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월일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농촌의 인구들이 도시로 떠나가는 시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발전하는 세계의 도시화는 많은 문학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가장 가까운 나라 중 하나인 중국 또한 마찬가지. 놀라우리만큼 거대하게 성장하는 나라 속에서 책의 배경 또한 점차 도시로 바뀌게 마련이다. 이런 상황에서 옌롄커의 소설은, 허난성 충현의 험준한 농토, 자신의 고향인 바러우산맥을 벗어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농촌 소설을 많이 접해보지도, 더군다나 중국 소설은 거의 접해본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모르는 이국 타지의 배경이 이질적이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작가는 어떠한 인간의 기본적인 근본을 울리는 이야기를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장소와 기억을 가지고 전 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게 풀어나간다. 이 소설집의 대표작이자 제목이기도한 연월일은 노인과 눈먼 개, 옥수수 줄기만으로 긴 이야기를 흡입력 있게 풀어나간다.

 

황혼 무렵 산과 들판은 온통 걸쭉한 피로 물들었다. 셴 할아버지는 그 걸쭉한 피 속에서 몸이 익어가면서 무성하게 푸른 옥수수 열매를 만져보았다. 부드러운 감촉에 할아버지는 마음에 일말의 한기를 느꼈다. 언제쯤에야 완전히 익을까? 지금의 성장 속도로 보면 적어도 20일이나 한 달은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 p.125

 

 소설의 공간은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 아래, 모두가 떠난 마을과 밭이다. 유례없던 폭염에 모든 사람들이 살던 곳을 버리고 떠난 인기척이라고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서, 셴 할아버지는 눈먼 개를 배우자로 삼고 함께 옥수수를 한 줄기를 키워나간다. 그가 옥수수에게 쏟는 애정은 무한하다. 온갖 집념과 사명이 옹골차게 들어앉은 옥수수인 것이다. 조금만 시들시들해도 어쩔 줄 몰라 세심히 관찰하며 옥수수를 위해 뭐든지 한다. 야생동물과의 대치도, 물을 얻기 위해 몇 시간을 걷는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칭 식물킬러인 나는, 옥수수를 키워본 적은 없지만 집안에 들여온 작은 화분 속 새싹조차도 번번이 죽이기 일쑤였다. 그의 옥수수와 달리 나의 새싹은 충분한 물과 적당한 햇빛을 항상 받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힘이 없고 금세 죽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키우고자 하는 열망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셴 할아버지처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서가 아닐까? 나에게 새싹은 그저 잘 크면 좋고 못 크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키워서 결실을 맺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기에 그렇게 번번이 죽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에 반해 셴 할아버지의 목표는 바로 옥수수를 완벽히 길러내는 것이다. 그건 그의 삶의 최종 목표이기도 하다. 오로지 옥수수만을 위해 사는 삶. 감히 그 삶에 가치를 매길 수 있을까?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영화는 화려한 영상미로 인기가 많은 영화이다. 옌롄커의 연월일을 읽으면서 이 영화가 무척 많이 생각났다.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은 동물들과 함께 조난당해 망망대해를 떠도는 인물이다. 그가 생각난 이유는 이 소설의 셴 할아버지 또한 끝이 없는 가뭄 속, 살아남기 위한 여정을 수행중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점은, 할아버지에겐 살아남는 것보다 더 큰 목표가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죽음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가 목표를 이뤄나가는 과정을 옌롄커는 특유의 문체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는 눈으로 보는 영화만큼이나 표현력이 좋아 낮과 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햇빛과 성장하는 옥수수의 모습을 생생히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앞서 시간의 흐름이라 말하였는데, 이 소설집은 연월일외에도 주로 이 흐름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된다. 시간의 흐름이 계절의 변화로 표현될 수도 있고 회상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주로 인물의 삶을 길게 드러내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고 참신한 소재를 사용해 흥미롭게 느껴진다. ‘골수천궁도는 유령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 깊었다. 공포감을 심어주는 귀신이 아닌 분명 인간이었을 혼령들의 이야기는 다시 무에서 유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순환성을 내포한다. ‘골수에 등장하는 자식들도 똑같은 방법으로 살아갈 것이며 천궁도의 주인공도 돌아간다면 또 여전한 삶을 살고 다시 혼령으로 되돌아 올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죽음과 탄생이 계속 반복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무한하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이런 인간 생명의 순환을 중심에 두었으며, 그것은 이 연월일이라는 소설집에 4개의 이야기로 들어가 있다.

 

 소설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몫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생소한 농촌의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소설을 갈구하던 나의 몫과, 어떻게 보면 다 연결되는 큰 하나의 주제로 풀어내는 작가의 거대한 기획력과 섬세한 표현력이 한 몫을 했다고 본다. 어딘가 깊숙이 빠져들고 싶은 가을, 단풍만큼이나 불타는 이 소설에 빠져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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