각이나 일상적인 소재에 머무르지 않는 시적 탐색과 자기 혁신에 보다 진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그러한 자질을 넉넉히 드러내고 있다.

 

두메산골 어르신들

얼굴 한 번 쳐다봐라

 

흙덩이고

풀이고

물이고

나무다

-선거철중에서

 

두메산골 어르신들의 얼굴에서 흙덩이, , , 나무를 읽어낸 눈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참신한 시각과 깊이를 담보하는 천착으로 개성적인 시조 세계로 들어선다면 그의 인생 후반기의 문학 세계는 더욱 윤택하고 기름지게 될 것이다.

오랜 벗으로서 진지한 인생 담론으로 묶여진바람의 얼굴상재를 심축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국밥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민병도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조를 향한 순교자적 면모

이정환

 

민병도 시인은 등단 이후 시조 창작과 그림 작업을 병행해 왔다. 한 가지도 버거운데 그간 두 가지 분야에서 특출한 능력과 성과를 거양해 온 것. 거의 초인에 가까운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시조선집은 그런 의미에서 주목할 일이다. 그의 시조시학의 전모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결산이기 때문이다.

 

시조는 나의 나약한 생각을 살찌우는 가랑비였고, 나의 꿈과 이상을 실어 오는 나룻배였습니다. 그것은 또한 나의 갈증을 해소시키는 냉수였고, 자꾸만 흔들리는 나의 마음을 고정시키는 버팀목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조는 내게 그 어떤 유혹도 떨치고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가 이번에 상재한장국밥서문에 적은 시인의 말의 일부다. 박경용 시인은 일찍이 정완영 선생을 두고 시조를 향한 이 순교자적 면모라는 제목으로 선생의 시조집에 발문을 쓴 일이 있다. ‘시인의 말을 볼 때 순교자적 면모가 오늘에 와서 민병도 시인에게서 자연스럽게 읽히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만큼 시조 하나를 끌어안고 열정을 불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간 그가 펴낸 10권이 넘는 시집과 평론집 등을 통해 그 모든 것을 잘 헤아릴 수 있다. 또한 시조 관련 일들에 수십 년 동안 전념하면서 도도한 시조의 역사에 한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는 칠십 평생 흙을 파며 사셨다

손에 흙이 묻어야 목에 밥이 넘어간다며

말마다 빈들을 깨워 온 몸으로 안았다

 

원하는 3할 치는 밥을 주고 꽃을 주던

세상과의 이별을 위해 어머니가 흙을 놓자

가만히 흙이 다가와 긴 노고를 감싸주었다

 

언제나 땀에 젖어 하나도 젖지 않은

누군가의 몸이었을,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흙이여 너의 몸에선 어머니의 살내가 난다

-전문

 

보다시피 진정성이 묻어난다.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사신 어머니는 손에 흙이 묻지 않고서는 목으로 밥이 넘어갈 수 없다는 인생철학, 생명 철학을 몸소 실천한 분이다. 빈들과 친구였다. 빈들과 한 몸이었다. 빈들과 몸을 섞으며 어기차게 인생을 꾸려나갔던 분이다. 어머니가 생을 다했을 때 가장 깊은 위로를 베푼 것도 흙이다. 그 노고에 찬사를 보내면서 기꺼이 한 몸이 되었다. 그렇기에 흙에서는 어머니의 체취가 고스란히 묻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흙과 어머니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시인과 시조 혹은 예술과의 관계를 떠올려 본다. 그의 시조 사랑은 어머니와 흙과의 사랑에 비견된다. 시조를 써서 어디 큰 영화를 누리거나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레도 시조가 좋아서 무장 좋아서 시조쓰기를 생명처럼 해왔다. 무슨 큰 보상이 있었던가. 결코 그렇지 않다.

