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선 한 척 만인시인선 52
만인사 편집부 엮음 / 만인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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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미학의 새로운 지평

이정환

 

1

좋은 글을 쓰려면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더불어 남다른 전략이 있어야 한다. 무턱대고 노력한다고 높은 성취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 쓰려면 많이 읽고 곰곰이 읽어야 하며, 실험정신과 창의적인 안목을 갖추고 다채로운 주제를 다양하게 써보아야 한다. 쓰다가 목숨이 다하더라도 추호의 후회도 없을 글쓰기, 그러한 일이 더욱 요구되는 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절이 하 수상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쓰지 않고 사람이 나아지는 길은 결단코 없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속화의 길을 걷는다. 속화를 이기는 길은 무엇인가. 삶 속에서 미적 자질을 찾아내어 그 미적 체험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일이다. 그것을 주업으로 하는 사람이 시인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사물과 세계에 대해 미세한 감각의 촉수를 늘 벼리고 있어야 한다. 그런 다음 사유의 깊이를 더하기 위해 몰입을 해야 한다.

 

2

백점례 시인은 사물과 세계의 비의를 개성적인 가락과 비유로 육화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래서 그의 첫 시집은 괄목상대다. 모르기는 몰라도 그의 등장은 시조문단에 새로운 개성의 출현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도토리 키 재기 하는 곳에서 군계일학의 면모로 나타나서 주위를 능히 압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첫 시집버선 한 척의 전편을 면밀히 살피고 난 후 내린 단언이다.

그의 시선은 무척 다채롭다. 현실을 직시한다. 내면 탐색과 더불어 현실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탐구하고 육화하는 일에 진정성과 능숙함을 보인다. 그만큼 그의 기량이 어느 정점에 올라섰다는 방증이다. 그는 어떠한 소재를 주어도 어려움 없이 형상화할 수 있는 공력을 지닌 시인이다. 오랫동안 절차탁마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까닭일 것이다. 바탕이 잘 닦여 있어 흔들리지 않는 힘을 갖췄고 그렇기에 추동력이 있다. 또한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새로운 낱말들을 발굴하여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는 것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신인으로서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작품을 보자.

 

불볕 터진 들녘 너머 풀떨기 못물 아래

따라지들 몰려들어 스크럼을 짜고 있다

물길이 빠져나가다 멱살 잡혀 누워 있다

 

골풀의 부추김에 울컥 솟은 부들이며

핏줄 푸른 마름 곁에 웃자란 생이가래

한평생 반듯한 자리 올라설 수 없었다

 

부푸는 소문의 늪 뻗쳐 오른 결기마저

시간이 지나가면 너겁이 되고 만다

숨었던 실뱀 한 마리 심란하게 지나가고

 

흔들리는 그 바닥도 우주임을 알았을까

수렁에 빠진 무릎 수면으로 기어올라

한켠에 노랑어리연 발 씻으며 웃는다

-물풀전문

 

물풀은 섬세한 시각의 산물이다. 물풀을 노래하되 서경에 그치지 않고 있다. 언뜻 보면 자연 묘사 같지만 둘째 수 종장 한평생 반듯한 자리 올라설 수 없었다에서 보듯 사람살이를 환기하고 있다. 골풀과 부들과 생이가래의 생존이 그러하다. 생명시학적 관점에서 애정 어린 눈길로 물풀을 바라본다. ‘부푸는 소문의 늪 뻗쳐 오른 결기마저/시간이 지나가면 너겁이 되고 만다에서 보듯 어떠한 몸부림을 보이지만 그 결기가 괴어 있는 물에 떠서 한데 몰려 있거나 물가에 밀려나온 검불과 같은 너겁이 되고 만다. 분명한 한계의식의 표출이다. 넷째 수에 와서 반전을 보인다. 희망의 빛이 펼쳐진다. 흔들리는 그 바닥도 우주임을 알게 된 노랑어리연이 수면으로 기어올라 와서 발을 씻으며 웃고 있는 것이다.

몰려와서 스크럼을 짠 따라지들의 끈덕진 삶이 물길을 막을 정도이니 뒤틀린 세상사가 바로 잡혀지지 않을까.물풀은 그런 희망과 의지의 현현인 셈이다.

 

1

세상의 모든 말은 벌레 소리로 울어댄다

토막 나 떠다니는 그 낱말 담으려고

귓바퀴 둥글게 모아 궁리하는 저 남자

 

오래도록 식상한 말, 냄새나는 소문들이

까맣게 날아들어 그의 귀를 파먹었나?

