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도 책이 될까요? - 글을 쓸 때 궁금한 것
이해사 지음 / 모아북스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해사 작가님의 <내 글도 책이 될까요?>는 글 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실용서이다. 매뉴얼 같은 느낌의 책. 솔직하고 가감없는 내용으로 가득해서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특히 와닿았던 부분은 295면의 '불과 몇 달 전에 쓴 글을 읽어보면 얼굴이 화끈거린다.'는 대목이었다. 나는 글을 정말 쓰고 싶지만, 내가 쓴 글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 인용한 부분과 같은 이유이다. 글을 쓰고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잠시인데, 몇달 뒤에 다시 들춰보면 그시절 싸이월드를 들춰낸 기분이 든다. '흑역사'처럼 느껴져서 그런 기록을 일체 남기고 싶지 않다. 글을 쓰고 싶다면서 기록을 남기기 싫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다.

사실 서평단을 신청한 이유도(아, 이 책은 서평단 활동을 위해 제공받은 책입니다) 서평을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어야 뭐라도 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쓴 적은 양의 서평들도 같은 이유에서 작성했다. 나에게 의무감 혹은 책임감을 심어주기 위해 서평단이라는 이벤트를 이용한 셈인데, 의도야 어떻든 결과가 나쁘지는 않다. 그리고 그 점을 책에서 집어주었다. 써놓은 글을 읽으면 얼굴이 화끈거릴 수야 있겠지만, 그 기록만큼 글쓰기 역시 점차 좋아지기 마련이니 우선 써 보라,고 저자는 권한다.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아무것도 써놓지 않고 어떻게 할지 머리만 굴리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않을까.

그러나 이 책은 앞서 언급했듯 매뉴얼이다. 어떤 자세로, 어떤 동기를 가지고 책을 쓰면 좋을지에 대해서는 친절하게 설명하지만 이 책을 읽고 결국 글을 쓰는 건 독자의 몫이다. 그러니까, 건설로 치자면 어떤 자세로 작업을 해야 허리에 통증이 덜 올 수 있는지 경험자로서 친절하게 알려주기야 하지만 설계도면은 스스로 짜야 한다는 얘기이다. 당연하게도.

마지막 7장 중간 부분즈음에 적힌 출간계약서 이야기의 여운이 길다. 꿈꾸듯 글을 쓰는 나를 상상하다가 엄혹한 현실로 훅 끌려온 기분, 물론 내 원고가 채택돼야 겪을 수 있을 현실이므로 그것 역시 꿈이지만 말이다. 구성도 설명도 좋았다. 이렇게 좋은 점만 나열하면 오히려 인상에 덜 박힐텐데, 하는 걱정이 생기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밤 9시까지 운동하고 피곤한 상태로 펼쳤는데도 한 호흡에 읽어내버릴 정도로 좋은 책이었다.

다만, 글쓰기 책을 읽어놓고 이렇게 짧고 별 내용 없는 글을 쓰자니 자괴감이 살살 밀려온다. 내 인생 화이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최시현 지음 / 창비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언니와 이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돈 많은 부인들, 같이 모여서 정보 공유하고 땅 사뒀다가 자식들한테 값 오른 땅 물려주는 거 보면 참 부럽다."

  '복부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보통 복부인이라는 단어에서 오는 어감은 이기적이고 부정한 여성, 이라는 이미지였는데 이렇게 들으니 또 왠지 선망의 대상 같기도 했다. 그러던 중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최시현, 창비)'라는 책을 읽을 서평단을 모집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접했고 그대로 신청했는데 붙었다.