순교자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자신의 믿음대로 살다가 믿음을 좇아 세상을 떠난 이들이다. 피가 들끓을 무렵 문학을 시작하여 이제 막 이순을 넘긴 민병도 시인은 남다른 미적 성취,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왔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번 선집은 그 과정에서 하나의 큰 매듭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풀빛 엽서 열린시학 정형시집 106
최화수 지음 / 고요아침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조로 풀어낸 수묵담채화의 세계

이정환

 

1

시와 그림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최화수 시인의 첫 시집풀빛 엽서에서 여실히 느낀다. 좋은 그림은 한 편의 시가 되고 좋은 시는 한 폭의 그림으로 뇌리에 각인된다는 사실이 이번 시집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그의 시편들은 색채 감각이 돋보인다. 그림과 더불어 살아온 시인의 풍모가 자연스럽게 육화된 양상들이 전편에서 읽힌다. 색채 감각은 곧 언어감각으로 전이되는 만큼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어야 하는 시인으로서 남다른 색채 감각을 지녔다는 것은 훌륭한 덕목이다.

그의 작품들은 군더더기가 없다. 간결하고도 알차다. 참신하고도 깊이가 있고 때로 미묘한 사연들이 깃들어 있다. 사물과 세계와 삶에 대한 진중한 탐색과 관찰이 예사롭지가 않다. 감각의 촉수가 잘 발달되어 흡사 순간 포착과 같은 능력으로 이미지를 잡아채어 형상화한다.

예술 활동에는 나이가 따로 없다. 늦고 빠름보다 얼마나 치열한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물론 빠를수록 좋은 일이지만 충분한 경험의 축적을 이룬 연조에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만큼 깊이 있고 폭넓은 세계를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최화수 시인의 시집에서도 그것을 잘 살필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강점은 지금까지 감성의 샘물을 잘 가꾸어 오고 있다는 점이다. 기실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용케도 그러한 순수성과 넉넉한 정서를 품고 있다. 그것은 그가 미적 삶 즉 예술 지향적 삶을 견지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세상 때가 그만큼 덜 묻어 있다는 것은 소중하다. 자칫 세상일에 오랫동안 부대끼다가 자신의 영혼을 훼손당하여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이 적잖다는 것을 생각할 때 외유내강을 떠올리게 된다. 부드러운 외모와는 달리 그가 담력과 용기를 지닌 내강의 생활인이요, 시인임을풀빛 엽서가 잘 말해주고 있다.

진솔한 그의 시편들에는 이따금 이채로움이 보인다. 시인으로서 언어에 대한 미학적 직조에 남다른 공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 때문이다. 부단한 천착과 탐색은 시인으로서 모름지기 해야 할 일이지만, 소홀히 하여 밀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적잖다. 시인은 그것을 경계하며 자신의 생각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완결을 향한 담금질에 열중한다.

 

2

시인은 감성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삶의 한복판을 직시한다. 현대인들의 애환에 대해 따사로운 눈길을 보낸다. 삶이 단순하지 않음을, 지난한 도정임을 새로운 시조로 환기하고 있다.

 

꼭두아침 8차선도로 빈 트럭이 달린다

동여맬 짐이 없는 기다란 검은 밧줄

 

살가운

리본이 되어

바람 따라 춤춘다

 

분홍빛 아침노을 마뜩한 조명에다

선이 선을 물고 그려내는 퍼포먼스

 

연재도

꿈꾸지 못한

저 현란한 리본체조!

-리본체조전문

 

눈에 번쩍 뜨이는 작품이다. 시인의 안목이 놀랍다. 그냥 스쳐가기 쉬운 장면을 이렇듯 두 수의 시조로 되살려 놓다니! 이것은 단순한 서경이 아니다. 첫수가 그 점을 잘 증명한다. 트럭은 긴박한 삶의 한 수단이다. 그 트럭이 지금 비어 있는 채로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다. 동여맬 짐이 없다는 것은 하역 작업을 끝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고, 적재할 물품을 실으러 가는 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꼭두아침 8차선도로를 달리는 중이다. 그런데 기다란 검은 밧줄이 풀려서 살가운 리본이 되어 바람 따라 춤추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밧줄에 투영된 한 사람의 삶이 흔들리고 있는 의미로 곧장 환치된다. 밧줄이 리본이 된 것은 삶을 예술화한 것이다. 밧줄이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춤추고 있는 것은 춤일 수도 있고 삶의 나부낌, 지난한 흔들림일 수도 있다. 시인은 그것을 예리하게 포착한 것이다. 또한 분홍빛 아침노을 마뜩한 조명의 제시와 더불어 선이 선을 물고 그려내는 퍼포먼스를 표현한다. 그러면서 저 리듬체조의 귀재 손연재 선수마저도 따를 수 없는 현란하기 이를 데 없는 리본체조임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기다란 검은 밧줄이 바람에 혹은 세파에 따라 이렇듯 본의 아니게 춤추면서 삶이 얼마나 지고지난하면서도 지순한 것인지를 명징하게 떠올리고 있다는 점에서리본체조는 아주 특별한 시조다.