촉수를 촘촘히 펴서 맑은소리 걸러본다

 

 

2

보청기 앞에 한 아이가

아저씨, 이거 뭐에요?”

이것은 별 얘기를 훔쳐 듣는 것이란다.”

한순간 유치원 앞길 시선들이 몰려왔다

 

별의 말을 담고 싶던 그 남자 가는귀에

쏙쏙 여미어지라고 들여앉힌 소라의 방

우르르 모인 눈동자들 쫑알쫑알 반짝인다

-별 이야기 듣는 남자전문

 

잔잔한 웃음을 머금게 하는 작품이다. 동화적인 배경을 깔고 있어 꿈꾸게 한다. 보청기는 소리를 듣기 위한 보조 장치다. 그것을 두고 별 이야기 듣는 남자로 의미를 확산한 것은 이채롭다. 아래는별 이야기 듣는 남자에 대한 박성민 시인의 언급이다.

 

별 이야기 듣는 남자에서는 보청기를 낀 늙은 남자를 형상화하는 감각의 촉수가 빛난다. ‘세상의 모든 말은 벌레 소리로 울어댄다는 도입부의 표현미가 돋보이며, 첫 수와 둘째 수는 시적 대상을 자신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신선미가 느껴진다. 아이와 남자, 잘 들을 수 있는 귀와 잘 들리지 않는 귀의 대조를 통해 힘겨운 삶의 외면을 드러내면서도 그 안에 해학을 가미함으로써 재미있게 읽혀지는 효과를 준다.

 

제대로 못 듣는 세상의 소리들을 귀담아 듣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한 남자는 아마 그 이전에 오래도록 식상한 말, 냄새나는 소문들이/까맣게 날아들어 그의 귀를 파 먹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맑은 소리를 걸러 보기 위해 애쓰는 그 남자 앞에 어느 날 한 아이가 다가온다. 그 아이의 질문에 별 얘기를 훔쳐 듣는 것이란다라는 답을 한다. 순진무구한 아이는 그것을 곧이듣는다. 유치원 아이들은 떼로 몰려오고 눈동자들이 쫑알쫑알 반짝인다.

, 언젠가 한 번쯤은

뜨겁게 타올라서

발목 저린 가풀막에 벌건 노을 질러 놓고

깃발이

휘날리듯이

저 협곡을 건너리

 

잡힐 듯 너울대며

바람은 산을 넘고

잠재운 불씨 안고 앙센 몸 다독여도

제 자리

그리 맴돌며

핏발이 선 눈망울

 

벙그는 꿈을 꾸다

단단해진 붉은피톨

그래, 꼭 한번은 번갯불에 뛰어들리

누구도

근접하지 못할

뇌관 하나 감춘채로

-성냥개비전문

 

존재론적 성찰이다. 성냥개비는 곧 자아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작은 불씨가 거대한 산을 태운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길이 협곡도 건너고 산을 넘는다. 이 불은 꿈을 꾸며 움직이는 생명체로서 앞으로 무한한 힘을 받을 수 있다. 강력한 불길이 되어 새로운 역사를 적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꼭 한번은 번갯불에 뛰어들리라고 다짐한다. ‘누구도/근접하지 못할/뇌관 하나 감춘채로이다.

이러한 열망은 삶을 추동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되는 것이다.

구름의 입자에 낱낱이 풀 먹인 햇살
빳빳한 부챗살을 와이드로 펼쳐놓고
고성능 카메라 들어
지상을 조명한다


찬란한 빛이 내려 집중으로 꽂히는 곳
엊그제 폭풍우에 휩쓸린 강 언저리
진창의 나뭇가지들

찢긴 잎이 결연하다

지친 발을 멈추고 젖은 눈으로 시청한다
먹구름 낀 하늘에 생생한 빛 불어넣는
밑바닥 살아내는 일
눈부시다, 때로는

-틴들현상에 대한 명상전문

 

틴들현상은 입자들에 부딪친 햇빛이 신비로운 빛줄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빛 내림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일이 생긴다. 이 시조에서는 특히 둘째 수를 주목하게 된다. 찬란한 빛이 내려 집중으로 꽂히는 곳/엊그제 폭풍우에 휩쓸린 강 언저리/진창의 나뭇가지들/찢긴 잎이 결연하다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있다. 시인의 감각이 남달리 미세하다. 어떻게 이런 섬세한 촉수를 가다듬게 된 것일까. 아무래도 천부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새로운 이미지를 포착하여 형상화하는 과정이 이채롭다. 빛이 집중적으로 꽂히는 곳은 폭풍우에 휩쓸린 강 언저리이고, 찢긴 잎이 결연하기까지 한 나뭇가지들이다. 거기에서 밑바닥 살아내는 일이 때로 눈부신 것을 읽는다.

