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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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벌집과 꿀』은 한국계 미국인 작가 폴 윤(Paul Yoon)의 대표 단편 7편을 묶은 소설집이다. 그 어떤 소설보다 조용하고 절제된 언어로, 국경과 시간, 문화와 언어의 경계를 넘어 흩어진 사람들의 삶을 포착해낸다. 이 책은 한마디로 디아스포라의 세밀화다. 탈북자, 고려인, 고아, 이민자 등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타지에서 생존을 넘어 살아내는 방식, 그 과정에서 마주하는 고통과 연대, 희망과 단절을 날카롭고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시대와 대륙을 넘는 디아스포라의 여정
소설 속 배경은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에도시대 일본, 스페인, 영국, 미국까지 광범위하다. 그러나 이야기의 중심은 언제나 ‘이주’의 상처를 가진 한국계 인물들이다. 이들은 단지 떠나온 존재가 아니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정치적 맥락과 사회적 구조, 그리고 가장 내밀한 감정까지 고스란히 품고 있다.

「코마로프」는 스페인에서 청소일을 하며 살아가는 탈북 여성 주연이 주인공이다. 어느 날, 그녀 앞에 나타난 두 남자는 그녀의 과거, 그리고 사라졌던 아들과 연결되는 흔적을 들고 온다. 아들의 이름은 니콜라이 코마로프. 그러나 재회는 진실의 확언이 아닌, 삶과 기억의 애틋한 조각들이 서로를 스쳐가는 경험이다. 주연은 결국 아들에게, 자신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하며 “정말 찾고 싶다면 노래하던 여자에게서 시작하라”고 말하고 떠난다. 이 장면은 이산의 끝이 항상 화해나 재건이 아님을, 때로는 체념과 수용이 더 진실된 감정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역참에서」는 에도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조선에서 온 고아 소녀 유미를 고국으로 돌려보내는 사무라이 야마시타 도시오의 여정을 그린다. 유미는 가부장적 학대 아래 살아남은 존재다. 마지막 순간, 개를 활로 쏘아 죽이는 장면은 억눌린 분노의 해방이자 새로운 삶을 위한 첫 몸짓이다. 이 장면은 단순히 문화 간 충돌을 넘어서, 소외된 타자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전환의 순간으로 읽힌다.

​‘벌집과 꿀’: 고통 속에 피어난 은유
표제작 「벌집과 꿀」은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 마을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된다. 성폭력, 가정폭력, 그리고 그로 인한 살인이 벌어지며, 마을 공동체는 균열을 마주하게 된다. 여자의 시신을 보고 있던 귀가 들리지 않는 딸, 시신을 매장하며 말없이 화자와 연대하는 장면은 절망 속의 연민을 담고 있다. 특히 마지막, 벌이 찻잔에 머물렀다 다시 숲으로 날아가고, 그 벌을 따라 아이와 화자가 함께 떠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숲, 벌집, 꿀 — 이것은 공동체의 분열을 넘어, 또 하나의 집을 만들기 위한 은밀한 시작으로 읽힌다. 희망이란 그렇게 시작되는 것 아닐까. 침묵 속에서, 아주 작고 느리게.

​‘말하지 않음’으로 더 많은 것을 말하는 문체
폴 윤의 문장은 마치 숨죽인 속삭임처럼 조용하다. 사건은 강렬하되, 표현은 절제되어 있다. 감정의 절정에서도 작가는 분노나 슬픔을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무채색 배경 위에 투명한 감정을 덧칠하듯, 독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 이 같은 문체는 디아스포라라는 주제와 탁월하게 어울린다. 떠나온 사람들은 쉽게 말하지 않는다. 말보다 침묵, 증명보다 기척이 더 중요한 서사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벌집과 꿀』의 인물들은 전부 고통을 지닌 존재이지만, 어느 누구도 피해자로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자기 삶을 다시 만들어간다.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또 다른 ‘집’을 짓는다. 책의 제목처럼, 벌집과 꿀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삶의 방식이며, 그 속에서 얻어지는 단맛은 고통을 감내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고귀한 감정이다.

​고향을 잃은 이들이 다시 만들어낸 ‘집’
이 소설집의 진정한 가치는, ‘이산의 아픔’ 그 자체가 아닌, 그 속에서 피어난 연대의 서사에 있다. 고향을 잃었지만, 그들은 서로의 기억 속에서 또 하나의 집을 짓는다. 타지에서 만나 또 다른 가족이 되고, 말없이 손을 내밀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그 손을 놓지 않음으로써 공동체를 만든다. 그것이 『벌집과 꿀』이 전하는 가장 따뜻한 메시지다.

​『벌집과 꿀』은 단편 문학이 보여줄 수 있는 미학적 완성도를 증명하는 동시에, 이민자와 디아스포라의 삶을 깊고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보기 드문 작품이다. 국경을 넘고, 시간을 건너, 언어와 문화의 틈 사이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이 그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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