 

봄은

입을 다물고

겨울은 미련 털지 못해

 

온 누리 숨쉬는 목숨 때를 알지 못한다

 

눈과 비

어리둥절하여

진눈깨비 뿌린다

-간절기전문

 

계절이 바뀔 무렵의 정취를 노래하고 있다. 봄인데 봄은 입을 다물고 있고, 미련이 남은 겨울은 버틴다. 물러갈 것이 물러가지 않고 정작 와야 할 것이 오지 못하고 있는 엉거주춤한 정황이다. 그렇기에 온 누리 숨쉬는 목숨이 때를 알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다. 눈과 비도 분간을 못한다. 어리둥절하여 진눈깨비를 뿌리고 있다.간절기는 겨울과 봄의 교차 지점에서 느끼게 된 정감을 표출하면서 사람살이를 은근히 떠올리게 한다. 분별에 대한 자각 같은 것을.

 

보름달 먹어치운

폭식가 네온사인

 

식곤증 못 이겨서

울컥울컥 뒤척이다,

 

한밤중

게워낸 저 달

담채 풍경 그리는 밤

-도시의 달빛전문

 

도시의 달빛은 달빛의 구실을 하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휘황찬란한 불빛이 잠식해 버렸기 때문이다. 시의 화자는 그 중에서도 네온사인에 시선을 집중한다. ‘보름달 먹어치운 폭식가로 규정하고 폭식 끝에 식곤증을 이기지 못하여 울컥거리며 뒤척이다가 마침내 한밤중에 게워내고 말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달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 순간 담채 풍경이 그려지게 된 것을 화자는 목격한다. 자연과 인공의 충돌 사태 끝에 이루어낸 담채 풍경이다.

 

1

여우비 놀다간 꽃밭

꽃 새댁 다 모였다

 

봉숭아, 나팔꽃, 해바라기, 무궁화

 

남미 댁 채송화까지

어우렁더우렁 정겹다

 

2

사람들은 왜 그럴까?

별의별것 분별한다

 

배고프고 배우고 싶어

코리안 드림 좇아 온 별들

 

괜스레 금 긋지 말고

어울어울 꽃처럼 살아요

-금 긋지 말아요전문

 

요즈음 사회적으로 크게 대두되고 있는 다문화 문제를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다. 넓게 보면 지구촌에 사는 모든 이들은 하늘 아래 한 가족이다. 빈부귀천과 인종으로 따져 구분 짓거나 차별을 받아야 할 아무런 까닭이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 일원에서는 그와 같은 시대 변화에 역행하는 일들이 벌어질 때가 적잖다.금 긋지 말아요에서 첫 수에서는 여러 가지 꽃 이야기를 하다가 둘째 수에서 별의별 것을 다 분별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심성을 질타한다. 그리고 코리안 드림 좇아 온 별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드러낸다. 꽃들이 서로 어우렁더우렁지내듯이 사람들도 공연히 금 긋지 말고 어울어울 꽃처럼 살 것을 희망한다.

 

1

꽃소식 피는 날

생각 하나 피어난다

 

빈 집 사라진 빈 터

지키던 어린 감나무

 

그래도

지난 가을엔

까치밥도 챙기던

 

2

하마 젖니 같은 속잎

솔솔 잣고 있을까?

 

그 모습 삼삼하여

날개 단 내 발걸음

 

어쩌나!

