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을 뭐라 해야 할까. 다 마신 찻잔에 남은 찌꺼기 같기도 하고, 함부로 지울 수 없는 물때 같은 것이기도 해. 영영 사라지지 않는 실연의 상처나 계속 실패한 데서 오는 앙심이라고도 하지. 갑자기 살던 집에서 쫓겨나거나 나도 모르는새 폭삭 늙어버렸을 때도 한이 쌓이지. 하지만 거울을 깰 때 그는 아주 후련해 보였잖아. 지금쯤 한이 씻겼을 거야.
내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외국인들은 한동안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 P38

나는 숲과 땀의 냄새에 안긴 채, 마당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서로 아주 다른 세상에서 온 이들, 전연 다른 규칙속에서 자라온 이들이 마당 곳곳에 앉아 있었다. 지난 세기의 붉은 벽돌로 지은 주택 앞에서. 마주하는 눈동자들은 모두 다른 색이었다. 그들은 나를 친밀하게 여기고 또 필요로 했다. 간혹 애정조차 내주었다. 그런데도 역시 익숙해지기 어려울 만큼 낯선 유전자로 만들어진 얼굴들. 그들과 마주하는 사이 나는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나에게도 서울의 친수 혹은 가족은 이들밖에 없다는 사실을.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산에서 내려오니 너무 많은 게 변해 있었다. 그는 늙었고 산 아래 사람들은 미숙해졌다. 뒷덜미가 다시금 서늘해졌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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