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얼굴
예병태 지음 / 만인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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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의 시적 승화와 미적 변주

이정환

 

1.

예병태 시인은 특히 삶에 철저하다. 이 땅에 사는 그 누구인들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않는 이가, 충실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삶에 대하여 늘 좌정하는 모습을 견지하는 철두철미한 생활인이요, 교육자요, 시인이다. 그의 시집 전편을 면밀히 읽어가면서 시종일관 느낀 것은 그는 참 모범 답안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시인으로서 한 편 한 편의 시조를 매만질 때마다 성심을 다하고 있는 것을 산견한다. 물론 이 점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그러나 이만큼 진지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고유의 우리말에 대한 식견은 놀랍다.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낱말들을 적재적소에 앉혀서 끈질기게 체현해 보이고 있는 점은 주목할 일이다.

그의 이번 시집바람의 얼굴은 다소 고전적인 분위기를 품고 있지만 여러 작품들에서 참신한 발상과 형상화를 통해 시의 한 정점에 이르고자 하는 강한 열망을 보인다. 그런 점이 적지 않은 연치에 비해 신선하게 읽힌다.

 

토막 나고 켜지고 쪼개진 생의 편린을

수직으로 수평으로 빗살로 엮은 평생

수없이 교차하면서 촘촘한 인연 쌓았다

-나무의 꿈중에서

 

인연’, ‘평생과 같은 말이 녹아 있지 않지만, 문살을 보며 나무의 꿈을 떠올리면서 촘촘한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징하게 말하고 있다. 삶에 대한 그의 자세가 여실히 읽힌다. 수직과 수평의 원활한 교직 혹은 교감으로 주어진 생을 넉넉하게 살아가야 함을 은연중 환기하는 작품이다.

갈대숲에 가면 그저 갈대가 되는 거야

눈물처럼 스며오는 싸한 안개에 젖어

바람의 감궂은 짓도 몸 흔들어 재우고

-갈대숲에 가면중에서

 

그렇다. 갈대숲에 가면 갈대가 되고, 버드나무숲에 들면 버들이 되고, 억새밭에 서면 억새가 되어야 한다. 싸한 안개가 눈물처럼 스며오는 것을 굳이 밀쳐낼 일이 아니다.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바람의 감궂은 짓도 몸 흔들어 재울 줄 알아야 한다. 시인은 그러한 생각을, 철학을갈대숲에 가면에서 여과 없이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자연스러움과 세계와의 불화가 아닌 조화는 그의 삶의 지향 향방을 넌지시 일러주는 것이다.

 

끌탕으로 점철된 여정旅程의 지층

높이만 쌓아올려 미진에도 흔들리고

아무리 비끄러매도 엇나가고 깨진다

 

마음결 넓게 잡아 헤식은 층 다지고

낮지만 튼튼한 나만의 자리매김

무녀리 올무를 벗고자 뼈지게 다짐한다

-결뉴結紐전문

 

제목이 특이하다. ‘결누끈을 맴 또는 얽어 맺음, 서약을 함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이다.결뉴結紐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경영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의지를 육화하고 있다. ‘미진에도 흔들리고/아무리 비끄러매도 엇나가고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한 부단한 노정 속에 높이만이 전부가 아니라 낮더라도 튼튼한 나만의 지층을 쌓아올리겠다는 것이다. ‘다짐한다는 진술이 아쉽긴 하지만 끌탕, 비끄러매도, 헤식은, 무녀리와 같은 어휘들이 적절하게 놓인 점이 눈길을 끈다. 결뉴結紐에서 보인 시각은계영배에서 몸속에 은장도처럼 날 세우고 있기에!’라는 대목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수천 개의 섬들이 남·서해에 터 잡을 때

유독 나는 울릉도 곁 동해에 자리 잡아

아아峨峨히 버티고 서서

문지기를 자처했다

 

살점 뜯는 격랑도 갓밝이의 추위도

등뼈를 곧추세우고 지르보며 참았지만

왜인들 물개 절멸은

죽기보다 괴로웠다

 

침탈의 입살이 파도 따라 밀려와도

호국의 정신은 해미처럼 피어나서

뼈지게 으레 지키겠다

어둑발도 뚫으며

-독도전문

 

