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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문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3
요 네스뵈 지음, 남명성 옮김 / 비채 / 2025년 10월
평점 :
해리 홀레 시리즈 열세 번째 이야기 <블러드문>
- 팬심으로 가득찬 후기이니 참고하시길^^

잘 지내셨수 해리? 엄청 기다렸수다.
한 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 꼭꼭 씹어 읽었습니다. 이 책이 출간되는 날을 간절하게 기다렸는데, 한 문장 한 문장 꼼꼼하게 즐기고 싶었습니다. 6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책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방 끝이 나버리네요. 아... 또 언제까지 다음 이야기를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요 작가님.
우리말로 옮긴 분이 바뀌어서 읽기 전에 전 이야기들과 이질감이 들지 않을까 걱정을 살짝 했는데 기우였습니다. 아마도 번역가님이 '해리 홀레 시리즈'를 즐기시던 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칼> 이후에 소설 속 그가 얼마나 걱정 됐는지 모릅니다. 살아 나갈 수 있는 것인지.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은 아닌지. 일상을 즐기는 즐거움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이 시리즈가 끝나버리는 것은 아닌지. 만약 그랬다면 내 일부가 뜯겨 나가는 기분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어섰습니다. <칼>이 '해리'의 모든 것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이야기였다면, <블러드문>은 찢긴 인생이 어쩌면 다시 꿰매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열세 편의 이야기가 흐른 세월 동안 그는 늙었습니다. 단순히 나이를 먹어가는 건 별로 중요치 않았죠. 그는 첫사랑을 잃었고, 손가락이 잘렸고, 얼굴이 찢겨 나갔고, 아들이나 다름 없는 '올레그'에게 총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아끼는 동료를 잃고, 세상 가장 사랑했던 아내까지 잃었습니다.
이 정도로 주인공을 벼랑 끝으로 몰아 괴롭혀도 되는 거냐며 독자들은 작가에게 원망 아닌 원망을 하기도 하지만 작가 '요 네스뵈' 형님은 사람의 인생은 그렇게 마모 되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괴롭힐 것임을 암시해 주었죠. '해리'가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미를 위해 조금만 더 괴롭힘 당했으면 하는 속물 같은 생각을 혼자 해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는 여전히 마음이 아프지만 다시 일어설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
팬심이 가득 담긴 긍정적인 말만 하려고 합니다. 진짜 재밌기도 하고요. 범죄스릴러 소설의 재미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이야기니까요.
찐 복선과 맥거핀의 조화가 기가 막힙니다. 그리고 작가 특유의 교차 반전은 알아도 속고, 아는 체하다 혼구녕이 나고, 이제 다 맞았다 싶을때 더 세게 뒤통수를 맞습니다.
좀 더 노골적인 팬심으로 이야기하면 올해 읽은 책 중에 이만큼 전율을 느낀 이야기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나도 모르게 '해리'와 동화 돼버리고 다 읽은 후에도 손이 떨리고 두피가 지릿지릿하고 심장이 요동칩니다. 진짜 이 맛에 기다렸나봅니다.
시리즈를 다 읽지 않은 사람도 하드보일드,누아르 등 범죄스릴러 장르를 좋아한다면 스탠드얼론이라 생각하고 즐기기에도 충분합니다.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범죄스릴러 소설입니다. 그러나 주인공 '해리'의 현재 상태를 조금 알면 훨씬 더 즐길 수 있기에 개인적으로는 전 이야기 <칼>은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스포를 하지 않고 소개를 하고 싶기 때문에 내용은 이야기 하고 싶진 않지만 한 사람의 이야기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S'라고 해야겠네요. 시리즈를 오랜 시간 함께 해오면서 정말 많은 매력적인 인물들이 등장했습니다. 반면 안타깝게 많은 인물들을 떠나보내기도 했죠. 이번 이야기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시리즈 초반부터 '해리'의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해주었던 한 인물을 또 보냅니다. 오랜 시간 기억에 남을 강렬한 퇴장이었습니다. 소설 속 인물이지만 'S' 박사의 명복을 빕니다.
떠난 사람들도 있지만 앞으로도 함께 할 사람들도 있죠. '라켈' 사건 이후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해리' 곁에는 여전히 든든한 동료들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주연 급으로 함께 한 '카트리네 브라트', <칼>부터 함께한 한국계 입양인 '성민 라르센', '해리'와의 미묘한 관계가 기대감을 갖게 하는 '알렉산드라 스투르자' 등의 앞으로 활약이 기대됩니다.
다 읽은 후에도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습니다. 물론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가장 좋아하는 시리즈이기 때문인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또 소설을 즐기는 사람의 깨알 재미이지 않을까 합니다.
많은 명장면, 명대사가 있었지만 이 장면이 계속 맴돕니다. '무엇, 혹은 누군가가 없는 것보다는 있으면서 상처 받는 것이 낫다.'
황홀한 독서였습니다.

-뭉클했던 문장들-
"잔뜩 마시고 잔뜩 망가졌다. 그리고 잔뜩 사랑했던 것 같았다."
"죽음의 순간이 지난 때부터 매일 죽지 않겠다는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채운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어떤 사람들은 벼랑 끝에 끌리나 봐.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살아 있는 느낌이 강렬해져서라는군."
"사람은 혼자이면서 외롭지 않을 수 있고, 혼자가 아니면서도 외로울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외로웠다. 그리고 혼자였다."
"뭔가 빼앗긴 다음 복수하는 기분이 너무 좋아서 가끔은 뭔가, 사랑하는 뭔가를 잃고 싶어진다니까. 그래야 복수할 수 있으니까."
"우린 뭔가를 위해 살아야 하잖아요. 그렇게 대답했어요. 그리고 가끔은 뭔가를 위해 죽어야 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