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판문점 -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아이스토리빌 34
이규희 지음, 이현정 그림 / 밝은미래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아이스토리빌 34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내이름은 판문점
글 이규희
그림 이현정
출판 밝은미래


먼저 표지 탐색부터 해 볼까요?
판문점이 보이고 남북한 정상회담을 뜻하는 그림이에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미소가 평화를 알리는 화창한
봄 처럼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내이름은 판문점
그러나 원래 이름은 널문리라 불리었답니다.
넒ㄴ다리가 있어서 널문리라고 지었다는 설과 널빤지로 만든 문이 많은
마을이라서 널문리라고 붙였다는 얘기가 있어요.
널문리라는 이름이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려진 건 바로 임짐왜란 때였어요.
1592년 임진왜란 선조는 왜군을 피해 북쪽으로 올라갔지요.
임진강 나루에 닿았을때는 캄캄하고 도무지 앞은 보이지 않았지요.
누군가가 정자에 불을 질러 강을 밝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널빤지 대문을 뜯어서는 다리를 만들었어요.
백성들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임금이었지만 임금이 버선을 벗고 바짓단을

걷은 채 찬 강물을 건너는 걸 차마 볼 수가 없었지요.
선조는 눈물을 흘리며 널빤지 다리를 건너 개성으로 갔어요.
그날 이후 이 마을은 널문리라고 불리기 시작했어요.

그 이후 널문리는 길손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마을이었어요. 사람들은 널문리

주막에서 다리쉼을 하거나 목을 축이곤 또 다시 갈길을 가곤 했어요.


널문리는 오랜 세월이 지나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선적리와 개풍군 봉동면 침송리 사이에 있는 아주 한적한 농촌 마을이었어요.
1950년 6월 25일 눈 깜작할 사이에 일어난 전쟁. 전쟁으로 이 모든걸 하루 아침에 바뀌었어요.

마을 사람들도 서둘러 피난을 떠나고 그 어디에도 평화롭던 널문리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어요.

널문리에 낮선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전쟁을 중단하자는 회의를 하러 모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휴전회담은 1951년 7월 10일 개성 북쪽에 있는 내봉장에서 처음 열렸어요. 그러다가 중립적인 장소를 찾던 유엔군이 개성에서 남쪽으로 20여리 떨어진 널문리를 제안했어요.
그렇게 해서 그해 10월 25일부터 다시 한반도의 중간인 널문리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어요.
널문리라는 이름은 중국어 표기가 어려우니 한문으로 판문점 이라고 제안했고, 순 우리말 널문리

주막을 한자로 적어 판문점으로 부르게 되었어요.
널문리를 판문으로, 주마을 가게라는 뜻의 한자어 점으로 바꾼거에요.
그래서 내 이름, 판문점이 이렇게 태어났어요.


휴전이 되자 산과 들을 울리던 총소리, 대포소리는 멋었지만, 그보다 더
가슴아픈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이 그어졌어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갱계를 이루는 선이에요.
이 경계선을 흔히 휴전선이라고 부르지요.
그 뿐만 아니라 구나정전위원회는 군사분계선에서부터 남북으로 각각
2킬로미터, 모두 4킬로미터에 이르는 비무장지대(DMZ)를 만들었어요.

1953년 8월 5일
휴전협정에서 약속한 대로 6,25 한국전쟁으로 포로가 되었던 국군과 인민군,

중국군 포로들을 각각 자기 고향으로 송환하는 날이었어요.
'제발 아무 일 없어야 할 텐데'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널문다리를 지나는 포로들을 바라보았어요.
서로 맞붙어 싸울까 봐 난 겁이 났어요. 다행히 그들은 널문다리를 건너
각자 돌아갔어요. "야아, 이제 살았다!" 길고 긴 포로생활에서 지칠 대로 지친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으로 들어서자마자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어요.

1953년 10월
판문점을 옮겼어요. 예전에 있던 곳에서 남동쪽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했어요.
사람들은 나를 영어로 제이에스에이(JSA) 공동경비구역이라는 뜻이에요.