 

너도 한번

박차고 뛰어나가 보겠는가

대오의 끄트머리 못 벗어난 보폭의 한계

단번에 무너뜨리고

날아올라 보겠는가

 

겨냥한

과녁을 향해 표창을 던지듯이

쳇바퀴 저 밖으로 나를 떼미는 거다

발 앞의 돌멩이 하나도

새로 읽는 이즈음에

 

헐거워진

밑바닥을 거미줄 쳐 맴돈 시간

어느 날 쪼개질 듯 번갯불을 안는 순간

암팡진 날개가 되어 힘차게 나는 거다

 

반란은

꿈도 못 꿨던 따라지의 저린 오금

꺽지게 어깨를 펴고 삿대질도 한번 하고

중심에 화살촉 하나

결곡하게 박는 거다

-돌멩이를 보면 차고 싶다전문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다라는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시조가 지나치게 얌전하고 예쁘고 단아한 것이 적지 않은 흠결이라고 볼 때 백점례 시인의돌멩이를 보면 차고 싶다는 완강한 일탈을 꿈꾸고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대오의 끄트머리 못 벗어난 보폭의 한계를 박차고 뛰어나가 볼 것을, ‘단번에 무너뜨리고/날아올라볼 것을 은근슬쩍 권한다. 또한 쳇바퀴 저 밖으로 나를 떼미는일을 과감하게 해보라고 주문한다. 물론 발 앞의 돌멩이 하나도/새로 읽는 이즈음에 와서 긴박하게 생각하는 문제다. 그리고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을 헐거워진/밑바닥을 거미줄 쳐 맴돈 시간이라는 아주 적절한 비유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어느 날 쪼개질 듯 번갯불을 안는 순간/암팡진 날개가 되어 힘차게날아오를 것을 희구한다. 이어서 반란은/꿈도 못 꿨던 따라지의 저린 오금이었던 자신을 다그치면서 꺽지게 어깨를 펴고 삿대질도 한번 하고/중심에 화살촉 하나/결곡하게 박고자 한다.

화자의 단호한 결기에 전율할 정도다.돌멩이를 보면 차고 싶다는 시인이 어떠한 각오로 문학에 임하고 있으며, 어떤 작심으로 시조를 쓰고 있는지를 여실하게 말해준다. 든든한 시 정신과 강렬한 도전의식을 높이 살 일이다.

참 고단한 항해였다

거친 저 난바다 속

풍랑을 맨손으로 돌리고 쳐내면서

한 생애, 다 삭은 뒤에 가까스로 내게 왔다

 

그 무슨 불빛 있어

예까지 내달려 왔나

가랑잎 배 버선 한 척 나침반도 동력도 없이

올올이 힘줄을 풀어 비바람을 묶어낸 날

 

모지라진 이물 쪽에 얼룩덜룩 번진 설움

다잡아 꿰맨 구멍은 지난날 내 죄였다

자꾸만 비워 낸 속이 껍질만 남아 있다

 

꽃무늬 번 솔기 하나 머뭇대다 접어놓고

주름살 잔물결이 문지방에 잦아든다

어머니, 바람 든 뼈를

꿈꾸듯이 말고 있다

-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전문

 

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는 그의 등단 작품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기에 심사평을 옮겨본다.

 

곡식을 되로 될 때 반듯하게 깎아서 정량만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덤으로 한 줌 더 얹어 주기도 한다. 그 한 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인심이 후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응모작들은 저마다 되로 담기에는 모자라지 않았지만, 흑백 속에 숨어 있는 긁힌 상처의 흔적을 읽어내는 일에 다소간 편차를 보였다. 인심이 후하다는 말을 들을 길은 없는 선자는 여러 작품들 중에 단 한 편만 으뜸의 자리에 앉힌다.