독도는 독도가 시의 화자가 되어 결의를 다지는 발언을 한다. 한반도의 문지기를 자처한 섬이다. ‘살점 뜯는 격랑도 갓밝이의 추위도 등뼈를 곧추세우고 지르보며 참아온 섬 독도는 그러나 왜인들 물개 절멸은/죽기보다 괴로웠던 것이다. 셋째 수에서는 결의를 다진다. 해미처럼 피어나는 호국의 정신으로 어둑발도 뚫으며 뼈지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요즘도 여전히 침탈의 입살이 파도 따라 밀려오고 있는 중이다. 현재진행형의 사안이다. 입을 다물어야 마땅한 쪽에서 종내 그 입을 다물지 못하고 더욱 소란을 떠니 어찌할 방도가 없다. 최근 독도에 간 일본 역사학자와 승려 세 사람이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외친 적이 있다. 이들은 시민단체 회원들로서 그 중 구보이 교수는 독도는 일본이 러일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강점한 것이라면서 일본에 가서 올바른 역사 부교재를 만드는 등 독도가 한국 땅임을 알리는데 앞장서겠다.”고 말하고 있다.

예병태 시인의독도는 우리 역사의 위의를 세우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생각이 복잡할 땐

따스한 자갈을 잡아 봐

굴신하기 싫으면

모래사장에 누워 하늘을 봐

흰소리 하고 싶거든

물소리에

귀 기울여 봐

-동창천 4전문

비좁은 바위틈을 가파르게 올라가서

암벽 끝 목마타고 지나온 길 굽어보니

가슴이 너무 좁아서 저 초록 못다 담겠다

-등산중에서

 

때로는 몽우리였으면, 조붓한 바위틈의

꿈꾸었던 세상을 촘촘히 채워 넣어

살며시 꽃숭어리를 소담스레 피우는

 

한번쯤 미물이라면, 찌든 허물을 벗는

야린 피부를 가다듬고 구겨진 근육 펴서

드넓은 세상을 향해 새롭게 날개짓 하는

 

때때로 나무였으면, 교목은 아니어도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이드거니 머금고

제자리 지켜가면서 나이테를 새겨가는

-때로는전문

 

시인은 자연친화적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묘미를 알고 있다. 위의 세 편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자연을 거스르는 삶을 원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 부대끼다 보면 진종일 하늘 한번 우러러 보지 못하고 보낼 때가 적잖다. 위의 시편들은 모두 우리에게 여유로운 시간을 가질 것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동창천 4에서 자갈과 모래사장 그리고 물소리와 어울릴 것을 권한다. 철근과 시멘트로 뒤덮인 도심지를 떠나 동창천으로 오라는 것이다. 와 보면 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것이다.

등산에서 시인은 자연 앞에 겸손함을 보인다. 가슴이 너무 좁아서 저 초록 못다 담겠다는 것이다. 무한량의 초록물결로 뒤덮인 산을 바라보면서 삶의 활력을 만끽하는 중에 자신의 존재가 미미하여 저 엄청난 초록을 자신의 가슴 속에 다 감당하지 못하겠노라는 경이의 탄복을 한다. 능히 그럴 일이다.

때로는은 각 수의 종장 끝마디를 미완으로 마무리하는 시도를 보인다. 이러한 작은 실험은 그가 처음 시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가진다. ‘몽우리, 미물, 나무가 되고자 하는 염원을 자연스럽게 풀어가고 있다. 꽃숭어리를 피우고, 새로운 날갯짓을 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나이테를 새겨가는 소담스러운 삶을 구가하고자 하는 바람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어느 때나 불쑥불쑥 찾아오는 이방인

부드럽게 다가와서 힘껏 밀치기도 했지

이따금 살을 에는 듯한 아픔마저 주었지

 

불현듯 내 등 뒤를 쫓아다니는 미행자

해미 속의 갑판, 벼랑 끝 바위까지

너 몰래 더 이상 숨을 곳 찾을 수 없었지

 

그러나 너는 머물지 않는 방랑자

무람없는 몸짓조차 구순하고 편해질 때

소맷귀 잡을 새 없이 표표히 사라졌지

-바람의 얼굴전문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바람을 노래한 바 있다. 삶의 중심에서 더불어 움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바람을 활용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마음을 전하고 바람 때문에 울고 바람 때문에 웃으면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바람은 시의 주된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바람의 모습은 대체 어떤 것인가 하고 생각한 끝에바람의 얼굴을 쓴 것으로 보인다. 바람의 얼굴을 스케치하는 일은 상식선을 뛰어넘기가 어렵다. 이 작품도 그런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둘째 수에서 해미 속의 갑판, 벼랑 끝 바위까지라는 독특한 장면 제시로 말미암아 이 작품의 무게감이 달라지고 참신성이 가미되면서 의미가 증폭된다. 거기에다가 무람없는, 구순하고라는 낱말이 셋째 수에 놓여 의미를 확장하고 있는 것도 이 시편의 평이성을 극복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바람의 얼굴은 자신에게 불어 닥치는 바람을 잘 제어하고 이겨내거나 화목을 이룰 때 한 사람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은연중 일깨우는 점에서 예병태 시조시학의 한 축이 될 작품이다.