반기던 자리

불도저 이빨질 한창이다

 

3

와락 안겨오는

아지랑이 잔상 같은

 

옹알옹알 일던 감꽃내

새물새물 웃던 풋감

 

허공에

일다 스러져

무채색 아픈 봄날

-감나무를 그리다전문

 

사라진 감나무를 좇고 있다. 한 그루의 감나무는 좁혀서 볼 때 자연이다. 자연이 자연 그대로 있지 못하고 사라져가고 있다는 것은 토포필리아와 더불어 바이오필리아가 흔적조차 없어지는 일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던 곳과 그곳에서 함께 어울려 지내던 이들에 대한 추억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어떤 면에서 그러한 추억의 힘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의 화자가 늘 보던 어린 감나무가 불도저 이빨질끝에 뽑혀져 버린다. ‘하마 젖니 같은 속잎/솔솔 잣고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그 모습 삼삼하여/날개 단 내 발걸음이었는데 그 기대는 송두리째 뭉개져 버리고 만 것이다. 하여 시의 화자에게는 눈부신 봄날이 아니라 무채색으로 아프게 뒤덮인 봄날로 변해 버렸다.

 

1

갈매기 한 무리가

한 방향만 보고 있다

 

누가 구령 붙였나

그림 같은 부동자세

 

두 갈퀴

바위섬 움킨 채

용오름도 버틸 듯이

 

2

스잔한 그 눈매에

얼비친 별을 본다

 

만찬을 떠올릴까

먼 비행을 꿈꿀까

 

나 또한

저처럼 서서

날개 한 쌍 그린다

-부동자세전문

 

부동자세는 시 쓰기에서 관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환기하게 한다. 한 무리의 갈매기가 바위섬에 앉아서 한 곳을 응시하는 일은 흔히 볼 수 있는 비근한 일이다. 그냥 스쳐 버릴 수도 있는데 그 장면에서 부동자세를 읽는다. 그 모습은 용오름마저도 넉넉히 견딜 수 있는 집중력을 보인다. 갈매기들은 그 순간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일까. 마침내 시의 화자도 한 곳에 요지부동으로 서서 날 개 한 쌍을 그리고 있다. 새로운 도약이요, 비상을 꿈꾸는 일이다.

 

풀이든 벌레든

몸에 좋다면 씨 말린다

 

곱디곱게 살고 있는

뭇 생명들 두루 차용한

 

인간은

현재 진행형

빚쟁이 대열에 선

-빚쟁이전문

 

문명 비판적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보신을 위해서라면 가리는 것이 없을 정도니, 이 방면에서는 가히 세계적이다. 지구 곳곳을 찾아다니며 몸에 좋다는 것은 죄다 찾아내어 먹고 마시기를 즐긴다. 풀이든 벌레든 뱀이든 짐승이든 좋다는 것은 씨를 말릴 듯이 섭생한다. 그렇기에 뭇 생명들 두루 차용한 인간은 그 죄가 크고 무겁다. 자연에 무한한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육화한 세계와 그 시정신은 그의 시편들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일이어서 특히 주목된다.

 

1

아침노을 뒷걸음치다 살짝이 되오더니

꽃가지 툭! 쳐서 내 앞에 부려 놓는다

 

게으른

내 눈가풀에

보랏빛 별 스치고

 

2

삿갈 댁 내 어머니 반색하시던 벽오동 꽃

꽃보다 색이 더 고와 오동보라이름 주고

 

손끝에

그 고운 색깔

무수히 지니셨던

 

3

어릴 적 내 예쁜 별명 오동보라 원피스

하이얀 원피스에 오동보라 꽃물 들여

 

골목길

까르르 날리던

어머니빛 아슴한

-오동보라 원피스전문

오동보라 원피스는 시의 화자가 어릴 적 입었던 옷이다. 자주 입곤 하던 그 옷 때문에 별명도 오동보라 원피스였다. 어머니가 하이얀 원피스에 오동보라 꽃물을 들여 손수 지어주신 옷이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어른거린다. ‘보랏빛 별, 삿갈 댁 내 어머니 반색하시던 벽오동 꽃에 대한 추억은 시인의 삶을 지금까지 추동해온 힘이 되었을 법도 하다. 또한 어머니는 손끝에/그 고운 색깔/무수히 지니셨던분이었다. 그렇기에 골목길/까르르 날리던/어머니 빛 아슴한기억이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까지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각 수의 종장 끝마디를 미완의 문장으로 처리하면서 긴 여운을 남기고 있는 점도 눈여겨 볼 점이다.

