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은 에피쿠로스처럼 - 탐식이 괴로운 이들을 위한 음식 철학
안광복 지음 / 북트리거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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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에게 불편하다. 아, 찔린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이럴까봐 읽을까 말까 그렇게 고민했었나보다.

(간접화법으로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어쨌든) 마트에서 돼지고기 햄을 사는 내가 사냥꾼보다 잔혹한 자일 수 있다고? 내 식탐을 짐승의 그것에 비유하는 것일까? 내가 필수적이지 않은 욕망에 휘둘린다는 뜻인가?

나 먹는거야 그렇다치고, 나는 가족의 식탁을 맡고 있는 총 책임자인데...! 죄책감이 몰려오면서 동시에 반발심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자꾸 저자의 말에 반박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의 말에 백퍼센트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파고들어가보면 틀린 말도 별로 없다는게 문제다. 먹고 사는 일이 보통 일이던가? 중요한만큼 그 스트레스가 더 컸다. 애써 외면하고 싶던 것에 마주했다.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쓰다. 이 책이 그러하다.

저자는 식탐을 다스리고 몸매를 관리하며 성격을 다독이는 일이 너무나 절박하기에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나 역시 비슷한 고뇌에 시달려왔기에, 듣기 좋은 위로를 바라고 책을 집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남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나를 반성하고 성찰하는 것은 늘 버겁고 힘겹다. 사실, 내 식습관에 고쳐야 할 점이 많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식탁을 드러내고, 책을 통해서 비춰보기는 싫었던 것이다. 오랜 습관을 바꿔야 한다니... 아, 모르는 척 하고 싶다.

<항변>

다음은 나의 항변이다.

첫째, 내 입맛에는 기름진 단짠이 여전히 맛있다.

둘째,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혼밥이 즐겁다.

셋째, 간편식이 편하다.

넷째, 고기는 포기못한다.

자연에는 단짠이 없다며 자연 그대로의 맛을 즐기라고 말한다. 공장에서 찍어낸 맛은 대부분 가짜이며, 몸은 진짜이기에 인스턴트 음식을 멀리하라고 권한다. 즉석조리제품이나 완제품을 피하는 것은 주부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고 힘든 일이다. 공장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음식을 하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다 해야하는데, 식구들의 삼시세끼를 책임지는 입장에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가족이 단체로 '영양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양념을 최소화하고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한 방법을 연구해봐야겠다. '진짜 음식'을 향해.

좋아하는 음식들을 모아봤다. 오랜 친구인 소울푸드 떡볶이, 최근 폭풍흡입하며 입문한 칼국수, 냉면, 김말이 튀김, 크로와상, 크림치즈베이글... 여러가지 모양으로 변신해 있었으나, 주재료는 대부분 '밀가루와 지방, 설탕과 소금'이었다. 인스턴트 먹거리와 주재료가 겹친다. 저자는 이런 음식들을 풍족하게 먹을수록 되레 마음이 헛헛해진다고 한다. 글쎄... 나는 아직 헛헛한 마음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건강에 좋지 않은건 확실하니, 음식의 화려한 겉모습만 보지 말고 매의 눈으로 주성분을 스캔을 해봐야겠다. 골고루 다양하게 먹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주재료가 결국 다 비슷한건 아니었는지. 본질을 생각하면서 먹을 필요가 있겠다.

<고기>

부모님께서 시골에서 흑염소를 키우신 적이 있다. 그 흑염소는 흑염소 진액이 되었다. 흑염소를 잡던 날 식탁에는 흑염소 수육이 자리했는데, 특히 여자 몸에 좋다는 거듭된 권유에도 잘 먹지 못했다. 흑염소의 눈빛도 떠오르고 불쌍하고... 그래놓고, 배달로 시킨 치킨은 어찌나 냠냠쩝쩝 맛있게 잘 먹는지.... 내가 봐도 스스로가 참 이중적이며 모순덩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가 생각났다. 그 영화를 본 후 한동안 햄이나 소시지에 손이 잘 안갔다. 그 이후로 고기를 볼 때, 의식적으로 그 고기의 탄생, 성장, 죽음을 회피하려고 한다. 그냥 마트 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제품 이상으로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데, 저자는 고기를 먹으면서 마트 진열대에 놓인 상품으로서가 아니라 이것이 살아있는 생명이었을 때를 생각하라고 한다.

"고기의 싼 가격에는 동물의 엄청난 고통이 담겨 있다. _p.075"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다른 생명들에게 신세 지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_p.077"

"달고 기름진 음식에 정신이 홀린다면, 이 음식이 생명이었을 때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_p.079"

"훌륭한 미식가는 눈앞의 요리에서 역사와 이야기를 읽는다. 이 요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을까? 좁은 우리에서 더럽게 살다가 잔인하게 살해당한 가축의 고기로 만들어졌다고? 이런 생각이 든다면 고소한 육즙이 흥건한 피로 다가올 테다. _p.170"

마트에 가면 동물복지 인증 시설에서 키워진 계란이나 고기가 진열되어 있다. 문제는 가격이다. 가격을 생각하면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다. 동물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다. 비위생적이고 윤리적이지 못한 폭력적인 사육환경에서 자라는 동물이 불쌍하다고, 마음이 아프다고 해봤자 소용없다. 당장 내 주머니를 열여서 가성비 떨어지는 동물복지 인증 고기를 사는 것이 그 동물들을 위하는 길이다.

