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으로부터 -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해
오스카 와일드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랑이라는 선악의 저편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를 읽고





오스카 와일드가 그의 연인이었던 남자 더글러스에게 쓴 편지를 모은 이 책에 대해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하고 긴 러브레터 가운데 하나” 라고 평가한 어느 비평가의 의견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책은 러브레터가 아니다. ‘감옥에서 : 사슬에 묶여 쓴 편지’ 라는 본래의 제목처럼 사랑이라는 사슬에 묶여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에 빠진 한 남자가 써 내려간 지옥의 묵시록 같다. 
『심연으로부터』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저울이 한쪽으로만 기울어질 때 펼쳐지는 연인 사이의 권력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지옥을 선사하는지 증언해준다. 그러니 이 책은 러브레터가 될 수 없다. 연인이라는 관계가 갑을 관계보다 더 치욕스럽게 한 사람의 정체성을 짓밟을 수 있음을 까발리고 사랑이 어떻게 선과 악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위대한 비망록이다. 



"당신이 나를 ‘유용한’ 사람으로 여기는 게 내겐 얼마나 혐오스러운 일인지, 그런 사람으로 간주되거나 그렇게 취급 받기를 원하는 예술가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말했던 것을. 예술가는 예술 그 자체처럼 본질적으로 철저하게 무용한 존재야. 당신은 내가 그런 말을 하면 불같이 화를 내곤 했지. 진실은 언제나 당신을 화나게 했어. 사실 진실은 듣기가 몹시 고통스럽고, 말하기도 아주 괴로운 법이거든. 게다가 그런다고 해서 당신이 태도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도 아니었지. 나는 매일같이 당신이 하루 종일 하는 모든 것의 비용을 대신 지불해야만 했어. 오직 터무니없는 관대함이나 형언할 수 없는 어리석음을 지닌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었지. 그리고 난 불행하게도 그 둘을 완벽하게 합쳐놓은 사람이었던 거야."




오스카 와일드보다 무려 열 여섯 살이 어렸던 청년 더글러스는 오스카 와일드의 부와 명성을 모두 앗아갔다. 터무니없는 관대함과 형언할 수 없는 어리석음을 완벽하게 합쳐놓은 사람이었다는 그의 자각은 불행하게도 너무 늦었다. 차디찬 감옥에 수감되고 나서야 매일 한 장씩 편지를 써 내려가며 그는 비로소 사랑이라는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선악의 저편>에서 ‘만일 네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라고 이야기한 니체의 표현처럼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심연과 마주하며 절망과 고통 조차 깨달음으로 승화시켰다. 그의 편지 속에는 자신을 감옥에 유배시킨 장본인인 연인에 대한 일방적인 비난과 직접적인 힐난보다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행위와 선택에 대한 통찰이 가득하다. 그의 소설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고 극단적인 나르시시즘에 현기증이 날 만큼 피로했던 경험마저 애잔하고 먹먹한 기억으로 둔갑시킬 만큼 심연으로부터』 는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한 그 사랑이 ‘세상의 상처받고 망가진 위대한 영혼들과 조화를 이루게 한 행위’였노라는 표현처럼 그는 절망의 순간마저 예술의 영역으로 이끄는 진정한 ‘작가’였다.



"지혜가 내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철학은 불모지와 같고 내게 위안을 주고자 했던 이들의 격언이나 문구가 내 입 속에서 티끌과 재처럼 서걱거릴 때 그 조용히 침묵하던 작은 사랑의 행위에 대한 기억은 나를 위해 모든 연민의 우물을 막아놓았던 봉인을 풀고, 사막을 장미처럼 활짝 꽃피우게 하며, 고독한 유배의 씁쓸함으로부터 나를 끌어내 세상의 상처받고 망가진 위대한 영혼들과 조화를 이루게 했지."



연애를 하면서 감정의 저울이 내 쪽으로 기울 때, 나는 얼마나 그를 ‘유용한’ 존재로 인식했었을까? 반대로 그 권력의 저울이 저 쪽으로 기울어졌음을 확인하고 나는 어떻게 그의 냉대를 순순히 받아들이며 인내했던가. 19세기의 동성연애 커플의 잔혹사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는 심연으로부터』 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보통의 연인들에게도 유효할 만큼 사랑이라는 선악의 저편에서 어떻게 사랑하고 사랑 받아야 하는지 가르쳐준다. 이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게 될 때, 누군가와 또 다시 이별하게 될 때, 숱하게 출간된 사랑 지침서와 이별 에세이들을 제쳐두고 나는 늘 오스카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 를 펼쳐보게 될 것 같다.








당신은 삶의 쾌락과 예술의 기쁨을 배우기 위해 나에게 왔지. 어쩌면 난 당신에게 그보다 훨씬 더 멋진 것을, 고통의 의미와 그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기 위해 선택된 사람인지도 몰라. 
- 당신의 좋은 친구 오스카 와일드- <심연으로부터 마지막 편지 문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