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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평점 :
이 책은 제목부터가 나의 공감을 이끌었다. '맞아, 맞아!'를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내가 경험하며 느꼈던 것들을 작가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남자들 때문에 짜증났던 일들, 너넨 이제 죽었다며 저자와 함께 남자들 욕을 실컷 하고픈 소심한 마음으로 나는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랬는데 어머나, 처음부터 통쾌했다. 남자들은 왜 그럴까? 왜 자신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양, 자신들이 아는 것을 여자들은 모르는 양 떠들어대는 것일까? 여자라는 성에게 강해보이고 싶고 잘 보이고 싶은 동물적 본능일까, 아니면 작가의 말대로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하려는 구시대적 사고방식 때문일까. 어찌되었든,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 있는 이런 남자들의 행동은 나를 짜증나게 한다. 나는 작가와 같은 통쾌한 경험을 하진 못 했지만, 작으나마 비슷한 경험을 했다. TV에 한 때 내가 푹 빠졌던 영국 배우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내 옆에서 밥을 먹던 남자는 '저 배우가 누구냐면—' 하면서 내게 설명을 해주기 시작했다. 나? 난 속으로는 반항하면서도 겉으로는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처음 알았다는 듯이, 당신 참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듯이. 이 일화는 정치적, 사회적 문제와 같은 거창한 일화는 아니지만, 많은 점을 시사한다고 생각한다. 먼저 이 남자는 왜 자신은 알지만 나는 당연히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무지한 이 여자를 계몽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저 자기 자랑이 하고 싶었던 걸까. 다음은 나의 반응이다. 왜 나는 그 상황에서 내 생각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남자에게 순종적이었을까. 내 성격 탓도 있겠지만 남자들이 여자들을 가르치려 드는 상황에서 그 순간에는 작가도 썩 잘 대처하지 못했다고 하니,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당신이 틀렸다, 혹은 나도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겐 무척 어려운 일 같다. 남자들은 '맨스플레인'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으며 여자들은 그에 얼마나 잘 대처하고 있을까. 이렇듯 나는 그저 작은 공감, 소심한 복수(이 책을 읽으며 '맞아, 맞아!'를 외치는 것이 나의 거창한 복수였다)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작가는 그 외에도 나에게 많은 선물을 주었다.
그 선물이란 이 시대 이 사회를 살아가는, 헤쳐나가야 하는, 부당함에 맞서 싸워야하는 여성으로서의 자각이었다. 이 책은 가볍고 통쾌한 일화로 시작하지만 강간과 폭력, 살인이라는 본질적이고 무거운 주제를 다룬다. 여자는 남자의 힘이 무서워서 자유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모든 남자들이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남편이 아내를 때려 죽였다는 기사를 심심치 않게 본다. 나도 맞을까 봐 말을 하지 못한 적이 있는데, 이 남자는 선배는 후배를 때리는 게 당연하며 자기가 아랫사람을 폭력으로 혼내준 이야기를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다는 듯이 나에게 말해주었다. 그런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자유롭게 내 생각을 표현할 수 있었겠는가. 남자들이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가진 물리적인 힘 때문에 여자들의 자유가 억압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강간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전에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데, 듣고보니 정말 그랬다. 여자들은 언제나 강간을 두려워하며 살아가야 하고, 여자들을 위한 강간 예방책은 하도 들어서 이제 귀에 딱지가 앉을 것만 같지만, 지구 인구의 나머지 반인 남자들에게는 강간예방을 위한 교육을 그다지 하지 않는다는 것. 강간 당하기 싫으면 옷을 그렇게 입고 다니지 말던가, 하는 소리는 정말 많이 들어봤다. 다 여자의 잘못인 것처럼. 그럼 왜 여자는, 섹시하게 입고 다니는 남자를 강간하지 않는가? 강간하기엔, 남자들이 덜 섹시하게 입고 다니기 때문인가? 작가는 강간 뿐만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인에는, 남자들의 권리의식이 기반이 되어있다고 한다. 여자에 대한 전적인 통제권이 남자들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헤어지자고 하는 여자친구를 죽이고, 교회에 가고 싶어하는 아내를 못 가게 막고, 밤에 집에 가는 여자를 뒤따라가 강간하는 것이다. 여자들이 아무리 꽁꽁 싸매고 다녀도 일어날 강간은 일어난다. 강간문화에 대한 본문의 설명에 따르면 '강간은 여성 인구 전체가 남성 인구 전체에게 종속된 위치에 머물도록 만드는 강력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강간을 저지르지 않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강간 피해자가 되지 않는데도 말이다'라고 한다. 이 본질적인 부분을 뒤집어 엎을 수 있을까? 여자들이 남자들의 물리적 힘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는 날이 올까?
작가는 책 전반에 걸쳐 희망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행동이 소용없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고. 가깝게 우리 엄마나 할머니 세대와 비교해 보더라도 여성들의 위치와 권리는 많이 신장되었다. 이런 책이 번역되고 출간된 것만 봐도 그렇다. 이 책을 읽고나니 아직도 많이 부족하기는 하지만. '여자는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집 안에서 애나 키워야지'하는 말이, 사고방식이 사라지고 여자들이 구속에서 벗어나 표현, 행동 등 모든 자유를 두려움없이 누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 우리가 노력한다면. 모든 인간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의 자유를 위해, 나의 자유를 위해, 남자의 자유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 즉, 이 책을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겠다.
*아무리 사소한 대화에서도, 남자들은 자기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알지만 여자들은 잘 모른다는 소리를 여자들이 자꾸만 듣게 되는 것은 세상의 추악함을 지속시키는 일이자 세상의 빛을 가리는 일이다. p20
*우리 행동의 효과는 우리가 예견하지 못한, 심지어 상상도 하지 못한 방식으로 펼쳐질 수 있다. p131
*그녀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말하자면 그녀의 아킬레스건이었다. p155
*가정폭력, 맨스플레인, 강간문화, 성적 권리의식 등은 많은 여성들이 매일 접하는 세상을 재정의하고 그런 세상을 바꿔나갈 방법을 열어주는 언어도구들이다.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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