당선작 백점례 씨의 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의 시적 배경이나 제재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생을 항해로 본 것이 그것이고, 몇 군데 낯익은 표현이 드러나고 있는 점도 그렇다. 그러나 제목에서 보듯 참신한 착상과 네 수 한 편이 일정한 톤을 유지하며 주제 구현을 향한 강한 응집력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다른 응모작들을 뒤로 제쳐놓게 하였다. 특히 어머니의 버선으로 은유된 의 항해를 육화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풍랑을 맨손으로 돌리고 쳐내면서올올이 힘줄을 풀어 비바람을 묶어낸 날등과 같은 대목은 인생과 세계에 대한 개성적인 재해석과 리얼리티를 내장하고 있다.

 

아래는 박성민 시인의 평이다.

 

독특한 제목으로 독자의 시선을 끄는 작품이다. 거친 삶의 항해를 마감하고 비로소 문지방에 닿은 어머니의 버선 한 척에서 얼룩덜룩 번진 설움을 형상화하여 주제를 선명하게 이끌어 낸 점이 돋보인다. ‘다잡아 꿰맨 구멍자꾸만 비워 낸 속에서는 어머니의 희생이 느껴지며 올올이 힘줄을 풀어 비바람을 묶어낸 날에서는 가정을 지탱하기 위해서 강해져야만 했던 모성애가 드러난다. ‘꽃무늬 번 솔기 하나와 같은 표현도 버선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마지막 수에서 어머니의 주름살을 잔물결과 자연스럽게 병치하는 능숙함도 보여주면서 어머니의 버선을 바람 든 뼈로 묘사하여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는 다소의 미흡한 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한 흐름으로 주제를 구현하는 집중력과 기량 그리고 비범한 助辭 능력에서 신뢰가 가는 작품이다.

 

용접공의 데인 하루 창문가에 접어놓고

 

막 끓은 저녁 밥상 웃음소리 팽창할 때

 

그 아내 만삭의 몸도

 

둥실 뜨는 초저녁

-만월전문

 

불꽃과 더불어 사는 이가 용접공이다. 용접공이 데인 하루를 창문가에 밀쳐놓고 난 후 저녁밥상 앞에 웃음소리가 팽창하고 있다. 중장에서 팽창은 곧 종장 아내의 만삭의 몸과 접맥되는 것과 동시에 초저녁 둥실 뜨는 보름달로 전이되는 미적 전개 과정을 보여준다. 만월은 충만함이요 익음이다. 출산을 앞둔 신비로운 존재다. 현실의 삶은 지난하지만 이처럼 서민의 삶은 화평을 이룬다. 따뜻한 저녁 밥상, 웃음소리, 만삭, 보름달의 이미지들이 결집되어 평화로운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단시조만월의 의미는 이렇듯 웅숭깊다.

 

완창을 이루지 못한 툭툭 끊긴 소절들이

비바람 속 벌레 먹힌 관절마다 맺혀 있고

마지막 한 움큼 속말

뽑아 읊는 저물녘

-억새꽃 언덕중에서

 

억새꽃 언덕에서 완창을 생각한다. ‘완창을 이루지 못한 툭툭 끊긴 소절들이/비바람 속 벌레 먹힌 관절마다 맺혀 있고라는 대목이 명징한 이미지로 직조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인생길이 얼마나 험난하며 역경을 이기기 위해서는 상처가 뒤따를 수밖에 없음을 분명하게 일깨워준다. 세상에 왔으면 우리는 우리의 노래를 다 부르고 떠나야 한다. 완창에 이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면 한 맺힌 일이 될 것이다.

풀지 못한 세상일을 끌어안고 찾은 숲에
시름 한 점 떨군 자리 구절초는 활짝 피어

그렇지, 참 그렇겠다!

고개를 끄덕인다


덜 삭힌 가슴 한쪽 아려오는 하루 끝
발목을 토닥이며 술패랭이 손 내밀고

초록잎 향기를 담아

마중 나온 풀벌레

 

함부로 밟고 지나며 그 눈빛 읽지 못했다

별것이 아니었던 내 앞의 사소한 풍경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프고 또 어여쁘다

산다는 것은 그렇다, 평범하고 흔한 것들이
부끄러운 내 손잡아 먼 길을 가는 것
이 세상 흔들리는 길을

함께 가는 것이다

-오솔길을 걸으며전문

 

오솔길을 걸으며에는 비근한 생활 정경으로부터 깊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듯 삶의 철학을 자아올리고 있다. 구절초가 활짝 피어나서 그렇지, 참 그렇겠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렇고, ‘덜 삭힌 가슴 한쪽 아려오는 하루 끝에서 발목을 토닥이며 술패랭이가 손을 내밀고, ‘초록잎 향기를 담아/마중 나온 풀벌레의 모습이 또한 그러하다. 시의 화자는 고백한다. 그 눈빛들을 평소에는 읽지 못했노라고. ‘가만히 들여다보면/아프고 또 어여쁜그것들을. ‘평범하고 흔한 것들에는 우리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부끄러운 내 손 잡아 먼 길을 가는 것’, ‘이 세상 흔들리는 길을/함께 가는 것이라고 진술한다.