  책에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정 내 여성상 즉, 이상적인 집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제시되어왔는지 소개한다. 사회에 의해 호명된 여성들은 각 분야에서 활약 중이다. 자본의 성장을 임금이 뒤따라가지 못하자, 즉 가부장이 홀로 가정을 부양할 수 없게 되자 여성은 임금노동자가 되어 소위 '맞벌이'라 불리는 경제활동을 시작한다. 하지만 여성의 경제활동은 '가정을 위해 다른 과업이 생긴다면 그만 둘 수 있는 일'이지 어떤 사람의 독자적 인생 혹은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자녀를 가진 여성들은 가정 내에서는 맞벌이를 통해 미래의 기둥을 세우는 데에 일조해야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흘김을 받는다.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말이 유독 여성에게 향하는, 그리고 여성도 밥벌이를 해야 기능 있는 가족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현실은 다소 충돌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가정영역과 사회영역에서 여성이 받는 이중잣대는 이런 것이다. 이 충돌이 근로하는 여성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새로웠던 부분이다.

  온전히 집에서 머물면서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여성에게도 이 이중잣대는 유효하다. 이번에는 '근로' 때문에 가정에 소홀하다는 이유와는 전혀 관계없다. 다만 '부동산' 문제이다. 부동산 시장에 뛰어드는 여성은 어디서 생겨났을까. 부동산 시장에서 여성들이 이룰 수 있던 것은 무엇이고, 그 여성들은 어떤 관점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며 또 다른 관점에서는 부정한 여성이 되는가.

  이 책은 앞 문단에 적어놓은 질문에 대한 최시현 교수의 대답이다. 여러 여성들의 주거생애사를 인터뷰하여 그를 인용하는 방식으로 분석 내용을 전개해간다. 개인적으로 가장 와닿았던 부분은 'house가 home이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실물로써의 부동산이 아닌 집을 집 답게 만드는 노동을 전담하는 여성의 역할에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심채경 작가님의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다시 한번 읽어볼 작정이다. 읽으면서 중간중간 떠오르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를 읽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무거운 얘기를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책이고, 꼭 생각해봐야 할 문제에 대해 다룬 책이다.

* 본 도서는 창비 서평단 활동으로 제공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북클럽문학동네의 가제본서평단 이벤트를 통해 먼저 읽어보게 된 책이다. 주인공이 여성 기자라는 점,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기에 적합한 직업이면서 그만큼 다양한 목소리에 갇히거나 편견에 부딪히기 십상인 직업이라는 점이 좋았다. 덕분에 여러가지 소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

  "나는 '언젠가', 시간을 듬뿍 들여서 칠면조구이를 할 거예요. 나의 즐거움을 위해."

  리카는 이제 공격을 그만 하기로 했다.

  "난, 당신이 특별히 가엾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친구가 없는 건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니에요. 생각해봤어요. 내가 만약 칠면조를 굽는다면 열 명이나 사람을 모을 수 있을까 하고. 교제 폭이 좁고, 무엇보다 지금 내가 사는 맨션에는 그렇게 큰 오븐이 없고, 열 명씩 들어갈 만큼 넓지도 않아요. 의자도 그릇도 부족해요. 봐요, 나도 못하잖아요. 간단히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예요. 그러나 내가 넓은 집을 얻게 된다면, 사람을 모을 수 있다면, 해볼지도 모르겠어요. 그때, 만약 당신의 혐의가 벗겨져 석방된다면."

  잠시 머뭇거렸지만, 리카는 과감하게 말하기로 했다. 야마무라씨가 소개해준 그 공원 앞의 집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의 칠면조구이를 먹으러 와주세요. 꼭." (513-514면)

-

-

  그렇지만 분명……. 몇 킬로그램을 빼도 합격점은 아마 나오지 않으리란 것을 리카는 이제 알고 있다. 아무리 아름다워져도, 회사에서 지위를 손에 넣어도, 가령 앞으로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더라도 이 사회는 여성에게 그리 쉽게 합격점을 주지 않는다. 지금 이러는 동안에도 기준은 계속 올라가고 평가는 점점 엄격해진다. 이런 무의미한 심판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아무리 두렵고 불안해도, 누가 비웃지 않는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도,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다. (552면)