적은 비용으로 많이 고기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식 가축 사육을 무작정 비난할 수는 없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소비자들이 값비싼 복지인증 고기는 찾지 않는다는 것이 먼저 아닐까? 공장식 가축 사육 덕분에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고기를, 상류층이 아닌 평범한 나도 이렇게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귀족들이 먹고 남긴 고기 부산물이나 국물만 먹고 있을 지도 모른다. 저렴해진 고기값으로 절대 빈곤에서 벗어서 영양상태가 개선되기도 했다.

다시 돌아오자. 아무리 이런 저런 변명을 해 보아도, 인간의 욕심은, 탐심은 과했다. 필요 이상의 것들을 생산하고, 버리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기를 좋아하는 나는 아무래도 이효리님처럼 채식주의자는 되지 못할 것 같다. 주머니가 가벼운 나는 복지인증 고기만 고집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인식은 하면서 살려고 한다. 절제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어야겠다. 가끔은 고기 대신 대체육을 넣어 빚은 만두를 사먹어야 겠다.

<벌레 먹은 사과 주세요>

부모님께서 작은 농사를 지으시는데, 마트에서 보던 야채와 과일의 모양과는 큰 차이가 난다. 정말이다. 모양도 제각각이고, 크기가 작다. 과일을 깍다 보면 벌레가 기어나온다. 이런 제품을 마트 매대에 올려놨다가는 환불감이다. 그런데, 저자는 벌레먹은 과일이 더 아름답다고 한다. 소비자들이 '벌레먹은 사과'를 요구한다면 농민들은 더이상 살충제를 뿌리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먹거리를 살 때마다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환경이 지금보다 바람직한 모습으로 바뀔 것이라고 말한다. 깨끗하고 흠집 없는 예쁜 과일을 인위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시각 또한 장착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자연 그대로라면 과연 저렇게 깨끗하고 흠집 없는 과실들이 넘쳐 날 수 있을까? 대부분은 벌레 먹고 쉽게 썩어서 곳곳이 문드러져 있을 테다. 완벽한 과일의 모습은 많은 농약과 비닐하우스 같은 인공적인 환경을 만드는 데 엄청난 에너지를 써서 얻은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깨끗하고 큼지막한 과일을 좋아할수록 농약 사용량도 점점 늘어난다. 아울러 과실의 맛을 끌어올리는 최적의 환경을 만드느라 에너지 소비도 덩달아 많아진다. _p.071"

<배려를 담은 입맛>

이 책에서 가장 달가웠던 파트는 '생각이 담긴 식탁 - 명성황후가 사랑한 약고추장' 에피소드이다. 명성왕후는 입맛이 없을 때면 친정에서 약고추장을 가져다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약고추장을 만드는 과정이 고약하다. 약한 화롯불에 고추장, 꿀, 다진 쇠고기를 올려놓고 '하루 종일' 매달려 천천지 잘 저어야 한다고 한다. "때로는 먹고 싶어도 요리하는 이의 고생이 너무 크다면 욕구를 내려놓을 줄도 알아햐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주부로서 매우 동감하는 바이다.

"신분제를 당연하게 여겼던 과거에는 품이 많이 드는 전통음식 속에 차별이 숨겨져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먹는 자들이 만드는 사람의 수고를 헤어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민주화된 사회에서는 그래서는 안된다. 먹는 자들은 언제나 만드는 사람의 고생과 노력을 떠올리며 감사해야 한다. 훌륭한 미식가는 입맛에도 배려를 담을 줄 안다. _p.051"

다짐한다. 입맛이 사회에 세상에 대한 태도를 담길. 끼니마다 내 삶과 세상을 더 아름다고 바람직하게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길. 철학하듯 음식을 먹길. 습관따라 먹던 대로 먹지 말고 내 식습관이 올바른지 따지면서 묻으면서 먹길. 지금의 다짐이 며칠이나 갈지 모르겠지만, 한번씩 내 식탐에 브레이크가 필요할때, 에피쿠로스의 식탁을 떠올리며 다시 이 책을 펼쳐볼 것 같다.

"내가 먹는 것이 곧 나다. -장 브리야사바랭"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에 숱한 아프리카 사람의 노예노동이 담겨 있다면? 향긋한 커피 잔을 옆으로 밀쳐 낼지도 모른다. _p.170"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증정 받아 솔직한 리뷰를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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