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프랑스식 서재』는 하나의 언어에서 또 다른 언어로 옮기는 그 막연한 작업을 20여 년간 해 온 번역가 김남주의 '옮긴이의 글'을 엮어놓은 책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대학시절 무심코 수강한 '영어 번역' 수업을 통해 번역이 창작 글쓰기와는 다른 차원의 끈기와 작가성이 필요하단 것을 깨달았다. 매 수업마다 한 단어, 문장을 번역하는 과정은 가장 정답에 근접한 가능성을 선택하는 막연함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흐릿한 과정뿐만 아니라 내가 옮겨낸 결과물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내놓기 부끄러울 정도로 조악하고 볼품없는 문장 앞에 더 큰 좌절감을 겪어야 했던 이유는 정답이 없는 번역문, 조금이라도 더 완벽한 번역이 나오면 그 자리를 내줘야하는 유연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한 문장이 한 페이지가 되는 그 느릿한 번역 작업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기 때문에 번역가의 나직한 고백이 담긴 아래 서문이 강하게 와 닿았는지 모르겠다.
“20대 후반부터 30대, 40대를 살아오는 동안 번역은 내 밥벌이였다. 그러나 나는 줄곧 이 일을 내 삶의 징검다리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강 저편으로 가기 위해 딛고 가는. 오랫동안 내 시선은 내가 딛고 있는 그 징검다리가 아니라 내가 당도해야 할 강 저편 기슭에 고정되어 있었다고 고백한다. 문화와 정신을 전달한다는 감동과 자부는 대개는 무능과 게으름과 악조건 속에서 사그라들고, 표현과 내용의 좌충우돌 속에서 많은 밤들을 새웠다. 저울의 한쪽에 착실히 말들을 올려놓으며 한 권의 번역을 마치고 나면 머릿속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듯 일상적인 대화조차 더듬고 버벅대고 순서를 바꾸기 일쑤였다.” - 『나의 프랑스식 서재』 중 -
쉽지 않을 것 이다. 프랑수아즈 사강, 아멜리 노통브, 로맹가리, 가즈오 이시구로 등의 작가들의 글을 우리말로 옮겨낸다는 것은 수많은 문장들과 함께 지새운 좌충우돌의 밤을 의미할 것이다. 이들의 작품이 단순히 영어를 한글로 고스란히 옮겨내는 축역이 아니라 번역가 김남주가 꾸준한 작가와의 대화로 만들어낸 아멜리 노통브, 가즈오 이시구로 글이었기에 언어에 새겨져 있는 역사적·문화적 의미뿐만 아니라 작가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전해졌을 것이다.
“요컨대 가즈오 이시구로는 자신의 관심이 장르나 소재를 넘어서서 다만 ‘인간’에 있다고, 문학의 기능이 내면적이고 문화적인 진화에 있다고 우리를 설득한다. 그 설득의 임무를 맡은 그의 페르소나들은 분홍보다는 푸른빛이고, 아침보다는 저녁이며, 성공보다는 실패 쪽에 가깝게 위치해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품위와 희망을 잃지 않는다. ” - <나를 보내지마> 옮긴이의 글 중에서-
@ 영화 <Never Let Me Go> 스틸컷
위의 <나를 보내지마> 의 '옮긴이의 글’은 가즈오 이시구로란 작가의 문체에 빠져 그의 전작을 다 찾아 읽게 만든 힘, 그 힘이 온전히 원작자에게만 실려 있다고 단언할수 없게 만든다. 국내에 소개된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모두 번역가 김남주의 손을 거친 것들이다. 그의 작품 전반에 흐르는 끔찍하면서 동시에 슬픈 정서, 그리고 천천히 잔류하는 듯한 배경묘사, 흐릿하고 밋밋하며 느리게 묘사하는 인물들. 어쩌면 번역가도 나처럼 한 명의 독자로서 위와 같은 감정을 느꼈고, 자연스럽게 그것이 글로 담아진 것은 아닐까? '옮긴이의 글' 을 통해 번역가 김남주가 읽은 <나를 보내지마>는 같은 의미의 텍스트로 나에게 다가왔음을 확인했다.
누구의 번역을 거치느냐에 따라 언어 사이의 느낌과 분위기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원작자의 글만큼 번역가의 텍스트가 가진 힘이 중요하기 때문에 원작자와 끊임없는 대화하는 과정 속에서 번역자의 철학이 표명되고 그것이 실천되는 번역이 바로 훌륭한 번역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그녀의 숱한 밤의 고뇌들 덕분에 나는 프랑스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로맹가리, 아멜리 노통브, 가즈오 이시구로의 문장과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고마움은 책 한권의 가격으로 충분하지 않은 듯하다.
두 언어 사이에 다리를 놓는 번역은 해독과 해석의 수준을 넘어서, 원문의 문체와 리듬을 독자에게 온전히 전달하기 위한 작업이며, 그렇게 탄생한 아름답고 유려한 번역문은 원문의 가치를 한껏 느끼고 문학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든다. 번역가 김남주의 첫 에세이 『나의 프랑스식 서재』는 책상에서, 침대에서, 지하철에서 무심코 읽었던 한 권의 책이 나에게 오기까지의 과정에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 그 목소리를 무심코 지나쳐온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