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연 ‘북한 체제 형성’ 심포
해방뒤 급진 계급체제 형성
소비조합 활동도 소멸시켜

엄혹한 전쟁과 냉전을 거친 남북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과제다. 특히 남한 쪽에서는 남한이 제대로 이뤄내지 못한 북한의 토지개혁이나 기존 특권층 척결, 착취구조 개선 등의 성과와 이에 대한 당위성에 더 주목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체제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여전히 객관적으로 밝혀야 할 대목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역사연구회는 지난달 30일 ‘북한의 체제형성-식민지 유산의 연속인가, 단절인가?’라는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한국역사연구회 산하 북한사연구반 학자들은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북한의 체제 형성기를 살핀 공동연구 성과물들을 내놓았다.

고려대 박사과정에 있는 김재웅씨는 북한이 일제 식민지 시기의 착취구조를 성공적으로 청산했던 ‘인민국가’의 기치를 내리고 50년대 이후 급진적인 계급투쟁을 벌이는 체제로 돌입하게 된 과정을 살폈다. 기본적으로 그는 해방 뒤 38선 이북지역에서는 식민지 시기 부를 축적한 지주층에 대한 계급투쟁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포괄적인 계층들을 망라한 ‘인민국가’ 건설운동이 더 주류를 이뤘다고 봤다.

1930년대 민족투쟁과 계급투쟁의 결합을 통해 나치와 파시즘에 대항했던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는 이런 흐름에 세계사적, 보편적 성격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북조선인민회의(1947년)나 조선최고인민회의(1948년)의 대의원 인적 구성에서 소부르주아 계급에 속하는 기업가·상인·성직자층이 10%에 육박하거나, 헌법에서 군사기구 내부에 당 조직을 만들 수 없도록 한 것 등은 이런 인민국가의 성격을 잘 드러내어주는 사례라고 한다.

그러나 당시 소련과 동유럽권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을 강하게 비판하며 계급 사이의 화해를 부정하는 급진적 계급투쟁 노선이 제기됐고, 이것은 북로당을 통해 북한 사회에 이식되면서 인민국가 건설을 가로막는 흐름이 됐다. 이 흐름은 북한이 해방 직후부터 벌였던 전체 인민에 대한 ‘성분’ 분류 작업과 맞물려, 노동자·빈농 출신이 사회 최상층에 자리하고 불리한 계급성분을 지닌 이들을 차별하는 새로운 계급질서를 만들어냈다는 것.

고려대 박사과정 이주호씨는 해방 직후 1945년 말부터 북한에서 일어났던 협동조합의 원리를 이용한 ‘소비조합’의 활동에 주목했다. 당시 식량·물자의 부족에 당면했던 북한에서 소비조합의 전국적 조직은 자유시장 원리를 따르지 않으면서도 조선총독부가 펼쳤던 직접적인 통제경제 체제를 물려받지도 않는, 현실적인 의미를 가진 대안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사회주의로의 본격적인 이행은 사실상 민간 상인들의 활동을 모두 없애고 상업을 국가가 전유하게 되는 흐름으로 나아갔다고 한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밖에도 해방 뒤 북한 공군 창설에 일본군 출신들이 참여한 과정, 한국전쟁 당시 아무런 군수 자원이 없었던 북한이 소련과 중국, 특히 중국으로부터 어떤 지원을 받았는지 등 북한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는 내용들이 함께 발표됐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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