평범한 일상사에서 얻은 느낌을 다채롭게 육화한 점이 돋보인다.

 

두껍고 고요한 벽을

누가 자꾸 두드린다

반듯하게 드러누운 그 속은 한결같이

문 하나

보이지 않고

틈새 모두 감춘다

 

멀리 갔다 돌아오는

환한 길이 미끄럽다

쪼아 보다 닳은 부리 날개 휘청 감기는데

속내를

다 보여줄 듯

반짝반짝 웃는 물결

 

풀린 듯

조여 있는 그 속 한번 열고 싶다

지느러미 감춘 꼬리 곤두박여 찾는 동안

물렁한

그 벽은 다시

수평만을 재고 있다

-수면에 관한 단상전문

 

수면은 신비스럽다. 같은 물인데 아래로 가라앉은 물은 무엇이며, 물낯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물은 또 무엇인가. 이러한 현상은 물론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문학적인 사유로 볼 때 다양한 접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에 얼어붙을 때 수면의 물이 먼저 얼어붙게 마련이다. 그 때 물끼리 어떤 갈등이나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면은 틈새가 없다. 문이 보이지 않는다. 반듯하게 드러누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두껍고 고요한 벽을/누가 자꾸 두드리는 것일까. 둘째 수에서 물의 움직임이 보인다. 그런 까닭에 멀리 갔다 돌아오는/환한 길이 미끄럽다라는 수사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한 마리 새도 등장하여 역동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부리가 쪼는 일은 한계가 있다. 물은 속내를 다 보여주지 않고 반짝반짝 웃기만 한다. 그곳은 풀린 듯/조여 있는곳이어서 그 속을 열어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물렁한/그 벽은 다시/수평만을 재고 있다.

수면에 관한 단상은 시인이 얼마나 하나의 시적 사안을 두고 새로운 착상과 더불어 천착에 깊이 몰입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시편이다.

 

쌀 한 톨 슬그머니 문지방을 넘고 있다

이제 더는 공염불의 밥이 되기 싫었을까

당차게 튕겨져 나와 젖은 몸을 말린다

 

촘촘히 햇살 다져 잘 여문 속내 보이고

집어 든 손가락에 묻어나는 비바람 흔적

단단히 사리로 남긴 한 세월이 적요하다

-쌀 한 톨중에서

 

쌀 한 톨에서도 미세한 감각은 빛을 발한다. 눈여겨보지 않는 생명의 근원에 대한 따사로운 애정은 시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덕목이다. 문지방을 넘는 쌀 한 톨은 공염불의 밥이 되기 싫은 의지를 보인다. 그렇기에 당차게 튕겨져 나와 젖은 몸을 말리고 있는 것이다. ‘촘촘히 햇살 다져 잘 여문 속내를 보이고, ‘집어 든 손가락에 묻어나는 비바람 흔적과 함께 단단히 사리로 남긴 한 세월의 적요를 읽어내는 힘은 주목할 점이다.

시인은 전반적으로 긴 호흡의 시조를 즐겨 쓰는데, 이 작품도 모두 네 수로서 빈틈없는 축조 능력으로 주제를 원활하게 구현한다.

 

말 한 마디

내게로 떨어지는 순간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그 말은

내 안의 숲을 어지럽혀 놓았다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 한참을 헤매었다

가시 돋쳐 우거진 잡초들이 무성한 날

그 말이

평온한 풍경에 진눈깨비를 뿌렸다

 

벼랑을 붙들고 있는 풀꽃이며 잎사귀

아득한 사람의 일도 울창한 숲이다

이쯤에

내 안에 박힌

너를 가만 품기로 한다

-어떤 말전문

 

말이 들끓는 세상이다. 하루에도 무수한 말들이 생산되어 세상을 휘젓는다. 우리는 그 말에 휘둘려서 때로 우리의 뜻을 펴지 못하고 좌절과 절망을 맛보기도 한다. 내게로 떨어진 말 한 마디로 말미암아 회오리바람이 들이치고 평온을 깨뜨린다. 대책 없이 진눈깨비를 뿌린다. 셋째 수에서 벼랑을 붙들고 있는 풀꽃이며 잎사귀/아득한 사람의 일도 울창한 숲임을 깨달은 시의 화자는 이쯤에/내 안에 박힌/너를 가만 품기로 작정한다. 어떤 말을 내치기보다는 안으로 품고 있으면서 자신의 근원적인 삶의 기조를 견지하는 하나의 버팀목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역설의 미학이다.