 

너무나 미워해서 원망으로 남았을

너무나 집착해서 몸서리가 쳐졌을

죽어서 받을 벌들을 당겨서 받고 있다

-불면중에서

 

누구나 불면의 밤을 겪게 마련이다. 시인은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잠 못 이루는 밤 혼자 깊은 생각에 빠져 자신을 한없이 자책한다. 자책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삶의 노정이 자책의 연속임을 아는 이는 다 안다. 죽어서 받을 벌을 미리 받고 있다는 진술도 공감이 간다. 극심한 불면은 보통의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망과 몸서리쳐짐은 그런 점에서 불면의 무서운 선물(?)이다. 이겨내고 난 후 그 후유증은 크다. 자고 싶다 자고 싶다 외칠수록 더욱 초롱초롱해지는 의식으로 말미암아 하얗게 어둠을 갈아 끝도 없이 마시는 일을 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삶이 우리에게 안기는 말 못할 아픔들이 화인처럼 눈앞에 떠오른다.

빛바랜 사진 속에 아버지가 웃고 있다

포연 사이 짬을 내어 말끔한 군복 입고

생사의 길목에서도 늠름하고 힘차다

-아버지의 사진중에서

 

아버지는 전쟁이 한창 중에 한 장의 사진을 찍는다. 사진은 남고 자신이 혹 떠나게 되는 것을 염두에 둔 것인지도 모른다. 생사의 길목에서도 말끔한 군복을 차려입은 늠름하고 힘찬 모습이다. 포연이 가시지 않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사진을 남긴다는 것은 비장함이 함께 하는 일이다.

모처럼 차려 입은

옷이 젖어 속상하다

직접 당해보니

이름 한번 잘 지었다

뒤통수

치고 나서는

시치미를 뚝 떼는

-여우비전문

 

기실 여우와 비는 서로 상관성이 없다. 햇빛 나는 데 오는 비 때문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여우가 끌려 나와서 여우비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므로 여우로서는 가당찮은 일이다. 여우의 속성으로 인한 것이기에 여우비라는 말은 울림이 남다르다. 시의 화자는 뒤통수 맞고 나서야 누가 지은 지 모를 여우비라는 말을 실감한다. 시인은 모름지기 사물과 세상 그리고 삶에 대해 부단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라고 볼 때 최초로 여우비라는 합성어를 만들어낸 사람도 시인이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다. 가볍게 읽히는 시편이다.

석양이 가까워져 그림자가 길어지니

혐오하고 회피했던 어두운 장면들이

아무리 밀쳐내어도

자꾸만 다가설 뿐

 

검은 리본 장식한 액자 속의 얼굴들

내 배려와 나눔이 부족했음을 자책해도

적멸의 공간 속에서

묵언으로 응시할 뿐

액자 속의 내가 마주선 내게 귀띔한다

대금처럼 속을 비워야 청아한 음이 나지.”

올 때에 이슬이었으면

갈 때는 바람일 뿐.”

-이별 준비전문

 

이별 준비는 돌연 숙연하게 한다. ‘석양이 가까워져 그림자가 길어지면서 내면의 갈등이 표출된다. ‘어두운 장면들을 아무리 밀쳐내어도 자꾸만 다가서는 것을 막지 못한다. ‘검은 리본 장식한 액자 속의 얼굴들을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그 순간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적멸의 공간 속에서 묵언으로 응시할 뿐임이 분명하다. 유한의 생을 살다가는 존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편의 특이한 상황 설정 방식은 액자 속의 내가 마주선 내게 귀띔하고 있는 그것이다. 이러한 죽음에 관한 연습은 삶의 성찰에는 더 없이 좋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대금의 속성을 떠올린다. 청아한 음의 비결은 속을 비우는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올 때의 이슬과 갈 때의 바람으로 끝맺으면서 현존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환기하게 한다.

