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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여자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지음, 엄지영 옮김 / 푸른숲 / 2023년 12월
평점 :
한 살인 사건에 대해 여섯 명의 주요 인물이 각각 자기 기준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 종교에 맹신한 자의 어리석음이 어떤 일을 벌여가는지, 그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낳는지에 대한 기록을 보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중반까지의 흡인력이 대단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중간에 잠깐 힘이 빠지는 구간도 있지만,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를 전하는 과정이라 생각하니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는 책의 초반만 봐도 예상이 가능하지만 그 일이 "왜", "어떤 이유로" 일어났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이 좋았다. 또, 원작인 <대성당>이라는 제목을 <신을 죽인 여자들>이라고 바꾼 편집자님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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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p
그날 나는 무신론자라는 말이 저주이자 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신자가 다른 신을 믿는 사람과는 함께 살아도, 어떤 신도 믿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같이 살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22
나는 집단적 신경증을 과감히 버리고 무신론자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자유로워졌다. 모든 이에게 버림받고 외로워졌지만 그래도 마음만큼은 자유로웠다.
24p
나는 순례자들 다수가 아무 신도 믿지 않으며 나처럼 무신론자라고 확신한다. 그들을 산티아고 순례길로 이끄는 것은 결코 종교가 아니다. 그들은 특정한 장소에 도착하기 위해, 그리고 한 가지 목표와 확신을 갖기 위해 힘든 길을 마다하지 않고 걷는 것이다.
88p
어쩌면 살아 있는 사람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더 이해하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체념을 요구하지만 떠나버린 이는 그렇지 않으니까.
166p
그 시절의 경험은 순진하고 희망에 부풀어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유치했다. 우리는 문제의 남자보다 사랑 그 자체에 더 깊이 빠져 있었다.
287p
순결을 지켜야 할 의무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삼위일체처럼 절대적인 진리, 즉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 성당의 규정이자 인간들을 위해, 인간들에 의해 정해진 삶의 방식이며, 서기 1123년과 1139년에 라테란 공회의에서 제정되었다. 그 이전에는 사제들도 결혼할 수 있었다.
360p
나는 잘 풀려야 마땅한 일이 왜 그렇게 틀어졌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 또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종종 우리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물론 우리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말이다.
408p
사랑하는 무신론자 여러분, 만약 앞에 쓴 문장을 읽고 웃음이 나온다면 계속 웃도록 하렴. 진정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웃음이니까.
418p
내가 조금만 더 젊었다면, 그리고 암 진단을 받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처지가 아니었다면, 나 또한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여든 살이나 된 지금으로서는 그럴 자신이 없구나. 며칠 있으면 죽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믿어야 해. 아니, 믿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