 

강물에 제 그림자 씻고 있는 푸른 코트

어쩌면 이 시대의 쓸쓸한 로맨티스트

, 한 번 그대 곁에서

살아봤으면 싶었네

 

바람 들자 팔을 드는 수천 개의 캐스터네츠

팔랑팔랑, 딸랑딸랑 배꼽을 내놓고 웃네

세속의 먼지 다 씻은

맑고 얇은 손바닥

 

반듯한 한줄기 순정

반짝이는 이마 곁에

떼쓰며 토라지며 마음 놓고 뒤척이며

한 잎의 천진한 얼굴로 살아가고 싶었네

-미루나무 수사학전문

 

미루나무 수사학은 재미있게 읽힌다. 미루나무는 멋쟁이 나무다. 그 훤칠한 키가 멋진 한 사내를 떠올릴 법도 하다. 쓸쓸한 로맨티스트를 향한 연모의 정이 자연스럽다. 그대 곁에서 한번 살아 보았으면 하는 심경에 수긍이 간다. 그리고 수천 개의 캐스터네츠의 떨림과 울림은 장쾌하기까지 하다. ‘세속의 먼지 다 씻은/맑고 얇은 손바닥이라는 표현은 순수한 이미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셋째 수 반듯한 한 줄기 순정/반짝이는 이마 곁에/떼쓰며 토라지며 마음 놓고 뒤척이며/한 잎의 천진한 얼굴로 살아가고 싶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1

마침내 당도했네, 정갈한 도마 위에

어릿광대 놀음으로 거친 풍랑 줄을 타다

멱찬 속 비워낼 순간 도리 없이 기다리네

 

난바다 깊은 수렁 비린내만 채웠던가

더께 앉은 물때마저 온몸에 물큰거리고

앙다문 아가미 속에 부풀다 만 은빛 부레

 

2

비워 낸 가슴팍에 소금꽃을 받아 안네

젖은 생각 말린 뒤엔 가볍게 잠이 들까

내 삶이 고소해지는 저녁 식탁 그리네

-나를 염하는 시간전문

 

순명의 시간을 본다. 자신의 종언을 어떤 자세로 맞을 것인지에 대한 미리 써둔 유언장과 같은 느낌이다. 끝 즉 정갈한 도마 위에 당도하게 된 것을 마침내라고 말할 수 있는 여유가 놀랍다. 기다렸다는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거친 풍랑의 줄을 타던 어릿광대 놀음을 끝내고 멱찬 속 비워낼 순간을 맞은 것이다. 난바다의 깊은 수렁을 거쳐 오는 동안 겪은 고초의 순간과 희열의 때를 떠올리는 한 마리의 물고기, 그는 곧 시의 화자다. 빈 가슴팍에 소금꽃을 받아 안고 가볍게 잠들 날을 기다리고 있기에 죽음은 향기롭고도 고결하다. 내가 죽어 삶이 고소해지는 저녁 식탁을 차릴 수 있기에 그렇다.

자신을 염함으로써 이렇듯 순명의 순간을 평온히 맞게 되었을 것이다.

 

3

지금까지 백점례 시인의 시조 세계를 살펴보았다. 텍스트로 다루지 못했지만 많은 작품들이 시조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문제작으로 읽힌다. 시인의 시선은 다각도로 열려 있고, 육화 과정에서 자신만의 어조와 새로운 표현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일정한 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형상능력은 타고난 바도 있겠지만, 긴 세월 동안 각고의 공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인이 이만한 함량을 내장한 창의적 세계를 창출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창창한 장도의 길에 빛 부신 하늘의 은총이 어찌 함께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대성하여 시조문학사의 중요한 몇 페이지를 차지하게 되기를 빈다. 괄목상대의 첫 시집버선 한 척, 문지방에 닿다의 상재를 거듭 축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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