 

알밤이며 도토리 사람들이 싹쓸이한

겨울산은 배고프다 바람은 더 삼엄하고

 

오지게

다 털린 나목

속속들이 허기다

 

연 사흘 주린 배로 꽁지 쳐진 장끼부부

해종일 쌓인 눈 속 낙엽을 헤집다가

 

떨어진

산열매 몇 알

생일상 받듯 느껍다

-겨울산은 가난하다전문

 

기실 겨울산은 가난하여도 가난하지 않다. 첫 수에서 사람들의 지나친 욕심을 지적한다. 앞서 살핀빚쟁이에서 보인 시각과 다르지 않다. 알밤이며 도토리는 들짐승들의 것이어야 마땅한데 그것을 마구 쓸어 가버린다. 삼엄한 바람과 함께 오지게/다 털린 나목/속속들이 허기로 겨우 견딘다. 마침 주린 배로 꽁지 쳐진 장끼부부가 나타나서 눈 속을 헤집은 끝에 산열매 몇 알을 찾아 모자란 대로 허기를 채운다.

힘겨운 겨울을 나는 장끼와 겨울산이 함께 오버랩 된다. 가난한 겨울산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장끼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니 가난하지 않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할지는 모르나 사람들은 마음으로는 더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겨울산은 가난하다는 그런 일련의 생각들을 은연중 하게 한다.

 

1

허기진 바람이

넌출거리는 밤하늘

 

푸른빛

소용돌이치는

고흐의 별이 뜬다

 

에움길

삼나무 홀로

그 별들 세고 있다

 

2

아스란 미리내강

수만 번 굽이치다

 

그 푸른 소용돌이

동해에 일렁인다

 

봄 바다

흐드러진 도화

붉은 꽃내 맡는 밤

-고흐의 별전문

 

고흐의 별허기진 바람이/넌출거리는 밤하늘//푸른빛/소용돌이치는/고흐의 별에서 감지한 이채로운 이미지를 육화하고 있다. 고흐의 그림은 그 자체로서 한 편의 시가 되고도 남는다. 유달리 독특한 색채로부터 비롯된 조형미학은 독보적이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내면의 굴절과 광란과 열정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둘째 수에서는 이미지가 공간 이동을 하여 배경이 동해가 된다. ‘에움길/삼나무 홀로/그 별들 세고 있던 정경이, ‘그 푸른 소용돌이봄 바다/흐드러진 도화/붉은 꽃내 맡는 밤으로 전이된 것이다.

고흐의 그림 이야기로 그치지 않고 이렇듯 자신의 이야기로 전환시킨 것이 이 시편의 특징이다.

 

목련꽃 떠나버려 설레다 만 산책길

꽃잎 이운 자리 얄미운 잎새들만

 

불현듯

눈에 들어온

이제 갓 핀 한 그루 목련!

 

나도 한 송이 빛 고운 목련으로

휘어진 꽃가지 더 휘게 앉고 싶다

 

늦어서

오히려 눈부신

길섶의 저 목련처럼

-늦깎이전문

 

뒤늦게 핀 목련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있다. 나도 저 목련처럼 늦게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앞으로 소담한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소망을 노래한다. ‘나도 한 송이 빛 고운 목련으로/휘어진 꽃가지 더 휘게 앉고 싶다에서 보듯 그의 바람은 아름답다. 이미 휘어진 꽃가지를 더 휘게 앉고 싶다는 대목에서 정신적인 세계를 부단히 추구하는 화자의 진솔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이 곡진함은 시인에게는 소중한 덕목이다.

늦어서 오히려 눈부신시인의 길이 멀리 환히 내다보인다.

 

속잎 잣던 실버들

졸고 있는 오월 한나절

 

마믈마믈 수면위로

입질하는 저 밀어들

 

일순간 속살 가르며

흰 포물선 솟는다.

 

휘우듬 낚싯대에

번뜩이는 은비늘

 

미각이 곤두선 찰나

삼켜버린 미끼 탓에

 

숨 가쁜 생명줄 잡기

유등지도 숨 고른다.