 

봉정사 초입에 울창한 참나무숲

딱딱딱굵은 줄기를 쪼아대는 딱따구리

점들은 공명이 되어 풀잎에 튀고 파닥인다

 

몇 번이나 쪼아야 한 세상이 열릴까

점과 점 간극에는 명암이 교차하고

잊었던 삶의 애환들도 보이다 스러진다

 

빼고 싶은 점들이 흔들어도 붙어 있다

아직도 살아 있으니 찾아야할 봄날들

목련이 하늘을 열 듯 그 환희의 점 하나

-점을 찍으며전문

 

점을 찍으며는 구체성 즉 리얼리티가 있는 시조다. 사유의 깊이가 실제적인 장면과 원활하게 접목되어 미묘한 파장과 울림을 안긴다. ‘봉정사 초입 울창한 참나무숲에서 굵은 줄기를 쪼아대는 딱따구리가 만들어내는 점들이 공명을 이루면서 풀잎에 튀고 파닥이고 있다. 퍽 세밀한 관찰이다. 둘째 수에서는 점과 점 간극에 얼비치는 명암을 보고 잊었던 삶의 애환들도 눈여겨본다. 그리고 빼고 싶은 점들이 흔들어도 붙어 있는 것을 자각하면서 아직도 살아 있으니 찾아야할 봄날들에 대한 희구를 드러내 보인다. 그것은 뒤이어서 목련이 하늘을 열 듯 그 환희의 점 하나로 귀결되면서 시종 잔잔한 톤의 이 작품의 기운이 긴 여운을 안긴다.

 

내 마음 비웠지만 이 말 만은 해야겠다

녹음 짙은 고향에서 무참히 베어져서

갖가지 심문을 해도 내일 위해 참았음을

 

컵으로 변신한 나를 감싸 쥐고

살며시 입 맞추며 커피를 마실 때도

하얗게 변한 얼굴을 원망하지 않았음을

 

단 한번 사랑받고 버려지는 신세이고

누런 액이 묻은 채 내팽개쳐져 있을 때도

구겨진 자존심보다는 재생을 꿈꿨음을

 

악취 나는 매립장에 묻혀서 신음할 때도

밀알처럼 희생하여 많은 열매 꿈꿨는데

몇 백 년 썩지도 않는 몸뚱이가 괴로웠음을

-일회용 컵의 강변전문

 

종이는 나무에게서 나온 것이다.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종이컵도 나무를 깎아서 만든 그릇에 커피나 음료수를 담아 마신다고 볼 수 있다.일회용 컵의 강변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종이컵은 단 한번 사랑받고 버려지는 신세. 하지만 악취 나는 매립장에 묻혀서 신음하면서도 재생을 꿈꾸는데, ‘몇 백 년 썩지도 않는 몸뚱이임을 알고 비통해 한다. 생태학적 시각으로 다룬 작품이다. 온전히 썩어야 흙이나 거름이 되어 재생의 길을 향할 수 있음에도 오랫동안 썩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순환 길을 가지 못하니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인공의 과정을 거친 한 사물로서 종이컵이 겪어야 하는 아픔이다.

이상으로 예병태 시인의 시 세계를 조망해 보았다. 그는 현재 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 중이고, 오랫동안 시조 연구를 해왔으며 시조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말의 맛깔스러움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다양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시 세계를 다채롭게 넓히고 있는 것을 이번 시집바람의 얼굴은 잘 말해주고 있다. 그의 철학과 시정신은 자연친화적이면서 성찰의 깊이를 부단히 보여준다.

이 글의 제목을 자책의 시적 승화와 미적 변주라고 붙인 것은 그가 여러 곳에서 자책의 편린들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자책은 말하자면 자기 파멸의 길이 아니라 자기완성을 향한 진정성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인생에 대한 성찰에 그 무게를 두는 것이 되겠다. 시인으로서 일가를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이번 시집에서 읽게 된 점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고전적인 시각이나 일상적인 소재에 머무르지 않는 시적 탐색과 자기 혁신에 보다 진력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그러한 자질을 넉넉히 드러내고 있다.

 

두메산골 어르신들

얼굴 한 번 쳐다봐라

 

흙덩이고

풀이고

물이고

나무다

-선거철중에서

 

두메산골 어르신들의 얼굴에서 흙덩이, , , 나무를 읽어낸 눈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참신한 시각과 깊이를 담보하는 천착으로 개성적인 시조 세계로 들어선다면 그의 인생 후반기의 문학 세계는 더욱 윤택하고 기름지게 될 것이다.

오랜 벗으로서 진지한 인생 담론으로 묶여진바람의 얼굴상재를 심축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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