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안정적이라면 공자, 미래가 불안정하다면 순자, 그리고 삶에 대한 지독한 물음이 들 때 장자를 읽으라고 한다.
경쟁에서 실패했거나 낙오한 사람들은 『장자』에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긍정하고 시작할 힘을 얻게 됩니다. 쓸모 있는 나무는 베여 대들보나 서까래로 사용되지만, 쓸모없는 나무는 베이지 않고 거목으로 자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스피노자와 마르크스가 정착민적 삶을 전제로 한다면, 장자의 사유는 정착민적 삶과 더불어 유목민적 삶도 아우르는 인류학적 안목과 사유의 폭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동물도 같은 종을 지배와 복종이라는 관계로 길들이지 않습니다.
주인-늑대와 노예-늑대 혹은 주인-토끼와 노예-토끼를 보신 적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인간만큼은 주인-인간과 노예-인간으로 구분됩니다.
왕-인간과 신하-인간이나 자본가-인간과 노동자-인간의 구분은 모두 이런 반자연적인 참담함의 변주일 뿐이죠.
장자가 국가나 사회, 나아가 문명에 대해 냉소적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인간농장을 없애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정착민적 삶과 단절하면 되는 겁니다.
스스로 쓸모가 없어져 지배의 표적이 되지 않거나, 아니면 몰래 인간농장을 떠나는 겁니다.
장자의 소요유(消遙遊)는 바로 이 문맥에서 그 자리를 잡습니다.
장자가 맹목적으로 정착생활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반대하는 것은 인간 가축화와 논리입니다.
『장자』를 읽는다는 것은 인류학적 스케일에서의 안목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장자가 대붕(大鵬)이라는 거대한 새를 이야기한 이유입니다.
대붕은 천하를 벗어나 저 까마득한 북쪽에서 출발해 천하를 벗어난 저 멀리 아득한 남쪽으로 날아갑니다. 여기서 대붕은 주인-인간과 노예-인간이 구분되지 않은 공동체에 대한 꿈, 다른 인간을 지배하거나 다른 인간에게 복종하지 않는 삶에 대한 꿈을 상징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대붕은 우리 삶에 무심하지 않습니다.
애틋하게 우리를 내려다볼 뿐만 아니라, 간혹 구만리 창공의 상쾌한 바람을 몰고 우리 곁으로 하강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 대붕은 “내 등에 타라! 그러면 너는 네 삶을 너의 것으로 향유할 것”이라고 유혹하는 듯하고 어떤 때 대붕은 “작다고 체념하는 그대여! 너는 대붕보다 더 크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죽비를 내리치는 것 같습니다.
*강신주의 장자수업 키워드
“자유”
“무용(無用) -쓸모 없음”
“남이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라”
“소유욕과 자의식의 문제”
“구속되지 않는 삶”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장자가 얘기하고자 하는 중요 내용은 책 앞 부분에 나오기에 몇 가지 이야기만 소개하기로 한다.
1. 철학을 위한 찬가 - 황천 이야기