바늘을 뽑아내고

돌려보내는 그 순간

 

첨버덩! 환한 물속

물기둥 하나 새긴

 

그 자리 다울찬 연꽃

연등처럼 피겠다.

-유등지 오월전문

 

섬세한 눈길을 십분 활용하여 장면들을 세세히 붙잡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유등지 오월은 생명에의 찬가다. ‘속잎 잣던 실버들/졸고 있는 오월 한나절마믈마믈 수면위로/입질하는 저 밀어들일순간 속살 가르며/흰 포물선으로 솟는 정경에서 생명력을 온몸으로 느낀다. 둘째 수에서 한 마리의 물고기를 낚아채고 있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는데 셋째 수에서 다시 바늘을 뽑고 잡은 물고기를 돌려보낸다. 그렇지 않다면 오월의 유등지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끝 수 종장에서 환한 물속에 물기둥 하나 새기고 떠난 자리에 다울찬 연꽃/연등처럼 피겠다고 노래한다. 이 마무리에서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와 상생을 읽는다.

 

1

두어 골 이랑타서 봄씨 솔솔 뿌린다

 

잠 든 흙 간질이며

곰실곰실 일어난 떡잎

 

쪼 옥 쪽

기지개 켜며

키 한 뼘 자란다

 

2

아침 햇발 웃어 주니 옹알이 하는 거 봐

 

한낮엔 도담도담

푸른 속잎 웃자라고

 

밤이면

총총한 별보고

별 닮은 꽃도 맺는다

 

3

오랜만 참 오랜만에 나도 풀빛 들었나 봐

 

풀각시 비녀 꽂아

시집 장가보내던

 

어릴 적

소꿉친구에게

풀빛 엽서 띄운다

-풀빛 엽서전문

 

풀빛 엽서는 표제시다. 단아한 서정성이 돋보인다. 첫 수에서 생명의 봄씨를 뿌리는 장면을 두어 골 이랑타서라고 표현한다. ‘잠 든 흙 간질이며/곰실곰실 일어난 떡잎//쪼 옥 쪽/기지개 켜며/키 한 뼘 자란다라는 대목도 자연스럽고 실감실정 그대로다. 둘째 수에서 아침 햇발 웃어 주니 옹알이 하는 것을 본다. ‘한낮엔 도담도담/푸른 속잎 웃자라고//밤이면/총총한 별보고/별 닮은 꽃도 맺는다라는 구절도 인상적이다. 셋째 수에서 마침내 시의 화자도 참 오랜만풀빛이 들어버린다. 그래서 풀각시 비녀 꽂아/시집 장가보내던/어릴 적/소꿉친구에게/풀빛 엽서를 띄우게 된다.

이렇듯풀빛 엽서는 정으로 넘친다. 한국인의 정서 중에 가장 으뜸이 되고 상징이 될 수 있는 말로 한 외국작가는 을 말한 바 있다. 이 작품에는 그러한 정이 듬뿍 담겨 있다. 이 점은 최화수 시인의 시집 전편에서 읽을 수 있는 특징이다. 남다른 정이 그의 삶과 문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본다.

3

최화수 시인은 늦깎이다. 늦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늦지 않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이미 학창시절에 시조를 접한 바 있고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다시 시작한 것이 늦었을 뿐이다.

내면에 창작에의 열정이 들끓고 있었고, 충분한 인생 경험도 축적되어 있었기에 어느 날 그 불씨를 되살리게 된 것이다. 진정으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어 그 길을 걷게 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한 편의 시조를 빚어놓고 스스로가 대견하여 때로 감탄하고 때로 아쉬워하기도 한다. 쓰고 싶은 텍스트들은 수북한데 시간에 쫓기기도 한다. 시조를 쓰면서 우리말의 묘미와 다함없는 울림에 늘 탄복해마지 않는다. 더불어 시조가 가진 정형미학의 우수성 앞에 늘 겸허한 자세를 보인다.

이제 첫 출산이니 산고도 큰 만큼 기쁨도 갑절이리라. 첫 시집풀빛 엽서의 상재를 축하하며, 앞으로의 시조 인생에 눈부신 빛이 가득하기를 기원 드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