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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 - 뜨겁게 사랑하고 단단하게 쓰는 삶 ㅣ 일러스트 레터 3
줄리엣 가드너 지음, 최지원 옮김 / 허밍버드 / 2023년 2월
평점 :
영어학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했던 나는 좋은 교수님들을 만나 뒤늦게 영문학에 심취하였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영문학 수업을 들었던 4학년을 인생의 많은 순간 가운데 좋았던 한때로 기억한다.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스콧 피츠 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은 그 시절 원서로 읽은 소중한 추억(+ 머리를 싸매고 힘겹게 읽어 내려가던 고통)과 함께 지금까지도 인생 소설로 꼽는 작품이다.
특히 『폭풍의 언덕』의 수많은 인물과 그들의 복잡한 관계는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지만, 손으로 직접 등장인물 관계도를 그려가며 빠져 읽었던 첫 완독 원서였다. 같은 시기에 영미 시 수업도 함께 들었는데, 그때 내 마음에 꼭 들었던 시가 바로 샬럿 브론테의 「인생(Life)」이라는 시였다.
인생은, 믿건대, 현자들이 말하듯이/그렇게 어두운 꿈은 아니에요./아침에 조금 내리는 비는/흔히 화창한 날을 예고하지요./때로는 우울한 먹구름도 끼지만,/그건 지나갈 뿐이지요./소나기가 내려 장미꽃을 피운다면,/아, 비 오는 것을 왜 슬퍼하나요?
게다가 두 사람이 자매라니, 『폭풍의 언덕』 작가와 『제인 에어』 작가가 자매라니! 어떻게 좋아하지 않고 배길 수가 있었겠는가. 그때부터 브론테 자매는 내 발표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그때 이 책을 만났더라면 자료 조사와 발표 준비가 조금은 더 수월했을 텐데… 하는 우스갯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는 샬럿 브론테가 주변 인물들과 주고받은 편지 내용을 토대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자매의 아버지인 패트릭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마리아를 만나고 결혼하기까지, 브론테 자매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고 상세히 서술하기에 브론테 자매의 전기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편지를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므로 우리가 이제껏 읽어온 딱딱한 전기와는 거리가 멀다.
19세기 여성 작가들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작품을 발표하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글쓰기는 남성들의 영역으로 여겨졌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는 초판을 익명으로 출간했고, 브론테 자매는 필명으로 시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실체가 알려지는 게 싫어서 진짜 이름 대신 커러(샬럿), 엘리스(에밀리), 액턴(앤) 벨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이처럼 모호한 이름을 선택한 것은 우리가 여성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남성적 색채가 강한 기독교식 가명을 쓰는 건 양심상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딱히 우리가 글을 쓰고 사고하는 방식이 흔히 말하는 '여성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다만 여성 작가들은 편견에 좌우되기 쉽다는 막연한 인상이 있었고, 비평가들이 때때로 비판을 위해 인신공격을 하며, 보상을 위해 진정한 칭찬이 아닌 아첨을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본문 210, 212쪽)
샬럿은 1836년 여러 편의 시를 묶어 계관 시인 로버트 사우디에게 보냈다. 로버트 사우디는 샬럿의 ‘운문적 재능’을 칭찬하면서도 ‘문학은 여성에게 필생의 사업일 수 없으며 그렇게 되어서도 안 됩니다. 여성은 자신에게 합당한 직분에 몰두할수록 그저 교양이나 기분 전환을 위해 문학에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어지니까요’라며 샬럿을 타이른다. (본문 118쪽)
그러나 세 자매는 현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며 여성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들을 전면에 내세웠으며(본문 19쪽), 문학은 그들 삶의 중심이었다(본문 142쪽).
『폭풍의 언덕』을 좋아하는 만큼 에밀리에 관한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는데, 샬럿이 편지에서 묘사하는 에밀리의 성향을 읽으면서 소설의 분위기와 장면, 공간적 배경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시금 떠올렸다.
내 동생 에밀리는 황야를 사랑했다. 그 애의 눈에는 어두침침한 히스 들판에서 장미보다 화려한 꽃들이 피어나는 광경이 떠올랐고, 검푸른 산비탈의 음침한 골짜기도 그 아이의 마음속에서는 에덴동산이 되었다. 에밀리는 쓸쓸한 고독 속에서 소중한 기쁨을 무수히 찾아냈고, 자유를 적잖이, 그 무엇보다 사랑했다. (본문 138쪽)
작가 자신이 황야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이다… 엘리스 벨은 그저 눈으로 보고 감상하며 그런 경관에서 기쁨을 찾아 묘사한 게 아니다. 그녀에게 고향 언덕은 단순한 자연경관 그 이상이다. 그녀는 들새처럼, 그곳의 동물들처럼, 아니면 야생화처럼, 농작물처럼 그 안에서, 옆에서 살아왔다. 따라서 그녀는 그 풍경을 묘사해야만 하고 그것만을 묘사할 수밖에 없다. (본문 230쪽)
한 권의 책을 읽고 나서 같은 저자의 책을 한 권 더 읽거나, 책에서 언급된 내용을 토대로 다음 책을 고르는 방식을 좋아하는데 『브론테 자매, 폭풍의 언덕에서 쓴 편지』를 읽은 뒤에는 오래전에 읽었던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를 다시 꺼내 읽고 싶어졌다.
@yolko.bo_o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