-

  

  지코의 노래 '사람' 가사 중에 "We always say 나중에, 그 나중에를 위해 건너뛴 생일을 빼면 여태 난 십대"라는 가사가 있다. 리카와 가지이의 가장 큰 차이는 '언젠가'에 대한 태도이지 않았을까. 리카는 '나중에', '언젠가'의 인정을 위해 자신의 호오에 대해 파악하려 들지 않고 계속 관리하고 또 관리하는 삶을 살았다. 가지이는 '언젠가'를 믿지 않았기에, 불가능해보이는 눈앞의 사건에 좌절하고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미리 벽을 치는 삶을 살았다.

  가지이와 리카가 교류하게 되면서 서로를 바꾸게 된 것도 바로 이 지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리카는 '언젠가'에 집착해 본인을 옥죄던 습관과 문제 해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저 자신의 주변사람의 피난처를 마련하기로 다짐한다. 가지이의 시점은 나와있지 않아 모르겠으나 리카가 선물한 '언젠가'라는 단어가 가지이의 마음을 어느정도간 울리지 않았을까 싶다.


-

  아무리 그래도 체중이 늘어났을 때 주위의 동요는 참으로 이상했다. 리카가 민폐를 끼친 것도 아닌데, 모두 비난하는 것 같고 어딘가 무서워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런 반응을 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 조심해야지, 하고 새삼 다짐한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 됐다. 레이코의 말대로 시행착오를 겪고, 다양한 맛을 알아야 그 사람의 기준을 확립할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158면)

-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았던 대목이다. 오늘 이 서평을 쓰기 위해 온 카페에서도 '살쪘죠, 분명 처음에 봤을 때는 몸이 이렇게 퉁퉁하지는 않았던 것 같애'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카페 사장님의 말에 심장이 살짝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카페를 같이 온 친구에게 주변 사람들이 살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고백한지 이틀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런 식으로 확인시켜 줄 마음은 없었는데, 아무튼 이 대목을 읽고 나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는 한번쯤 실패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살이 붙는 게 대단한 실패인가요, 물어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나라에서 여성에게는 살이 붙는 건 실패가 맞는 것 같다. 코로나 이후, 허리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15키로 남짓 살이 붙은 내가, 지난 1년간 겪어 본 결과 그렇다. 아무래도, 아무렇지 않지 않다. 다들 한번쯤 가벼운 실패를 겪고 스스로를 얼마간 되돌아볼 수 있기를, 저주처럼 들리는 소원을 잠시 빌어본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른 여자들
다이애나 클라크 지음, 변용란 옮김 / 창비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정말 놀랍다. 이게 처음 쓴 소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느껴질 수 있지만, 내가 서술할 수 있는 가장 진심의 표현으로 작성한 문장이다. 만일 나에게도 미각이 연결된 쌍둥이가 있었다면, 이 책을 읽는 내내 그 미각을 통해 달콤하고 부드러운, 풍부한 버터맛이 느껴졌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은 별로였다고 한다면 그 미각을 통해 쓰디쓴 비누맛이 났을 것이다.) 묘사도, 서술도, 분위기도 독특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시작한다.