남북 적십자 회담
1971년 8월 20일 휴전선이 생긴지 18년 만에 남과 북이 얼굴을 맞대고
적심자회담이 열렸어요.
서로 총을 겨누고 있지만, 정치나 군사적 관계를 떠나 서로 돕고 해결할
것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자는 것이에요.
회담의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이산가족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해서
알려 주는 것과 아직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는 것, 헤어져
있던 가족들이 서로 편지를 주고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이었어요.


1972년 7월 4일 '7.4 남북공동 성명'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를 했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을 통일의
3대원칙이라고 남과 북이 합의하여 얘기를 했어요.
평화 통일 언제 될지를 기대하며 말이죠.

8.18도끼 만행 사건으로 알려진 미루나무 사건
이산가족 찾기 운동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이 하나의 팀을 구성해서 참가한다는 소식
1998년 6월 북으로 가는 소 떼
남한사람들이 금강산을 가볼 수 있는 금강산 관광
남한의 기술려과 자본, 그리고 북한의 값싸면서도 좋은 인력으로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기를 서로 원해  개성공업지구법을 만든 개성공단
으로 인해 통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판문점의 바람을 담고 있어요.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
1996년 6월 북한 경비정이 남한 해역을 침범. 연평도, 백령도를 비롯해
서해 바다에서는 늘 분쟁이 그치지 않았아요. 육지에서는 군사분계선이
정확하게 그어지고 있고, 바다에서는 북한군이 그 경계선인 북방한계선
(NLL)를 무시하고 수시로 선을 넘어요.
북한의 경비정이 북방한계선을 침범하고 우리의 고속정을 포격하였죠.
그러다 또 시간이 들러 또다시 전투를 해 왔어요.
서해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그치지 않았고, 북한은 자기네와 관계없는
일이라고 주장 했어요.
여평해전, 천안함 사건 뿐만 아니라 대량살상무기인 핵무기를 개발을 완성
했다고 발표했지요.  6차례 핵실험으를 통해 핵무기가 완성되었고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여 시험 발사까지 했어요.


다시 꽃핀 평화
2017년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이산가족 문제,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 등 남북한이 쉽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자고 북측에 제한했어요.
북한이 2018년 평팡 동계올림픽에 참가하겠다고 전해왔고,
2018년 4월 27일, 남북한 정상이 파문점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하기로 확정
평화의 바람이 점점 더 따스하게 불기 시작했어요.
2007년 이후 11년 만에 남북 정상이 만나는 자리
문재인 대통령이 먼저 다가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잡으며 인사를 하고
두 정상은 군사분계선을 상이에 두고 악수를 하고 덕담을 나누고는
5센티미터 높이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 땅을 밞았어요. 북한 지도자가
남쪽 땅을 밞은 건 휴전협정 이후 처음이었어요.
판문점에 새로운 평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남북한 모두 진심으로 평화를 바라고, 조금씩
서로의 마음을 열어  통일이 되어, 평화로운
날이 왔으면 합니다.



한반도 남북 분단의 기록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하였어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문 내용이 담겨져 있어요.




판문점은 우리 역사에서 아픈 곳입니다.
서로 같은 민족인데도 갈수도 올수도 없는 곳이지요.
저희 동네에 영화 촬영소가 있었습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을 찍었던
곳이기도 하고 판문점이 있는 곳이었지요.
가볼수 없는 판문점을 간접적으로 나마 볼 수 있었으며 또 통일이 빨리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고 했어요.
저희 가족 중에는 실향민이 없지만 가족과 떨어져 언제 볼 수 있을지를 기약 할

수 없는 마음을 알 거 같아요.
또 대전의 현충원에 잠들고 계시는 연평해전 천안함 장병들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다해 지켜주신 마음 잊지 않고 현충원
갈때마다 묵념을 하고 온답니다. 
평화를 위해 한 발짝 나아가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이 책을 통해
분단된 아픔도 느낄 수 있었을 거 같아요.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해온 일들과 희생자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역사의 아픔보다는 희망의 통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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