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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는 다정하게 씁니다 - 나의 안녕에 무심했던 날들에 보내는 첫 다정
김영숙 지음 / 브로북스 / 2025년 5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남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정작 자기 이야기를 쓰기까지 오래 걸렸다.” 방송작가 김영숙은 오랜 시간 수많은 ‘자연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의 소음을 걷어낸 그들만의 진실에 귀 기울여 왔다. 그러나 정작 자기 마음의 소리는 미뤄두었던 이 작가는 이제서야 조심스럽게 자신의 에필로그를 꺼낸다. <에필로그는 다정하게 씁니다>는 그렇게 잊혀졌던 한 사람의 목소리가, 조용하고 섬세하게 다시금 세상에 닿는 기록이다.
책은 '나는 자연인이다' 촬영을 통해 만난 자연인들의 삶에서 시작한다. 방송을 통해 보여진 건 때론 괴짜 같고 엉뚱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모두는 돈, 시간, 인간관계에 지친 끝에 진짜 ‘나’를 되찾기 위해 숲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자연 속에서 묵묵히 자기 자신과 마주한 그들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진심으로 평온해보였다. 작가는 그런 자연인들을 통해 삶의 본질적인 질문에 다가간다. “무엇이 나를 진짜 행복하게 하는가?”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자연에 대한 예찬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 자신의 솔직하고 적나라한 ‘삶의 뒷면’을 담아낸다. 방송국 막내 작가 지연이와의 관계를 돌아보며 그는 성실하지만 느렸던 후배에게 화를 내고 후회했던 자신의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담담하게 고백한다. 이 대목은 특히 인상 깊다. ‘평정심을 잃지 않고, 누군가를 다치게 하지 않으며, 같잖은 힘자랑도 하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다짐은, 오늘도 감정의 중심을 잡기 힘든 우리 모두에게 울림이 크다.
책은 또한 방송이라는 ‘속도의 세계’에서 묻히기 쉬운 감정과 관계, 후회와 용서, 치유와 성장을 묵묵히 기록한다. ‘27세 남자의 환갑까지의 자기 벌 같은 약속’에 담긴 사연을 방송의 흐름 안에 모두 담지 못했던 미안함, 다 담을 수 없는 삶의 깊이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은 그 자체로 이 책의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는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단정할 수 없으며, 결국 할 수 있는 건 조금 더 성실하고 다정하게 귀 기울이는 것뿐이다.
작가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의 경박함에 지쳐간다. 남의 칭찬에 들떴다가, 비판에 주저앉는 자신을 바라보며 “이 정도 연차면 스스로를 믿어도 될 때”라고 자신을 다잡는다. 그리고 매달 10만 원, 누군가를 위한 소소한 나눔을 이어가는 이야기 역시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작은 정성이 남긴 파동이 얼마나 오래 마음을 울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순간이다.
또한 이 책은 육체적 아픔과 정신적 고통을 동시에 품은 저자의 내면 여정이기도 하다. 어릴 적 수술 후유증으로 결국 인공관절을 해야 했던 몸, 겉으로는 괜찮아졌지만, 속은 여전히 고장 난 듯한 마음. 그 모든 고독과 감정을 작가는 숨기지 않고, 정직하게 꺼내 놓는다. 그리고 말한다. “40년 넘게 나로 살았지만 이제야 나를 사귀고 있는 것 같다.” 이 진심은 독자의 마음을 묵직하게 감싼다.
<에필로그는 다정하게 씁니다>는 인생의 매듭을 서둘러 풀지 않겠다는 다짐, 실패와 부끄러움조차 스스로의 일부로 품어내려는 용기의 기록이다. 무수한 데드라인과 비평 속에서,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고 있는 우리에게 이 책은 말한다. “누가 뭐래도 여기까지 온 게 실력이다. 그러니 충분히, 충분하다.”
자연인의 삶에서, 동료 작가와의 기억에서, 그리고 자신의 아픈 몸과 마음에서 길어 올린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당신은, 지금 괜찮은가요? 대답은 아직 없더라도, 이 책 한 권은 그 질문을 할 수 있는 용기를 다정하게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