우선 이 책은 주인공 로즈와 주인공의 쌍둥이 언니이자 미각이 연결된 릴리, 로즈의 학창시절 선망대상이자 친구 제미마, 릴리의 현남친 필, 필의 부인인 라라 정도가 주요인물이다. 사실 임팩트 있는 인물이 조금 더 떠오르긴 했는데, 너무 많이 적으면 수습하기 피곤해지니까... 생략하기로 했다. 로즈는 극단적 거식증에 시달리고, 릴리는 늘 로즈의 몫까지 먹어주다 못해 폭식을 하며 자신을 학대한다. 제미마는 로즈가 거식증 문화에 발을 들이게 한 인물이다. 둘 사이 성적인 긴장감이 늘 존재했고, 그로 인한 강렬한 흡입감이 로즈가 거식증을 자신의 일부분으로 여기게끔 한 것은 물론이다. 릴리는 폭식과 연애를 통해 자기자신을 학대한다. 이 행동이 점점 심해지다 못해 유부남이면서 릴리에게 많은 것을 강요하는 필을 만나기 시작하는데, 이것을 계기로 로즈가 백색 공간 같은 시설에서 나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필은 부인인 라라와 함께 다이어트 식품 관련 사업을 하고 있고, 라라는 필의 외도를 알면서도 감내한다. 같이 다이어트 관련 사업을 하면서도 필과 라라의 태도는 분명 다른데, 라라는 다이어트가 좋은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아보이는 반면, 필은 다이어트를 정말 돈을 벌기 위한 도구로 다룬다. 그래서 희생자가 발생했을 때 둘의 의견이 첨예하게 갈린다. 여기까지 대충 요약을 해보았는데, 이렇게 많은 내용을 적어두어도 괜찮은 것인지 불안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이어서 적어보도록 하겠다.

-

나는 언제나 거식증을 공룡이라고 생각했다.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먼 친척뻘일 거라고, 아마도 육촌쯤 되겠거니 생각했다. 연한 베이지 색의 아름다운 자태가 떠오른다. 긴 목과 호리호리한 몸매. 키가 더 크고 몸이 투명하면서 말이 아닌 말이 혹시 존재한다면, 그 말이 바로 거식증이었을 것이다. 당신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 없다, 이미 가버렸을 테니까.

(11면)

-

위의 비유는 주인공인 로즈의 입장에서 서술되었다. 공룡 혹은 말로 묘사되는 관념, 거식증은 결코 작지 않다. 그리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결국 그것은 내부에서 자연발생한다기보다는 외부자들에 의해 체화된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외부자로 이를 테면 '필' 같은 인물들이 있다) 이 책에서는 '마른 몸'을 대하는 다양한 입장을 볼 수 있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부류는 릴리의 전남친들이었다. 그들은 뚱뚱한 여성인 릴리와 데이트함으로써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페미니스트인지 과시하려는 부류였는데, 로즈는 오히려 그들의 이런 태도가 역겹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들이 사실은 마른 몸을 가진 여성을 더 바람직한 모습으로 여긴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행동이라고 생각해 로즈와 같은 역겨움을 느꼈다. 그들 중에 '릴리'를 봐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누구 한명이라도 '릴리'를 보았다면 이후 릴리가 스스로를 학대하려는 듯 이상한 남자들만 골라 만났을 리 없기에. '릴리'는 로즈에 의해 뒤늦게 발견된다. 릴리의 단편집, 그건 릴리의 역사였다.

이 책의 가장 독특한 서술법은 본심과 실제로 뱉은 말을 차례로 나열하는 술법이었다. 이 서술의 특이함이 극대화되는 지점은 아무래도 릴리와 로즈, 이 쌍둥이는 서로의 감정을 미각으로 느낄 수 있다는 부분에서였다. 릴리는 로즈가 본심과 다른 말을 뱉을 때마다 미각으로 로즈가 거짓을 뱉는 중임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둘의 대화는 마치 그런 사실은 없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즉, 소설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간흐름에서 릴리는 로즈의 본심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로즈가 시설 바깥으로 나와 릴리를 목격했을 때, 그때 이후부터가 둘의 제대로 된 대화이다. 필에게 학대당하는 릴리에게 진심을 표현하기 시작한 그 시점 이전에 둘 사이에 오간 말은 대화라기 보다는 기만에 가깝지 않을까.

-

2001년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 중 첫번째 건물이 공격받았을 때 두번째 건물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건물 안에서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나가 표적이 되면 다른 하나는 괜찮을 거라는 듯이. 쌍둥이 빌딩 중 하나는 멀쩡히 서 있고 하나만 무너져내릴 거라는 듯이.

