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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조용히 좀 해요
레이먼드 카버 지음, 손성경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3월
평점 :
"불행의 징후에서 구원의 징후로"
극심한
생활고와 지독한 알코올중독에 시달렸던 레이먼드 카버.
그래서일까.
그의 첫
번째 단편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속의
이야기들은 좀처럼 삶을 긍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의 삶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은 어떤 거창한 사건 때문이 아니다.
아주 작은
일상의 균열.
『제발 조용히 좀 해요』에 수록된
소설들은 대부분 바로 이 작은 균열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주인공들은 그 균열의 원인을 살피거나,
임시방편으로나마
균열을 메우기 위해 고심하게 되고 그러한 노력이 다시 뜻하지 않은 실수나 결과로 이어지며 종국엔 그것이 작은 균열이 아닌 주인공의 삶을 뒤흔들
진동의 시작임을 분명히 못 박는다.
「학생의
아내」에서 마지막
순간 아내가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기까지 그들 부부에게는 어떤 파멸이나 파국도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의 무관심과 무능함,
이기성이
침실에서 일상적으로 펼쳐지며 독자들 역시 마지막 아내의 절절한 기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게 만든다.
불행의
징후들은 그렇게 평범한 삶 속에 더 쉽게 파고들곤 한다.
「그들은
당신 남편이 아니야」속의 남자
주인공은 실직이라는 현실적인 불안보다 뚱뚱한 아내가 밖에서 놀림을 당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느낀다.
살을 뺀
아내를 가리키며 낯선 남자들에게 “저
여자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확인하는 남편의 모습에서는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 남자가 아내를 통해 소소하게나마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욕망 역시 불안을 수습하려는 노력이라기보다 불안을 스스로 인정하는 징후이기에 주인공의 모습은 더 초라해 보일 뿐이다.
그래서
『제발 조용히
좀 해요』에 수록된
단편들을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되고 당연했던 일상의 풍경들을 날 선 시선으로 들여다보게 된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에게 소통은 아예 불가능하다.
최선의
방법은 그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
나는 그래서
레이먼드 카버의 이야기를 자주 찾지 않았다.
그 얼어붙은
시선과 늘 어긋나는 대화들이 불편하고 힘겨웠다.
누군가는
‘여백의
미’가 극치를
이룬다고 평했지만 나에겐 온통 파국의 전조로 느껴졌다.
그런데
카버의 후기 단편들을 모은『대성당』은 위대한
작가가 세월의 풍파를 지나며 어떻게 삶을 보는 시선을 바꾸게 되는 지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작품 같다.
그의 이야기
속에 자주 등장했던 파산자와 알코올중독자도 마냥 불행의 징후를 끌어안기보다 그 징후가 꼭 자신만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절망의 순간,
그 절망의
전조가 전부인 듯 이야기를 끝내고 말았던 전작들과 달리 '대성당'의 몇몇
작품들 속에선 아주 사소한 행동이나 대화들이 누군가에게 말도 안 되는 구원이 되어 예상 밖의 감동을 선사한다.
실제로
대성당을 집필할 당시 카버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누구도 파산자나 알코올중독자 혹은 거짓말쟁이가 되겠단 마음을 먹고
삶에 뛰어들지는 않습니다.”
파산자나
알코올중독자,
거짓말쟁이들도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나진 않았다는 통찰.
알코올중독자로
거의 한 평생을 살아온 그 역시 결국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
‘어쩔 수
없음’을 극복하기
위해 카버는 『대성당』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작지만
강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먼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에 등장하는
주인공 부부는 아이가 생일날 아침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는 불행을 겪는다.
어딘가
미덥지 않은 의사와 집으로 매일 걸려오는 제빵사의 기괴한 전화에 지쳐가는 부부.
결국 아이는
숨을 거두고 부부는 절망의 끝에서 복수를 다짐하며 자신들을 괴롭혀온 제빵사를 찾아간다.
부부가
제빵사의 가게에 들어가는 이 순간부터 나는 소설 속 모든 장면이 머릿속에 이미지로 펼쳐졌다.
어둠과
따뜻한 불빛,
차가운
공기와 훈훈한 열기,
죽음의
비린내와 포근한 빵 굽는 냄새 등 아이의 죽음을 겪은 부부와 빵을 구울 준비를 하는 제빵사가 서로 완전히 다른 시공간 속에서
부딪힌다.
이 극단의
이미지들은 불행의 징후들이 그랬듯,
아주 사소한
곳에서 소소한 관심과 작은 손길만으로 더 이상 어긋나지 않고 어우러지기 시작한다.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겠소. 내
마음이 어떤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거요. 내 말을 잘 들어요. 나는 빵장수일 뿐이요. (....) 예전에 그러니까 몇 십년 전에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을지 몰라요. 지금은 기억도 안 나는 일들이니까 나도 잘 모르겠소. 어쨌든 내가 어땠건 이제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거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한 일들이 없어지는 건 아니겠지요.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또 이런 식으로 행동한 제 자신에게도 측은한 마음이 듭니다.
(...) 내 진심을 받아주고 나를 용서해주면 안 되겠소?"
(...)
"뭘 좀 드셔야겠습니다. 내가 갓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 뭔가를 먹는 게 도움이 된다오. 더 있소. 다 드시오.
먹고 싶은 만큼 드시오. 세상의 모든 롤빵이 다 여기에 있으니."
이해한다,
미안하다는
따듯한 말 한마디.
갓 구운
빵과 커피라는 평범한 관심.
부부와
제빵사가 함께 빵을 나누며 희미한 햇살이 비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소설 속 마지막 장면은 ‘구원’이라는 것이
어떤 거창한 시도나 성취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이 따뜻한
빵과 소통의 의지가 담긴 말 한 마디로 카버는 불행의 징후를 찾기보다 구원의 징후를 찾기로 나섰는지도 모른다.
특히 「대성당」은 그
구원의 징후가 극치를 이루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희망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아내의 맹인
친구가 영 불편하고 마땅찮은 남편.
그는 아내가
자신보다 맹인 친구에게 더 많은 속내를 털어놓고 가깝게 지낸다는 사실에 질투를 느끼기보다 자존심이 상했다고 느낀다.
그에게
아내의 맹인친구는 그저 장애인일 뿐이기 때문이다.
남편과
맹인의 대화는 그래서 계속 어긋나기만 한다.
맹인이 한
걸음 다가가면 남편은 서너 발쯤 뒤로 물러서며 소통하기를 거부한다.
그에게
세계는 어울릴 수 있는 것과 어울릴 수 없는 것이 분명하게 나눠진 곳처럼 보인다.
그런데
티비에서 대성당을 소개하는 방송이 나오고 남편은 그 웅장한 성당의 모습을 지켜보는 한 편 맹인은 궁금증만 많아질 뿐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인식하는 순간,
소설은 그
한계를 비웃듯 맹인과 남편의 손을 맞잡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펜을 쥐고 함께 빈 도화지에 대성당을 그린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그저
정상인이 장애인에게 건넨 작은 배려,
그러니까
그가 대성당을 손끝으로나마 볼 수 있도록 그의 손을 함께 잡아주는 것.
그 작은
배려가 소통의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
조용한 소통 속에서 남편의 일그러진 감정과 생각들이 반듯하게 다려지는 것 같다.
불행의
징후들을 가장 예리하게 포착했던 작가,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은 그가
인생이라는 시험지에 고심 끝에 내 놓은 답지처럼 느껴진다.
불행의
징후를 찾다보니 그 끝에서 구원의 징후를 찾았노라는.
어느 거장의
부끄러운 속삭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