(612면)

-

어쩌면 작가가 이 사건을 보고 이 책의 플랏을 떠올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부분이라 따로 인용해왔다. 결국 쌍둥이는 함께 무너졌지만, 서로를 일으켰다. 밈과 리즈와 릴. 거식증 치료를 위해 시설로 들어가겠다던 리즈의 말이 밈을, 릴을 위해 시설을 나오기로 결심한 리즈의 마음이 릴을, 편지를 보내며 끝까지 리즈를 찾았던 밈의 진심이 리즈를 구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구원서사였다.

다른 사람들이 보시기에, 이 정도면 그다지 길지도 않은 서평일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이 서평이 인생을 살면서 쓴 모든 리뷰를 통틀어 가장 긴 글이었다. 대체 어떤 내용이었기에 이 사람이 이렇게 좋아하는 것 같은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한분이라도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 본 도서는 창비 서평단 활동으로 제공받았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영장 도서관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성과 관련한 묘사가 많은 책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냥, 취향이다. 그래서 한장한장 넘기기가 힘겨웠다. 500 페이지 내내 성기에 대한 묘사, 다양한 상황, 장소에서의 섹스가 반복된다. 나쁘게 말하자면 내 취향이 아니었고 좋게 말하자면 그만큼 사실적인 묘사로 가득하다. 보기 불편할 만큼 사실적인 묘사가 가져다주는 효과는 분명하다. 주인공이 특권층백인으로서 유색인종인 아서를 성적인 매력으로 가득찬, 예속적인 존재로 은근히 대상화하는 모습도, 그러면서도 그 자신도 동성애자라는 사회적약자에 속하기에 겪는 일도, 더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읽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윌리엄과 찰스의 경험이 중첩되는 것도 중첩되는 건데, 그 위로 묘하게 겹쳐지는 풍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해외에서 겪었던 캣콜링(동양인 여성이라면 여행하다 한번쯤은 겪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등학생 시절 친하게 지내던 남자애가 길거리의 모르는 여성에게 퍼부었던 무례하고 몰염치하던 평가. 상대방을 나와 동등한, 감정을 느끼고 사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행할 수 있던 모든 행위.

  사실 이 책의 서평단을 신청했을 때, 정말 책에 대한 사전정보 하나 없이 신청했다. 옵저버의 짧은 서평 하나만 보고 꽂혀 신청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용감한 책이다. 반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들의 삶에 관심이 있고 그럴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질 뿐이다. 여성이 배제된 특정한 남성들의 세계에 대한 이 책의 그림은 언제나 진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불쾌하다면, 진실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읽어본 결과, 정말 그랬다. 덧붙일 말도 뺄 말도 없었다. 이 책의 인물은 사과하지 않는다. 그저 실패를 겪는다. 윌리엄은 자신이 구원이 될 수 있다는 자만감에 푹 젖은 채로 아서에게 가던 길에 무자비한 폭행을 겪는다. 그 역시 사회의 소수자인 동성애자였기에.

  이 시점에서 최근 영화 미나리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윤여정 배우님의 조언이 떠올랐다. 성공에 대한 압박과 부담에 시달리던 나영석 PD에게 건넨 조언이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는 크게 한번 실패해 봐야 진짜 좋은 인생이 열릴 거야." 주인공이 반박도, 사과도 하지 않음에도 우리가 찝찝함을 덜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주인공이 실패를 경험하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보다 훨씬 열등하다고 생각한 인물에게 애인을 빼앗기는 주인공의 모습, 시혜적인 마음으로 아서를 찾아 가다가 겪는 무자비한 폭력. 그가 무의식적으로 가져온 우열의 기준이 '특권층백인'중심의 시각으로 이루어져 있었음을 그가 깨달았을 것이라고, 소수자를 구원하는 일은 사실 시혜적으로 베풀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도, 그가 온몸으로 겪어나가며 배울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